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안동 가문 시 모음/문곡 영암 적거

녹암공 묘비문 속의 문곡과의 인연

백촌거사 2010. 4. 22. 01:54

 

 

  영암 마산리에서 바라본 월출산의 정경---- 달리는 차 안에서 2010. 4.12 일

 월출산이여. 영암이여, 녹암공 이시여  문곡이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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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암공 묘비문 속의 문곡과의 인연

필자의 변--------------------------------------

한림공(翰林公) 창(昶)의 후손이며 송도공(松島公) 해륜(海崙)의 후손이고 녹암공(鹿巖公) 진사(進士) 나경(羅儆)의 후손인 나의 하나뿐인 동서 나씨 가문의 25 세손인 나 동철(羅東哲) 따라 다녀온 영암 군서면 마산리 소재 녹암공 산소에 참배하고 와서 묘비문을 점검하다 보니 나의 조상 문곡 (文谷) 과 오고간 인간의 곡진한 정이 묘비문에 담겨 있기에 여기 다시 묘비문 전체를 담기 전에 우선 문곡과의 인연 부문만 옮겨 실으려고 한다.

그리고 족보마다 다르게 표현되어 있는 사실도 말하면서 화답시를 다시

한번 담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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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文谷 金 公壽恒과의 곡진한 인연 일화

戊午 文谷 金 公壽恒 謫居 是邦 公 徃候焉 考德問業情禮款洽

金公嘗曰 匪意 南士 有此秀士以爲得見晩也

或有時瞻望曰 月出之下 鹿門之中 吾友羅某居之可見

獎詡之深且切矣

읽기

무오 문곡 김공 수항 적거 시방 공 왕후언 고덕문업정례관흡

김공 상왈 비의남사유차수사이위득견만야

혹유 시첨망왈 월출지하녹문지중오우나모거지가견

장후지심차절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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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역

무오년

<숙종 4 1678. 50세 9월, 鐵原으로 量移되시다. 적거:1675(숙종1)-1678(숙종 4)>

문곡 김 수항<1629-1689년>께서 이 지역< 영암 구림>에서 귀양살이 하고 있을 때, 녹암공 나 경(羅儆)(1620-1682 )께서 찾아뵙고 안부를 여쭈었다. 考德問業하니 정성스러운 예(禮)가 후하고 넉넉하였다.

考德問業: 덕을 찾고 학업을 물음. 즉 공부에 관해 문답하고 배우는 것을 말한다

김공이 일찍이 말하기를,

“남쪽 선비들 중에 이처럼 뛰어난 선비가 있는 줄 몰랐다. 너무 늦게 만난 것 같다.”고 하였다.

혹 때로는 (그 쪽으로) 바라보면서 말하기를,

“달이 뜨는 아래쪽 鹿門의 가운데 내 친구 羅 모씨가 산다”

고 했으니 권면하고 칭찬함이 깊고 절실함을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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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해 노트------------------------------------

1. 녹암공의 세거지는 錦西水口之內< 나주 서수구내(금계동)>였다고 한다. 형제 삼인과 후손 7 인이 함께 성균관에 올랐을 때 사람들은 모두 다 <장문구댁墻門舊宅>( 학문으로 담장을 함께한 옛집 ) 이라고 불렀고, 영암 서쪽 鳩林구림< 낭서는 영암의 서쪽 낭주- 영암의 옛 지명>으로 옮겨 사신 분이라고 하였다.

