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나의 학우 김부일의 서재 `둔굴재` 기문을 쓰다
屯 屈 齋 記
나의 학우(學友) 안동인(安東人) 김부일(金富鎰)은 명문가의 후손으로, 속칭 장동(壯洞)김씨 또는 소산(素山)김씨로 칭하는 명문가로 문장과 예법을 이은 분이다. 그는 늘 서재에 서책과 좋은 편액을 소장하고, 차(茶)를 벗 삼아 아름다운 골동을 완상(玩賞)하면서, 선현들의 문장에 심취하고 있다.
어느 날 서재를 방문하니 둔굴재(屯屈齋)란 편액을 걸고, 학문에 정진하는 모습이 늘 감탄스러워서 격려하기 위해 기문을 지어주려고 마음먹었다.
김학우에게 왜 ‘둔굴(屯屈)’ 이냐고 물으니, 고향 의성고을 다인의 사호(沙湖)마을에 둥굴재란 고개이름 이라며, 그 고개가 한양(漢陽)을 드나들던 길이기에 김학우가 이 고개를 넘어서, 배움을 이루었기에 옛날 정이 그리워서 이름 하였다 하고, 또 역경(易經)에 둔괘(屯卦)는 ‘귀함으로 비천함에 겸양이니, 민심을 크게 얻는다.’ 했으니 학문에 뜻을 두려면 책은 둥우리가 되어야하나 이룬 것이 부족하니, 근본을 공고히 하고자 처음 배움의 길로 가던 고개 이름이기에 ‘둔굴(屯屈)’로 지었다고 말하였다.
나는 이에 둔굴재(屯屈齋)란 ‘학문을 무리로 이루어서 큰 선비가가 되는 방’ 이라고 부르고 싶으며, 김학우가 둔굴에서 독서와 학문하는 기초이론을 선현의 글에서 찾아 말해주고 싶다.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학자로 주자학(朱子學)의 독자적 학문체계를 이룩한 백호(白湖) 윤휴(尹鑴)의 독서기(讀書記)의 서문에 ‘학자가 글을 읽으면서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으니, 생각을 하면 얻어지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지 못하게 된다. 또 생각이 있으면 기록을 하지 않을 수 없으니, 기록을 하면 남게 되고 기록하지 않으면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각하여 기록하고 또 생각하여 연구를 거듭하면 식견과 사려가 자라나서 언행이 통달하게 되는 것이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식견과 사려가 없어져서 언행이 막히게 되는 것이니, 비록 얻었다 하더라도 반드시 잃게 되는 것이다.’ 라고 선비는 독서를 해야 하는 당위성을 강조했다. 김학우도 이와 같이 서재에서 깊은 학문을 이루기위해서 주야로 독서하기를 권고한다.
그리고 실학자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이 쓴 북학의 서문(北學議序文)에서 ‘학문의 길은 다른 길이 없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길가는 사람이라도 붙들고 물어야 한다. 심지어 동복(僮僕)이라 하더라도 나보다 글자 하나라도 더 많이 안다면 우선 그에게 배워야 한다. 자기가 남만 같지 못하다고 부끄러이 여겨 자기보다 나은 사람에게 묻지 않는다면, 종신토록 고루하고 어쩔 방법이 없는 지경에 스스로 갇혀 지내게 된다.(學問之道無他。有不識。執塗之人而問之可也。僮僕多識我一字姑學。汝恥己之不若人而不問勝己。則是終身自錮於固陋無術之地也)‘ 라고 학문하는 기초방법의 이론을 이야기하고 있다.
김학우도 선현들의 독서법과 학문하는 방법을 명심하여, 학자며 선비로서 대성하기를 고대하고, 교남(嶠南)의 뛰어난 선비가 되길 바라면서 천학(淺學)한 이가 기문(記文)을 지어준다.
壬辰年 孟夏 七月二十三日에 星南別業의 北峰黌舍에서 星山 退而가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