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안동 가문 시 모음/문곡 영암 적거

문곡의 이별시--鳩林 제 군자와의 이별

백촌거사 2010. 4. 27. 12:15

文谷 先生 奉別 鳩林 諸君子

                                               <문곡 선생 봉별 구림 제 군자>

           鳩林 제 군자와의 이별

                                                    김 수항(金壽恒)

                                                            1629년(인조 7) -1689년(숙종 15)

                                                                          자 久之 호 文谷 시호 文忠

 

會社亭前水 회사정전수 회사정 앞쪽으로 물 흘러가며

潺湲送客 잔원송객잔잔하게 길손을 보내는구나.

水㳅猶惜別 수류유석별 물 흐르니 오히려 이별 아쉽고

人去况爲인거황위 사람 가나 하물며 정도 가리오.

<1989년 5월 7일 11시 문곡 김 선생 영암적거 유적비제막식 책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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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시는 <문곡집>에는 실려 있지 않다. 1989 년 영암적거 유적비 제막식을 위한 책자에 실린 시이다. 이 책자를 보내주신 영암 구림에 사시는 崔準基 어르신네의 말씀으로는 지금은 작고하셨지만 安用堂에 사시던 春江 崔一錫 어르신께서 조상 대대로 보관하였던 문곡 조상님의 시로 그 당시 구림을 떠나시며 구림 제 군자에게 보낸 이별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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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님의 시심을 그려보면서 필자가 다음처럼 표현해 보았다.

나주를 거쳐 영암에 머무시는 동안은 정신적인 불안정에 휩쌓였으나 깊은 정 따스한 마음으로 맞이 해준 구림 마을의 향촌 처사님들과 시문도 통하고, 학문의 진경도 통하는 생활 속에서 자연 마음의 안정을 찾으셨다고 한다. 구림을 떠나실 때 온갖 후의를 베풀어 준 구림 마을의 정을 영원히 가슴 속에 담아 두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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會社亭 앞 흘러가던 조용한 물소리

이별 길 가슴 젖어 鳩林 숲엔 눈물인가

물 따라 떠나가는 몸 세월가도 정 솟으리.

아마 이런 정을 가슴에 담고 구림마을을 떠나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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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 속의 용어 이해>--------------------------

구림(鳩林): 문곡 조상님께서 3 년 간을 적거생활로 보내신 곳.

‘비둘기 숲’이라는 의미를 지녔다 한다. 나주를 거쳐 영암읍으로 와서 월출산을 왼쪽에 두고 국도 819호선을 따라 남서쪽에 위치한 마을이다. 삼한시대부터 마을이 형성되어 2 천 여 년의 역사를 지녔으며 영산강 내해(榮山江內海)의 뱃길이 열려 중국·일본 교류의 중심지이기도 했던 마을로 도선 국사의 신비한 탄생 설화가 있고, 왕인 박사의 유적지가 있으며, 고려 태사(太師) 최지몽(崔知夢)이 탄생한 마을, 대동계 집회장소 이었던 會社亭, 많은 도자기를 만들던 구림도기가마터 터, 마을의 신앙처인 도갑사(道岬寺)가 있는 마을 등으로 알려진 영암 마을의 대표적인 班村마을이기도 하다. 이 마을에는 善山 林氏 延州 玄氏, 咸陽朴氏, 昌寧曺氏 海州와 郎州 崔氏 문중들이 주거하고 있는 마을이다.

 

문곡 조상님은 이곳에서 적거하고 계신동안 마을의 향촌 인사들과의 교유, 월출산 등정, 도갑사 방문 등 많은 발걸음을 남기신 흔적들이 여러 가지 형태의 글에서 보여지고 있어 필자 조상님의 향훈이 묻어나고 있는 향토적 마을이다. 문곡의 여섯 아드님께서도 구림을 찾아간 흔적들이 곳곳의 시문에서 발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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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정(會社亭)

호남의 대표적인 웅장한 정자. 1646년 박성오, 조행립, 현건 등이 구림대동계의 집회장소로서 건립하였다. 6. 25때 화재로 전소되고 주춧돌만 남았던 것을 1985년 복원한 것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의 마루형 구조이다. 회사정 옆 우렁찬 소나무 숲에는 가로로 길게 누여진 < 文谷 先生 靈巖謫居 遺跡之碑>가 있다.< 사진 참조>

 

  회사정의 안내판

 구림에 사시는 崔準基 어르신의 모습. 이 분의 인연으로 문곡 조상님의 이별시를 얻게 되다.

 

  회사정의 정경-- 뒤쪽으로 문곡선생 영암적거 유적비의 뒷모습이 보인다. 울창한 솔숲이다.