대체로 번화한 나주시가 싫어서 나오셨고, 늙어짐에 산림천석에 만족하셔서 나오신 것이다. 마을의 나이 많은 어른들과 서로 말하기를 <녹문동의 이름은 옛날에는 뛰어난 사람들이 살 던 곳이고, 녹문은 중국 후한 시대 방덕공(龐德公)이 세상을 피해 살 던 곳이다. 오늘의 녹문은 나공의 자취가 숨겨진 곳이고 월출산 아래에 나 선생이 있어 이르게 된 것이라고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녹문이란 은자가 숨어 사는 곳을 말한다. 녹암공께서 은거하셨다는 녹문은 지금의 회문리 지역쯤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다. 녹암이란 지명은 지도상에 나오는데 회문리 근처이다. 이로 보면은 녹암공이라는 아호도 이와 연관이 되고, 그리고 구림에 유거하시던 문곡과도 자주 만날 수 있는 계기를 가지시게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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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지난 4 월 12 일 영암군 군서면 마산리에 소재한 녹암공 산소를 참배하고 생각한 것은 산소 건너편 동쪽으로는 월출산이 보이고, 군서 구림으로 가는 중간 위치에 있어

두 분들이 자주 만나 서로 학문과 시문으로 정담을 나누실 수 있었다고 생각하였다.

문곡 선조님이 처음에는 영암읍에 적거지를 정하셨고, 어떤 이유인지는 확실히 모르겠으나 주위의 권고로 구림지역에 거처를 정하시고는 마음의 안정을 가지셨다는 기록들로 보면은

녹암공과 문곡 두 분께서는 학문이 통하는 지기요, 부자유스럽고 답답한 유배지 생활 속에서 마음의 큰 정신적인 위로를 주셨던 분이라고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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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곡은 1646 년( 인조24 년 병술. 18 세 )에 진사시에 장원하였고, 녹암공은 1648 년 ( 인조 26 년 무자. 9 월 초 ) 진사 (進士)시에 합격한 경력으로 보아 서로 학문으로도 깊은 우의를 나누실 수 있었던 것 같았다. 녹암공께서는 부모님에게 극진한 효성을 베풀어 드리는 일로 다시 과거에 응시하는 일은 하지 않으셨다. 실제로도 中司馬 과거시험에는 다시 나아가지 않으셨다고 한다.

 

17세에 부친님과 함께 자제군관으로 참가하셨고, 전쟁에 임해서는 <용기가 없으면 효도가 아니다.> 라고 생각하시는 투철한 충의와 효도가 있으셨던 호남지역의 열사이시다.

 

두 분께서는 진사다, 좌의정이다, 판충추부사 라는 그런 직책에 조금도 격의를 두지 않으셨고, 서로의 안부를 물었으며, 고덕문업<考德問業> 하는 사이가 되셨다.

문곡은< 뛰어난 남쪽의 선비요, 녹문 중에 내 친구 나 모 씨이다.> 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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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문곡(文谷)김수항 (金壽恒)<1629-1689> 선조님은 乙卯七月<숙종 1 1675 47 세 > 에 좌의 정 판중추부사까지 오르셨으나 집권파인 남인의 미움을 받아 영암 유배길에 드셨을 때의 심정을 다음처럼 노래하셨다.

三朝忝竊百無能。 세 조정에 벼슬길 백 가지 무능했고

一發危言衆所憎한 번의 위급한 말 많은 사람 미움 샀네

立馬王灘江上路말 세워 왕탄강 길옆에 서 있으니

西風吹淚入崇陵서녘 바람 불어와 눈물은 왕릉에 드는구나.

뜨거운 여름 유배길에 오르신 심정은 임금 향한 한없는 눈물 길이셨다.崇陵은 현종의 왕릉이다. 처음에는 원주지역이라고 하였으나 양주로 가는 도중 적거지가 영암이라는 소식을 들으시고 심정을 피력하신 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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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에는 바로 가신 것이 아니라 도착하시기 전에는 나주에 잠시 머무셨던 같다.

이런 기록은 다음 시문들에서 짐작할 수가 있다.

 

昔余南下路 옛날에 남쪽으로 내려 갈 적에

三夜宿溪堂 사흘 밤 계당에서 머물었구나.

遠客靑眸拭 유배길 나그네는 푸른 눈 씻고

主人白髮長 주인어른 흰머리 길어졌도다.

 

好兄弟孝友 좋은 형제 효도하고 우애했으며

佳子姪文章 좋은 아들 조카들은 문장 잘했네.

可惜人間夢 아까워라 인간 세상 꿈결이구나.

