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광장/스크랩모음

미호 선생 김공지 묘지(墓誌)

백촌거사 2012. 9. 10. 17:18

胎誌墓誌

 

이주희(李周熙)

 

 

 

<차례>

 

1. 서론

 

2. 胎誌

 

1) 태지란 무엇인가?

 

2) 中宗 王子 和穗 胎誌

 

(1) 원문

 

(2) 내용

 

(3) 중종 왕자 화수에 대하여

 

(4) 특징

 

3. 墓誌

 

1) 묘지란 무엇인가?

 

2) 白磁靑華 金元行 墓誌

 

(1) 원문

 

(2) 내용

 

(3) 김원행의 가계도

 

(4) 특징

 

4. 결론

 

<참고 자료>

 

 

 

 

1. 서론

 

모든 사람의 일생은 生老病死를 거치게 된다. 이것은 개인이나 가족에게는 무척 중요한 일이며, 특히 새 생명의 탄생이나 죽음은 공동체 내에서도 크나큰 사건이다. 그래서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기 위해 통과의례적인 의식을 치르며 구성원간의 유대도 강화하고 고유한 풍속도 만들어 나간다.

 

우리는 이것을 통하여 과거 조상들의 사상이나 생활상을 알 수 있다. 탄생을 상징하는 <중종 왕자 화수 태지>와 죽음을 상징하는 <백자청화 김원행 묘지>를 중심으로 당시 사람들이 생명이나 죽음에 관하여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 알아보려 한다.

 

2. 胎誌

 

1) 태지란 무엇인가?

 

태반은 태아를 보호하고 태아에 영양을 공급하던 신체 조직의 일부이다. 우리 조상들은 이 태반을 소중히 여겨 吉日을 택하여 정결한 곳에 묻거나, 물에 띄우거나, 불에 태웠다.

 

이런 태의 처리법은 우리 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특유한 풍습이며, 특히 왕실에서는 태를 2중의 胎壺에 담아 浮屠와 같은 구조를 갖춘 석실에 매장했다. 이 석실을 胎室 또는 安胎所라고 한다. 태실 안에는 태호와 함께 주인공의 이름과 四柱(生年) 및 태실을 만든 연시를 적은 標識을 넣는데 이를 태지라 한다.

 

태지는 烏石 또는 대리석 등 석제일 경우는 네모꼴로, 靑華白磁銅華白磁일 경우는 접시형으로 만들었다.

 

2)중종 왕자 화수 태지

 

(1) 원문

 

<中宗王子和穗1)胎誌> 조선 1519石製

皇明正德八年六

月初九日午時生

王子和壽阿只氏胎

正德十四年二月

初七日巳時藏2)

 

(2) 내용

 

<중종 왕자 화수 태지> 조선 1519년 석제

명 황제 정덕 86

9일 오시 생

왕자 화수 아기씨의 태

정덕 142

7일 사시에 묻음.

 

(3) 중종 왕자 화수에 대하여

 

화수는 조선 11대 왕인 중종의 3남인 錦原君 李岭兒名이고 仰止이며, 南陽君 洪景舟의 딸인 熙嬪 洪氏의 소생이다. 중종 8(1513, 癸酉) 69일에 태어나 8세인 중종 15(1520, 庚辰) 1227일에 금원군에 봉해졌다. 부인은 忠勳府 都事 鄭承休의 딸인 波澄郡夫人 海州 鄭氏이다. 슬하에 1녀를 두었는데, 李堅福(1537?)宜寧人 南琯에게 출가하였다. 50세인 명종 17(1562, 壬戌) 47일에 하여 楊州 佛光里 鶯山에 묘를 쓰고 楊州 佛光山麓 子坐午向之原이라는 묘갈명을 남겼다. 시호는 孝文이다.3)

 

(4) 특징

 

조선 1519년에 만들어진 <중종 왕자 화수 태지>는 사각형의 石材5, 35자가 음각되어 있다.

 

이 태지로 알 수 있는 것은 첫째, 당시 사람들의 모화사상이다. “중종 8이나 癸酉年이라고 적으면 될 것을 명황 정덕 8이라고 쓰고, “중종 14이나 己卯年이라고 표시하면 될 것을 정덕 14이라고 기록한 것은 중국에 대한 사대사상을 나타낸 것이다.

