華城 道中 <화성 도중>--김 유근
華城 道中 <화성 도중>----------
김 유근(金逌根)(1785~1840)
非霧非烟颺晩風 /비무비연양만풍
和霜和雪墮晴空 /화상화설타청공
一行百里南州路 /일행백리남주로
盡日瓊林玉樹中 /진일경림옥수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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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도 연기도 아닌 것이
저녁 바람 따라 살랑살랑
눈과 서리 함께 섞여
갠 하늘가 휘날리네.
함께 가는 백리길
남쪽 가는 길가 위
날은 저물어 가도
나무숲 온통 선경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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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 이해> ----------------------------
• 非霧非烟: 안개도 아니고 연기도 아니다. 하늘이 뿌옇게 덮여 있는 상태.
다음과 같은 표현이 의외로 많았다. 자연적인 서경의 표현이다.
• 非霧非煙瑞氣多 非霧非煙暗四方 非煙非霧靄江津 非霧亦非煙
• 非煙非霧滿江潭 非煙非霧透疏簾 非烟非霧攪遙空
• 依微非霧非煙裏 非霧非煙渾若迷 如煙非煙霧非霧
• 非煙非霧轉熹微 非烟非霧鬱盈岑 非烟非霧是輕嵐。非雲非霧管陰晴
이런 표현 속에는 때때로 시대적인 어두운 배경을 암시하기도 한다.
• 晩風: 저녁 바람-- 바람에 대한 시간적 표현.
• 和霜和雪: 和는 섞이다. 타이다 .화합하여 구별할 수가 없는 상태를 말한다. 날씨의 궂은 상태의 표현이다. 눈과 서리 함께 섞여 내리는 모습이다.
계절적인 배경을 짐작할 수가 있다.
• 一行百里: 일행이란 말로 보아 여러 사람이 함께 갔다는 사실을 알 수 있고,
백리는 漢陽에서 華城 (水原) 까지의 거리이다. 황산의 시에서 화성과 관련되는 시를 연결해 보면은 지금의 지지대 고개를 거쳐 갔음을 추리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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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시는 지은이가 수원부 유수 <순조 27년(1827) 6월 10 일 임명 정2품관. 43세>의 직책을 맡은 후 어느 겨울 화성으로 가는 도중에 쓴 겨울 풍경이다.
조선 왕조 실록 기록에 보면은 純祖 28年(1828 2月 23日)에 순조 임금이
건릉(健陵) 과 현륭원(顯隆園) 에 나아가 전알(展謁)하고 친제(親祭)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 때에 함께 수행하면서 쓴 시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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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盡日: 하루 종일. 온종일, <해가 저물다> 라는 뜻을 담고 있다.
• 瓊林玉樹: 이 글에서는 눈서리를 맞고 있는 나무숲을 표현한 듯하다.
경림(瓊林)은 공물(貢物)을 저장했던 창고를 말하기도 하고,
한림원을 가리키기도 한다. 원명(苑名)으로 경림원(瓊林苑)을 말하기도 하는데 문인들이 모이는 곳을 말하기도 한다.
송(宋)나라 천자가 매년마다 경림원(瓊林苑)에서 진사들에게 잔치를 베풀어 주었으므로 후세에 전시(殿試)의 합격자 발표가 있은 후에 여러 진사들에게 잔치를 베풀어 주는 것을 경림연(瓊林宴)이라고 하였다.
玉樹는 옥수경지(玉樹瓊枝)의 준말로 귀가(貴家)의 자제를 비유하는 표현이다.
기수(琪樹)라는 말로 쓰기도 하는데 琪樹는 구슬을 드리우고 있다는 선경(仙境)의 옥수(玉樹)를 말한다. 남의 집안의 우수한 자제(子弟)를 예찬하는 말로. 지란옥수(芝蘭玉樹)< 준말로 난옥(蘭玉)>라는 말을 쓰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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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석적 이해 >-------------------------
< 1 행 >--- 안개. 연기-- 바람에 날리고
< 2 행 >-- 눈. 서리 -- 갠 하늘------- 궂은 날씨 <서경>
< 3 행 >--- 화성으로 가는 모습---- 일행들과 동반
< 4 행 >--- 해는 지고 나무숲의 모습 <선경>-----< 서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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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상적 이해 >--------------------------
해가 지고 있으며 하늘은 맑아 있어도 안개와 연기, 그리고 눈과 서리들이
휘날리고 있는 어느 겨울 쯤 한양을 떠나 수많은 일행들과 함께 가면서 바라본 나무숲이 선경처럼 환히 보였다는 느낌을 쓴
칠언절구의 시로 운자는 <東자 평성 운風. 空, 中>에 맞춘 시이다.