功名一寢郞 공명은 하나의 침랑 되었네.

 

<文谷 金壽恒 輓 南磵 羅 海鳳(1584 ~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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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 시는 석호공파 (石壕公派) 후손 나 천수(羅千洙) 님께서

필자에게 보내주신 귀중한 자료이다. 이런 시문들은 <문곡 집>에는 없고, 오직 나주 나씨 세고집(世稿集)에만 기록된 내용이다. 보내주신 자료들을 필자가 리듬에 맞게 다시 한 번 풀이를 해 본 것이다. 남간 (南磵) 나 해봉(羅 海鳳) 어르신을 위한 輓詞로 이 시 속에 나오는 溪堂 은 해봉 어르신네의 정사라고 한다. 이 정사에서 사흘 밤을 머무셨다고 한다. 나주의 진산 금성산 계곡물이 나주 시내 중앙을 가로 질러 흐르는 계천이 있는 옆에 세웠던 정자인데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고 나 천수님께서는 안타까워 하셨다. 필자도 가지고 있는 <남간집>에 보면은 문곡께서 책의 발문을 쓰신 기록이 있다.

 

“ 계곡집 속에 羅 同年 應瑞와 더불어 주고받은 작품이 가장 많았는데 나공이 어떤 분인지는 알지를 못했다. 을묘 년에 내가 남으로 귀양을 가면서 錦城을 지났는데 羅生相器 世器가 있어 일첩을 가지고 와서 보여 주었는데 그 왕부 南磵公이 溪谷과 왕복한 詩札이었다”. < 남간집 국역본 인용>

 

溪谷 장유(張維)< 1587(선조 20)~1638(인조 16). 김상용의 사위>는 문곡의 당 고모부 이었기에 더욱 더 친밀한 관계의 인연으로 먼저 세상을 떠나신 나 해봉 어르신을 위해 뒤늦게 만사를 지었고, 유배지 영암으로 가는 도중 나주의 남간 정사에서 그 후손들의 대접을 받으신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 천수 씨 말씀대로 기막힌 인연인 것이다.

功名一寢郞남간공께서 서거하신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현하신 것이다. 다른 기회에 이 시를 따로 감상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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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 나씨 세고집 권2 溪齊遺稿 附同門諸賢和韻 편에 다음과 같은 문곡 조상님의 시 한 수가 또 하나 전하고 있다. 역시 이 시도 <문곡집>에는 보이지 않는다.

天生大德敢誰何 하늘이 준 큰 덕을 감히 누가 어찌하며,

暫謫窮荒不足嗟 궁벽한 땅 졸지에 귀양 옴을 탄식 하랴.

莫道海門懷事惡 해문에서 품은 생각 나쁘다 말들 말라.

此翁隨處樂還多 이 늙은이 곳곳마다 즐거움 더 많구나.

<坎亨窩 감형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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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과 같은 기록도 있다.

「是年 文谷金先生 謫靈巖 坎亨窩 卽謫所廬號也 路過錦城 入留公廬 參奉請 南磵集序」

이 해에 문곡 김 선생이 영암으로 귀양을 갔는데 감형와는 바로 귀양지 집 이름 이다. 길이 금성(나주)을 지나게 되어 공(남간 해봉)의 집에 들어 머물렀을 때에 참봉(해봉의 자 준)이 남간집 서문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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坎亨窩 라는 시제를 달았다.

坎亨窩는 문곡 조상님께서 영암 적거시 집의 이름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坎亨감형이란 역경에 나오는 용어로 어려운 경지, 험악한 처지( 習坎) 를 마음으로 형통한다는 뜻이다.

감형은 64 괘중에서 29 번째의 괘사로 陽爻가 두 陰爻상에 빠져 있는 고단한 괘 인데 다음 괘에 나오는 離卦가 있어 이 어려움을 벗어나면 만사가 형통한다는 뜻이다.