 

둘째,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을 읽을 수 있다. 태를 묻을 때, 아이를 낳은 날이 아닌 따로 길일을 택한 것은 자식의 앞날에 대한 富貴多男長壽 祝願의 의미가 담겼을 것이다. 태를 태호에 넣고 이것을 다시 태실에 넣어 名山에 매장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셋째, 인간 생명에 대하여 존엄성을 가지고 있었다. “身體髮膚受之父母, 不敢毁傷孝之始也이니라라고 孝經에서 孔子가 제자인 曾子에게 한 말과 같이 태아를 보호하던 태반마저도 신체조직의 일부로 간주하여 소중히 여겨 정갈한 곳에 묻거나 물에 띄우거나 불에 태웠다는 것은 인간의 생명을 존중하는 태도와 함께 조상들의 효에 대한 의식을 말해 준다.

 

3. 墓誌

 

1) 묘지란 무엇인가?

 

묘지란 죽은 사람의 성명官位행적자손의 이름生死葬의 연월일묘지의 주소 방향 그리고 칭송하는 시문인 을 새겨서 관과 함께 파묻는 돌이나 陶板 또는 거기에 새긴 글을 말한다. 壙誌 또는 宅兆라고도 한다. 관이나 유골함 또는 묘벽에 직접 새기거나 墨書로 적는 경우와 벼루에 글씨를 새겨 묻는 경우도 있다.

 

지하에 묻었다는 점에서 지상에 세운 墓碑墓碣과 구별된다. 비바람이나 인위적인 무덤의 훼손 또는 변형 그리고 檢墳 때에 누구의 묘인지 증거 삼기 위하여 고안된 것이다.

 

우리 나라 묘지 중 초기의 것은 황해도 안악의 고구려 고분벽화에 묵서로 남긴 冬壽의 묘지(357)와 백제 무령왕(재위 501523)의 묘지가 있다.

 

묘지가 일반화된 것은 고려와 조선시대에 들어서인데, 고려시대의 묘지는 잘 물갈음[水磨]4)烏石이나 粘板岩製의 판석에 음각한 것이 대부분이다. 조선시대 전기에는 청화진사철화백자로 된 묘지가 등장하고, 후기에는 도자기로 된 板形의 묘지가 주류를 이룬다.

2) 백자청화 김원행 묘지

 

(1) 원문

 

<白磁靑華 金元行 墓誌> 조선 1773

渼湖先生 金公之墓

有明朝鮮成均館祭酒渼湖先生金公之墓

渼湖先生金公諱元行字伯春安東人左議政

文正公諱尙憲五世孫也曾祖諱壽恒領議政

文忠公生諱昌集領議政忠獻公諱昌協判書

文簡5)公忠獻公生諱濟謙參議配宋氏都事諱

炳遠女是爲公所生父母而出后于文簡公子

學生諱崇謙其配朴氏判書諱權女也 肅宗

壬午一二月二十九日生中己亥進士庚申除

內侍敎官歷翊衛司衛率翊贊宗簿寺主簿司

憲府持平掌令執義選 書筵官講書院左勸

讀侍講院進善掌樂院正陞通政工曹參議成

均館祭酒 世孫贊善皆不就壬辰七月七日

終九月葬于楊州陶山艮坐原配淑夫人洪氏

贈參判諱龜祚女參判南溪君諱 孫壬午九

月十五日生丙申歸于公丁亥正月一九日終

始葬楊州石室至是遷以同壙焉子履安縣監

履直女適承旨徐逈6)修主簿洪樂舜履直繼子

麟淳徐之子有秉有守女洪大榮妻餘幼

崇禎三周癸巳八月 日 燔埋7)

 

(2) 내용

 

<백자청화 김원행 묘지> 조선 1773

미호 선생 김공의 묘

명 나라 당시 조선 성균관 좨주 미호 선생 김 공의 묘

미호 선생 김 공의 이름은 원행이고 자는 백춘이며 안동사람이다. 좌의정을 지낸 문정공 상헌의 5세손이다.

영의정을 지낸 증조부 문충공 수항은 영의정을 지낸 충헌공 창집과 판서를 지낸 문간공 창협을 낳았다.

충헌공은 참의를 지낸 제겸을 낳았고 제겸의 배필은 도사를 지낸 송병원의 딸이다. 제겸과 송 씨가 원행의 생부모이다.

문간공은 학생(생전에 벼슬을 하지 못하고 죽은 사람) 숭겸을 낳았고 숭겸의 배필은 판서를 지낸 박권의 딸이다. 원행은 숭겸과 박 씨의 양자로 가서 후사를 이었다.