 

 

※필자가 회사정을 들러 본 느낌이 다음 시에 잘 나타나 있어 여기에 실어본다.

< 登 會社亭 :회사정에 오르다.>

 

靈岩名勝有鳩林。 구림 마을 영암에서 뛰어난 경치구나.

會社亭高遠浦臨。 회사정 높게 솟아 포구 멀리 보이고

月岳長浮千疊翠。 월출산 겹겹으로 푸르게 솟았구나.

風松不盡四時陰。 솔바람 늘 불어와 계절마다 울창하고

村烟竹外分溪住。 대숲 밖 마을연기 냇가 두고 나눠 사네.

帆影林梢過檻深。 돛 그림자 숲지나니 난간은 더욱 깊어.

仁里曾聞風俗好。 마을 사람 어질고 풍속 좋다 들었는데

今來不見古人心。 지금 오니 안 보아도 옛사람 마음이네.

< 시제: 登會社亭。口占長律。示主人曹處士一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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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시는 문곡의 둘째 아드님이신 농암(農巖)김창협 (金昌協)<1651-1708>의 문인이기도 했던 이하곤(李夏坤)< 1677년-1724년>의 <登會社亭> 이라는 시 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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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처럼 풀이를 해주신 분이 있으시다.

會社亭前水 회사정(會社亭) 앞의 물은

潺湲送客行 객을 보내며 노래하네.

水流猶惜別 물이 흘러도 오히려 이별이 아쉬운데

人去況爲情 사람이 떠나니 하물며 마음이 어떠할꼬

<고전번역원 노 성두 선생님의 번역>

 

 

잔원(潺湲):조용하고 잔잔함

봉별(奉別):웃사람과 이별(離別)함. 송별. 전별과 의미가 통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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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이해>-------------------------------------

숙종이 즉위한 1675 년< 을묘 년> 그 당시 집권파인 남인의 미움을 받아 47세의 나이로 전라남도 영암< 郎州 > 땅으로 유배를 가셨고, 처음에는 영암읍 어느 군리 (郡吏)의 집에 머무시다가 두 달 후 어느 분의 도움으로 군서면 구림 鳩林으로 적거지를 옮겨 만 3 년 동안을 구림 사람이 되어 생활하셨다. 1678년< 무오 년 숙종 4 년> 9 월 구림을 떠나 다시 유배지를 철원으로 옮기셨다. 구림에 계실 때에 그 당시 鄕村 士族들과 깊은 교유를 하시면서 보내셨다.

 

구림과의 깊은 인연을 잊을 수 없어 구림 마을의 대동계 및 여섯 가문의 후손들을 중심으로 1989 년< 기사년> 여름 회사정 (會社亭)이 있는 소나무 숲에

문곡 선생 영암 적거 유적 지비 (文谷 先生 靈巖 謫居 遺蹟之碑)를 세웠다.

이 시는 구림에 적거하시다가 구림을 떠나며 구림의 여러 향촌 인사들께 주신 시 라고 한다. 春江 崔一錫 이라는 분이 집안에 대대로 보관하였던 시를 문곡 적거비 제막식에 내놓은 시라고 한다. 문곡집에는 실리지 않은 또 하나의 이별시로

매우 소중하게 생각되고 있다.

세월이 흘러가도 구림과 함께 하셨던 그 깊은 정을 잊지 않을 것이라는 정서를 담아 그 당시 구림의 여러 군자들에게 보낸 시이다.

물의 흐름처럼 3 년 간 깊은 정을 붇어 두었던 구림을 떠나시는 이별의 정경이다. 물도 흐르고 세월도 따라 가고 사람도 물결 따라 구림을 떠나신다.

 

< 1 행과 2 행>---- 구림인과 송별 할 때의 회고적 정서----- 그리움.

 

회사정은 1646 년 구림대동계의 집회장소로 창건된 정자이라고 한다. 그 당시에는 정자 앞으로 시냇물이 흐르고 정자는 높게 세워져 있었다고 한다.

아마 선조님께서도 이 정자에 오르셨으리라. 그 당시의 향촌 사림들과의 교유 하셨던 추억의 장소였으리라.

1 행은 정자 앞으로 흘러가던 물의 모습을 그렸고,

2 행에서의 송객은 구림에 적거하시다가 떠나시는 문곡을 가리키고 있다.