귀양지 영암 땅에 오시게 된 것을 오히려 순명으로 받아드리는 넉넉한 여유가 있어 보인다. 이 어려움을 벗어나면 반드시 형통하리라는 기다림의 미학이 서려 있다.

참고 견뎌 가시는 의지의 끈질김이 있으시다.

이 시에서 海門은 <오늘날 영암군 군서면 해창리를 지칭하는 것 같다>. 라고

나천수 님이 피력하셨다.

海門 坎亨窩머물고 계실 때의 문곡 모습을

송시열(宋時烈)<1607(선조 40)~1689(숙종 15)>.께서는

감형와명(坎亨窩銘)이라는 글에서 다음처럼 표현하였다.

문곡 상공(文谷相公)이 해상(海上)에 있으면서 ‘감형’ 두 자를 써서 좌우에 걸어 놓고 지내셨다고 하신다.

 

한창 곤궁에 처했을 적에도 / 方處困㞃

걱정하는 마음 없었으니 / 而心不憫

이것이 바로 감괘(坎卦)의 상(象)일세 / 是爲斯象

감형와(坎亨窩)의 본의(本意)는 / 惟其取義

학문을 힘쓰는 데 있을 뿐이다 / 攻學靡他

더욱이 감괘의 한 양에는 / 矧坎一陽

부의 뜻이 내포되어 있다 / 寔有孚義

부는 곧 성신(誠信)으로 / 孚是誠意

마치 새가 새끼를 안은 듯한데 / 如瓜抱子

상공은 이를 이미 실천하였거니 / 公斯實踐

어찌 허위가 있을쏜가 / 豈有虛僞

변함도 없고 간단(間斷)도 없이 / 不貳不息

이치 궁리에만 전력하였네 / 惟窮格是事 < 고전 번역원 글 인용>

 

나주에서 사흘을 머무시고 영암에 도착하신 후 처음에는 郡吏의 집에서 매우 어려운 고통의 삶을 겪으셨다. 문곡의 <風玉亭記>에 다음처럼 기록이 되어 있다.

 

⟪余竄朗州。寓城西郡吏家 내가 낭주로 유배와서 성의 서쪽 군리의 집에서 우거하였다.而又卑椽短簷。牢密其墻戶。當夏則烘爍忒甚。風氣無自以入。是以居常鬱鬱。有坐甑之苦焉。郡故稱形勝 서까래와 처마가 낮고 그 담장이 조밀하고 단단하여 여름이면 불을 땐 듯 답답함이 심했으나 바람기운이 들어올 수가 없어 이런 이유로 사는 것이 항상 우울하여 시루에 앉아 있는 고통이 있었다.

앞글과는 다르게 매우 고통스러운 삶을 보내셨다.

 

문곡의 둘째 아드님이신 농암(農巖) 김창협 (金昌協)<1651-1708> 조상님의 글에는 이때의 상황을 다음처럼 표현하였다.

⟪府君旣之謫所。杜門不出。日取論語及朱子大全書。誦讀翫繹。殊不以遷謫爲意。尤齋時在海上。書札往復。殆無虛月。⟫<先府君行狀 農巖續集卷上行狀에서>

 

부군께서 적소에 이미 계실 때에는 두문불출하시고 논어와 주자대전 전서를 외우고 읽으며 깊이 연구하면서 보냈다, 전혀 적거지를 옮기려는 뜻이 없었다 해문에 있을 때는 때때로 우암 송시열과 편지를 주고받으시며 거의 허송세월을 보내지 않으셨다.

 

거의 2 개월을 영암에서 우거하시다 을묘 9 월 가을쯤 영암군 군서면 구림리(鳩林里)로 옮겨 안정된 생활을 보내시며 월출산에 오르시고 또 도갑사도 찾으셨다. 확실히 무슨 이유로 옮기셨는지는 알 수가 없다. 구림리로 옮겨 온 후로 생활도 안정되시고, 많은 인사들과의 교류가 있었다. 이때쯤 녹암공 과도 깊은 우의를 나누시며 정의 교류를 보내신 것이다.