감상자에 따라서는 겨울의 궂은 날씨들의 묘사가 그 당시의
어떤 정치적인 배경으로 볼 수도 있겠으나 그런 상징적인 의미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一行百里 라는 시어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수행을 한 사실을 알 수가 있고, 이 내용을 조선 왕조 실록의 다음과 같은 내용에 연결시켜 보면은
순조 임금을 모시고 가면서 바라본 겨울 풍경이 瓊林玉樹라는 시어로
표현된 것은 은근히 임금의 선정에 대한 찬양을 암시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하고 짐작을 해 본다.
황산 유고 문집에 보면은 華城과 관련되는 다음과 같은 시들이 보인다.
• 華營公館次 景渼 見寄韻
• 華營元日
• 過遲遲臺感懷恭賦
• 登西將臺志感
• 長樂堂書懷
• 西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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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왕조 실록 인용 >--------------------
건릉(健陵) 과 현륭원(顯隆園) 에 나아가 전알(展謁)하고 친제(親祭)하였는데, 왕세자가 아헌례를 행하였다. 화령전(華寧殿) 에 돌아와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는데, 왕세자는 아헌례를 행하였다. 제조 김유근(金逌根) 에게 숭정(崇政)을 가자(加資)하고, 그 나머지는 시상하였다. 화성 의 유생과 무사들을 명일에 시취(試取)하라고 하령하였다○癸巳/詣 健陵 、 顯隆園 展謁親祭, 王世子行亞獻禮, 還詣 華寧殿 , 行酌獻禮, 王世子行亞獻禮。 提調 金逌根 加崇政, 其餘施賞。 命 華城 儒生武士, 明日試取。
<純祖 28年(1828 戊子 ) 2月 23日(癸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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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華城(화성)의 유래---------------
수원은 부족국가 시대에 '벌물, '牟水(모수)'라 하던 것이, 고구려 시대에는 '물벌' 또는 '물골'리라 불리며 한자로 '買忽郡(매홀군)'이라 표기하였다.
신라시대 경덕왕 16년(757)때에는 순수한 우리말의 뜻에 해당하는 한자로 맞추어, '水城(수성)'으로 고치는 일대 개혁이 있었다.
정조 17년(1793) 1월 12일 수원부의 호칭을 '華城(화성)'으로 바꾸었고,
府使(부사)를 留守(유수)로 승격시키는 지명의 변화가 있었다. 정조 대왕이 1794년(정조 18년) 1월에 수원에 직접 행차하여 화성성역(華城城役)공사를 시작하여
34개월 만인 1796년(정조20년) 10월 16일 낙성연(落成宴)을 치룸으로써 완결되었다.
화성(華城)'이란 명호(名號)는 현륭원을 천봉(遷奉)한 '화산(花山)'에서 비롯되고, 그 이름에는 장수(長壽)·부귀(富貴)·다남(多男) 등 도시번영을 위한 송축(頌祝)의 의미가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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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黃山 김 유근(金逌根)------------------
순조 27년(1827년) 6월 10 일 수원부 유수로 임명 되었다.
수원부 유수로 임명되기 전까지는 다음과 같은 직무를 맡고 있었다.
순조 19년(1819 년)에는 이조 참의,
성균관 대사성, 비변사 제조, 홍문관 부제학
순조 20년(1820년) 행 호군, 좌부빈객, 홍문관 부제학
순조 22년(1822년) 이조 참판
순조 23년(1823 년) 성균관 대사성
순조 25년(1825 년) 사헌부 대사헌, 홍문관 제학
순조 26년(1826 년) 선혜청 제조(宣惠廳提調),한성부 판윤,예조 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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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도 관찰사 직책을 받아 서흥에 도착하여 가족들의 변고를 겪은 후
여러 번을 상서하여 사직을 청했으나 받아드리지 않았고, 순조 27 년 6 월 10 일
임금의 명령으로 급격하게 외직인 수원부 유수로 내려가게 된 것이다.
순조 27년(1827년)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
27년(1827년) 3월 26일 평안도 관찰사. / 번임(藩任)사양/
4월 27일 서흥(瑞興) 에 도착. 변고
4월 28일 공조 판서
5월 19일 병조 판서
윤 5월 4일 상서하여 사직/
윤 5월 13일 예문관 제학
6월 1일 우부빈객으로
6월 10일 수원부 유수로
28년(1828년) 3월 11일 판의금부사. 체직
4월 17일 이조 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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