잔원(潺湲)은 조용하고 잔잔하게 흐르는 물소리의 표현이다. 사람의 떠나감을 물의 흐름에 빗대었다. 잔잔하게 흘러가는 물의 모습엔 서로의 이별이 속으로 흐느끼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서로의 이별은 조용함 속에서 오고간 깊은 안타까움이었으리라. 적거하시는 부자유스러운 몸, 그리고 좌의정까지 하셨다는 구속적인 신분, 3 년 간을 머물고 계실 때에 당신에게 베풀어 주셨던 그 당시 구림마을 사람들의 온화한 인간적인 정서에 고마움을 가슴 곁에 묻으셨으리라.

樂土 라고 표현하셨던 영암 땅의 구림 마을 늘 그리움을 묻어 두신 곳이었으리라.

 

< 3 행과 4 행>----- 구림과 맺은 깊은 정------- 영원함

 

물 따라 흘러간다. 흘러간 물은 영원하지 않다. 그러나 구림 땅에 묻어두고 가신 문곡 선생님의 발자취, 많은 시문들을 두고 가시는 이별은 슬픔이요, 가슴 아픔이다. 삼 년 간 적거 하던 구림 땅에서 구림 사람들과 이별은 惜別이라고 하였다. 보내는 이도 떠나가는 이도 모두 다 흐르던 물의 흐름은 슬픔의 눈물이었으리라. 월출산의 등정, 도갑사의 그리움. 죽림정, 안용당, 이 모두가 구림 사람들과 교유하면서 인연이 된 추억의 땅이다. 유배지에서 생활하시던 아픔의 땅이 아니라

순수한 인간의 정이 오고간 낙토이었으리라. 善山 林氏, 延州 玄氏, 咸陽 朴氏 昌寧 曺氏 海州 崔氏 郎州 崔氏, 그리고 나주에서 정을 나눈 羅州 羅氏 가문들과의

 

짧은 3 년 간 의 인연이었지만 오고 간 깊은 정은 산처럼 묵직하셨고 바다처럼 심오하셨고, 꽃처럼 아름다움이셨으리라. 그런 정들을 유배지 영암에 나주에 그리고 구림리 땅에 남기고 가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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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谷 12 세손 의 한사람으로------------------------------

현재로는 필자의 조상님 되시는 문곡 시문을 연구한 글은 다음과 같은 학술논문뿐이다.

1. 박명희 님의< 문곡 김수항의 영암 유배중 시문학>

2. 박명희 님의 <문곡 김수항 시문에 투영된 월출산의 이미지>

3. 안말숙 님의 <김수항의 기행시 고찰>. <김수항의 화도시 고찰>.

< 김수항의 시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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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후손의 한 사람으로 내 조상 님을 연구해 주신 그 분들께 메일을 올려 감사를 드렸을 뿐이다.

 

시문집을 보다가 1989 년에 건립한 <文谷 先生 靈巖謫居 遺蹟之碑> 가 있다고 하는 사실을 접했으나 필자가 변변치 못해서인지 내 집안의 누구에게 물어 볼 사람도 없고, 종가 댁이 있기는 하나 그저 뿌리만 한 뿌리일 뿐 마음으로는 멀다. 깊은 안타까움, 깊은 고뇌만을 가져다가 주었다. 인터넷 어디를 뒤져 보아도 전혀 검색이 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4 월 10 일 시제 때문에 영암에 내려간다는 하나뿐인 동서 소식을 듣고는 아무런 사전 지식도 없이 따라 나선 것이다. 4 월 12 일 동서의 애씀으로 유적비를 찾았고, 너무도 감루스러움을 느꼈다. 동서의 말이 구림에 가서 12 자의 한자를 아는 분만 찾아보자고 농담을 하였다. <12 자로 쓰인 한자 비문>. 정말로 어디에 보물처럼 꼭꼭 숨어 있다는 말인가.

영암을 거치고 왼쪽에 월출산을 바라보면서 무조건 구림으로 향한 것이다. 군서에서 구림으로 가는 길은 마침 벚꽃 축제 행렬로 인산인해를 이룬 길이었다. 오후 3 시가 넘은 시간에 동 구림리 사거리 길에서 잠시 차를 멈추고 동서는 동서대로 필자는 동서 매형님과 같이 한약방이나 부동산 중개업소를 찾아 유적비가 있는 위치를 알아보려고 하였다.

길 건너에 가 있던 동서가 소리를 치며 오라고 한 곳은 사거리에 있는 仁濟 藥房이었다. 동서가 단번에 단서를 그 곳에서 찾은 것이다. 참으로 묘한 인연이요, 만남이었다.