영암군 서호면 서구림리 會社亭 앞 소나무 숲 중간에는 구림사람들이 1989 년에 세웠다는 <文谷先生 靈巖 謫居 遺跡之碑>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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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문곡과 녹암공의 화답시

臨別有詩曰

相看脈脈去留 千里離情一首

從此鹿車山下路 洞中溪月夢中

 

公 此曰

高秋霜露菊花 東歸獻一

斜日拜辭無限恨 此生承誨更難

읽기

임별유시왈

상간맥맥거류 천리이정일수

종차녹거산하로 동중계월몽중

 

공 차왈

고추상로국화 동귀헌일

사일배사무한한 차생승회갱난기 <칠언절구: 운자 時詩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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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역

< 이별에 임하여> 라는 시 한 편을 주시니

< 서로 보며 깊은 정 떠나고 머물 적에, 천리 길 이별의 정 한편 시에 담소이다.

녹동에 수레타고 내려오던 월출산 길 마을 속 시내 달은 꿈에나 기약하리.>

녹암공께서 화답하시니

< 하늘 높고 서리 내려 국화 향기 그윽함에 동쪽 가는 문곡님께 시 한수 드리오니. 해질녘 헤어짐이 끝없는 한이 되고 이승에서 가르침 다시 뵙기 어려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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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기록의 소실

其他往復書牘酬唱詞沒入回祿之災佚而不傳良可惜也.

읽기

기타왕복서독수창사몰입회록지재일이부전량가석야.

※ 祿은 원문에는 <火+ 彔>의 두자가 합해진 글자인데 인터넷엔 나오지 않아

의미가 같다고 생각하는 祿으로 기록했다.回祿은 불의 신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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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역

그 외에 서로 오고가던 편지글과 서로 주고받으시던 시를 적은 두루마리 들은 화 재로 없어지고 잃어버려 전하지 않으니 진실로 매우 애석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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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로 석호공파 나 천수님의 블로그 주소를 소개한다.

http://cafe.daum.net/poorpoem/7HqF/136

  ◀ 이해 노트 -----------------------------------------------

송도공 파보 347쪽과 녹암공가보 7쪽에는 모두 赤寫로 기록이 되어 있다.

그리고 녹암공 가보에는 斜日拜辭無限恨이 科日拜辭 無限恨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필자가 생각하기로는 나주나씨 대동보 권1 425쪽-427쪽에 실린 녹암공 묘비명의 기록이 가장 정확성을 기했다고 본다.

赤舃 東歸獻一詩 <적석동귀헌일시> 라는 표현이 두 분 사이의 깊은 인연을 생각해 보면은 확실히 맞을 것으로 생각이 된다.

 

舃 신발을 가리키는 <신 석> 자이다. 舃 석이 寫 자로 잘못 읽은 것이다.

 

원래 임금이 정복(正服)을 입을 때 신던 신. 왕의 면복(冕服)이나 세자의 관복(冠服)에 착용하던 목이 낮은 붉은색의 신이다.

적석(赤舃)은 옛날 천자와 제후가 신던 붉은 색의 신발로 《시경(詩經)》 빈풍(豳風) 낭발(狼跋)에 “公孫碩膚 赤舃几几”라 하였고,

《시경》 대아(大雅) 한혁(韓奕)에 “王錫韓侯 玄袞赤舃”이라 하였고,

 

《주례》 천관(天官) 총재 하(冢宰下)를 보면, “구인(屨人)은 왕 및 왕후의 적석(赤舃), 흑석(黑舃), 소구(素屨), 갈구(葛屨)를 관장한다.” 하였다.

이에 대해 정강성(鄭康成)이 말하기를, “신발 바닥이 겹으로 된 것을 석이라 하고, 홑으로 된 것을 구라고 한다.” 하였으며, 정악(鄭鍔)은 말하기를, “왕의 석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붉은 것이 상등이 된다. 왕후의 석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검은 것이 상등이 된다. 천자는 길사(吉事)에 모두 석(舃)을 착용한다. 상공(上公)은 면복(冕服)을 입을 경우에는 적석(赤舃)을 착용한다. 제후는 면복을 입을 경우 역시 적석을 착용한다. 그 나머지는 모두 구를 착용한다.” 하였다. 후세에는 조복(朝服)과 제복(祭服)의 경우에는 모두 화(靴)를 착용하고, 더는 석과 구를 착용하는 제도가 없었다. 라고 설명이 되어 있다.

이로 보면은 赤舃은 귀인이 신는 신. 존귀한 사람이 신는 붉은 신을 말한다.

영암으로 유배되어온 문곡은 마지막에 좌의정이라는 신분인 것으로 보아 이글에서 적사는 문곡을 가리키는 말이요, 東歸는 영암을 떠나 그 해 가을 철원 땅으로 옮겨진 사실이다. 獻一라는 시어는 이별에 임하여 녹암공에게 드린 시에 대한 그 화답시 한 편을 드린다는 존경의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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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자 하나가 잘못 됨으로 인하여 시의 본뜻이 감쇄된다는 것은 깊은 안타까움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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鹿車 라는 의미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인지 확실히 몰랐었는데

녹은 녹암공이 머무시던 녹동 녹문을 가리키는 말이라는 것을 영암, 군서, 마산리, 구림길을 지나가면서 깨닫게 되었다. 월출산을 등정도 하시고, 수레를 타고 녹암공을 만나시려고 녹암으로 오시는 길이며,

 

洞中溪月夢中는 영암을 떠나가도 구림을 떠나가도 앉으나 서나 늘 꿈속에서 떠오를 영암의 모습이요, 월출산의 달이요, 마을 앞 시냇가요, 남쪽의 가장 뛰어난 선비 녹암공이 삼삼하게 그리워 질 것이라는 강한 그리움을 담고 있는 것이다.

필자가 그날을 품어 안으며 다음처럼 시조의 형식으로 필자의 느낌을 담아 보았다.

 

相看脈脈去留 千里離情一首

從此鹿車山下路 洞中溪月夢中

서로 보며 오간 정들 한 수 시에 이별 담네.

녹동 마을 월출산 길 수레 타며 오갔구나 .

꿈 속에 아련히 비칠 구림 냇가 둥근 달아.

 

高秋霜露菊花 東歸獻一

斜日拜辭無限恨 此生承誨更難

가을 서리 짙게 묻어 국화 향기 은은할 제

떠나시는 재상님께 시 한수 드립니다.

해질녘 끝없는 한은 이승에서 다시 뵈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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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鹿巖公 묘비명 ●------------------------

묘비는 녹암공이 돌아가시고 167년이 흐른 후 1849년 < 헌종 15 년> 5 월에 세워졌다. 그런데 비석의 문자가 이지러지고 닳아 없어져서

<文而字缺 문이자결멸>1979 년 기미 년 秋享때 새 비석을 세웠고, 1980년 경신년 3 월 10일에

27대 손 기수 (琪洙) (1914-1991)<자 珍明 아호 梧塘 향년 67 세>님이 글씨를 썼다. 문중과 서로 의론하여 구비는 상석 아래에 묻어 두었다가 고치어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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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녹암공 묘소 앞쪽의  묘비

  1980 년 새로 세운 묘비의 뒷면

 2010 년 4, 12 일 함께 참석했던 가족들의 모습,  동서와  처제,강진 누님 매형, 그리고 필자의 아내

 

충과 효로써 기대었으니 나 씨 가문 대대로 아름다움 이을 수 있어라.

왕성한 터 금곡 자리에 물과 같은 정신과 영혼이 새겨질 것이라. 그리고

이 풍성한 비 석 앞에서 오직 천 년 백 년이고 제사를 지내리라.

 녹암공의 25 대 손 나동철의 가문이 늘 훌륭하고 늘 화평스러운 가정이 되리라. 고향을 버리지 않는 그 마음이 언제나   월출산, 그리고 금정과 취정, 영암 땅의 기운이 항상 넘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