주인님 되시는 최 준기 < 崔準基 > 노인장께서 문곡 비를 건립할 때에 총무의 일을 맡아 보셨다고 하시면서 문곡의 후손이라 인사를 드리니 무척 반갑게 맞아 주셨다. 거의 팔순이 되어 가시는 듯한 어르신으로서 허리가 조금은 구부정해 보이셨다. 약방을 경영하시고 계신 분으로 관향은 通川 崔氏라고 하셨다. 1989 년 건립할 때의 이야기를 잠시 들었다. 필자와 동명이인인 김창현. 그리고 김응현 서예가가 되는 가문의 형님들이 이곳에 내려 왔다고 하셨다. 약방 벽에는 두 서예가의 글씨들이 걸려 있었다. 최 씨 어른의 말씀을 듣고 다시 차를 타고 드디어 會社亭 소나무 울창한 숲에 가로로 길게 서 있는< 文谷 先生 靈巖謫居 遺蹟之碑> 비석 앞에 식구들과 함께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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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자의 한자 비문, 비 이름도 비문 내용도 온통 한자들로만 쓰여 있었다. 인터넷에 나타나 있지 않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저 아는 이만이 볼 수 있는 비석이었다. 글자를 모르니 그냥 비석 곁을 많은 사람들이 스쳐갔을 것이다. 한글로도 비석 내용을 설명한 글이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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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정 조금 옆 솔나무 숲에 허전히 서 있는 비석이었다. 사전에 아무런 정보도 없이 찾아갔다면 그냥 구림리 길에서 헛된 방황을 하고 말았을 것이다. 300 년 전의 문곡 조상님의 숨결이 마음에 다가오는 듯도 하였다.

문곡 조상님을 대하는 듯한 느낌이 내 가슴에 꽉 차 왔다. 벅찬 감격이었다.

영암으로 내려갈 때의 작은 소망 하나를 얻은 것이다. 사진을 찍었다. 넘어가는 햇살이라 비석의 글씨를 촬영하는 데는 크게 애를 먹었다. 비석에 조각된 비문 속에는 송시열 선생의 찬양시도 곁들어 있었고, 善山 林氏, 延州 玄氏, 咸陽 朴氏

昌寧 曺氏 海州 崔氏, 郎州 崔氏 그리고 약방에서 뵈었던 최 준기 아르신의 존함도 새겨져 있었다. 서울에 올라와서 최 선생님께 인사를 드리기로 하고 동구림리를 떠난 것이다. 필자 조상님의 흔적이 서려 있는 소중한 보물 하나를 얻어 가지고 오느라고 구림에 있는 필자의 조상님 문곡의 발자취는 전혀 못 보았다. 다시 시간을 내어 영암 구림리로 내려가 녹암서원, 죽림정, 안용당, 월출산, 도갑사 등의 유적지를 찾아보리라고 마음을 먹고 왔다.

서울에 올라와 崔準基 선생님께 감사 인사를 드렸고, 건립할 당시의 책자라도 보내주시면 고맙겠다는 말씀을 드렸더니 4 월 15 일 정성을 담아 자료를 보내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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公自少終日危坐。未嘗箕踞。肩背竦直。不少跛倚。以爲外面有些罅隙。則心志從而走失

<공은 어려서부터 온종일 걸터앉지 않고 꿇어앉았으며 어깨와 등이 똑바르고 조금도 몸을 기대거나 기울이지 않으면서 ‘외면에 조금이라도 틈이 있으면, 심지(心志)를 잃게 된다.’>

 

위와 같이 굳은 심지를 지니셨던 내 뿌리의 조상님, 여섯 아드님 모두를 지극히 효성스럽고 훌륭한 문예가로 키워 오신 당신이시기에 늘 경앙스러운 마음 일 뿐

그 많은 시문들이 그냥 잠자고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아플 뿐이다.

일흔 살 넘어 조상님들의 시문 향기를 맡아 가고 있지만 부족한 지식이라 그저 통탄스럽기만 하다.

그 많은 문곡의 후손들은 지금 무엇을 하며 진정한 조상의 뿌리를 생각하고 있는지. 왜 문필이 그리도록 빛난 가문이었는지 생각이나 하고 있을까.

가슴 답답하다. 말로만 문곡의 후손을 내세우는가. 조상 산소에 찾아가는 일만이

뿌리를 찾아가는 일인가. 늙었지만, 그리고 혼자서라 외롭지만 숨을 쉬는 날까지 독서의 종자를 멈추게 하지 말라 하시던 문곡 조상님의 말씀을 다시 한 번 가슴에 담아본다.

 

 

  덕소 돌누께 마을 뒷산 문곡 산소를 참배하여 시를 읽어 드리고 왔다.

  전철역 양정역으로 나오는 중에 바라 본 배꽃의 모습---- 문곡 조상님이 그립다. 정성을 다 해 주시는 영암 구림리 마을 어른들의 고마운 정성을 가슴에 담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