숙종 임오년(1702) 1229일 태어나 숙종 기해년(1719)에 진사가 되었고 영조 경신년(1740)에 내시교관에 제수되었다. 익위사의 위수, 익찬에 임명되었다. 종부시의 주부, 사헌부의 지평과 장령과 집의에 뽑혔다. 서연관과 세손 강서원의 좌권독, 시강원의 진선, 장악원의 정(우두머리)으로 승진했다. 통정, 공조 참의, 성균관 좨주, 세손의 찬선에는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영조 임진년(1772) 77일에 죽어 9월에 양주 도산의 간방을 등진 艮坐坤向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원행의 배필인 숙부인 홍 씨는 참판을 추증받은 홍귀조의 딸이며, 홍귀조는 참판을 지낸 남계군 홍숙의 손자다. 숙종 임오년(1702) 915일에 태어나 숙종 병신년(1716)에 원형에게 시집왔다. 영조 정해년(1767) 정월 19일에 죽었다. 처음에는 양주 석실에 장사지냈고 원형이 죽어 같은 무덤으로 옮겼다.

아들은 현감을 지낸 이안과 이직이 있으며, 딸들은 승지를 지낸 서형수와 주부를 지낸 홍낙순에게 각각 시집을 갔다. 이직에게는 계자 인순이 있다. 서형수의 아들은 유병과 유수가 있고 딸은 홍대영의 처이다. 그리고 나머지는 아직 어리다.

명 숭정 3주갑 계사(1773) 8월 일에 묘지를 구워 묻었음.

 

(3) 김원행의 가계도

 

김상헌 (좌의정, 문정공)

 

 

김광찬(金光燦)

 

 

김수항 (영의정, 문충공)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 ↓

 

김창집 (영의정, 충헌공) 김창협 (판서, 문간공)

 

↓ ↓

 

김제겸 (참의, 충민공)-김원행의 생부 김숭겸 (학생,관복암)-김원행의 양부

 

송씨 (도사 송병원의 딸) 박씨 (판서 박권의 딸)

 

 

김원행 (문경공, 17021772)

 

숙부인 홍씨 (17021767,

 

참판 홍귀조의 딸,

 

참판 남계군 홍숙의 증손녀)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 ↓ ↓ ↓

 

김이안 (현감, 문헌공) 김이직 女 女

 

서형수(승지) 홍낙순(주부)

 

김인순(金麟淳, 부사) 繼子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 ↓ ↓ ↓

 

서유병 서유수 女 餘幼

 

홍대영 (어린 딸 여럿)

 

(4) 특징

 

조선 1773년에 만들어진 김원행 묘지는 세 개의 직사각형의 백자에 청화로 썼다.

 

고려시대 한림학사 崔婁伯이 처 廉瓊愛가 죽은 후 쓴 廉瓊愛墓誌에는 아내를 잃은 애달픈 마음과 생시의 애틋하고 도타웠던 부부의 정이 듬뿍 나타나 있다. 또 다산 정약용이 막내아들 農牂의 죽음에 부친 農兒壙誌에도 자식을 앞세운 아버지의 애통한 심정이 절절히 드러나 있다. 그런데 김원행 묘지에는 감정의 표현은 전혀 없고, 조상들과 본인 및 후손들의 官位 중심으로 서술되어 있다.

 

이 묘지로 알 수 있는 것은 첫째, 병자호란 때 청에 대한 척화를 주장하여 3년간 선양[瀋陽]에 잡혀가 갇혔던 김상헌의 후손이므로 청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 1773년은 중국에서는 명이 아닌 청에 해당되는 시기이므로 묘지 첫 부분에 有明이라는 말은 有淸으로 써야 한다. 그리고 묘지 끝 부분에 표시된 崇禎이란 연호는 명 나라 마지막 임금인 毅宗 莊烈帝의 연호(16281644)로 조선 후기에 청 나라 연호를 쓰기를 꺼려 崇禎 紀元後 周甲 무슨 해와 같이 썼던 것이다.

 

둘째, 이 묘지에는 모화사상이 나타나 있다. 첫 부분의 유명이라는 말과 끝 부분에 숭정이라는 명의 연호를 쓴 것은 비록 청의 정통성은 부정했지만 중국을 큰 나라로 섬긴 것이다.

 

셋째, 5대조인 김상헌부터 원행의 아들과 사위 그리고 사돈의 품계를 적고, 김원행의 아내 홍 씨의 숙부인이라는 封爵까지 적은 것으로 보아 벼슬을 중요시하는 철저한 관료주의 사상을 읽을 수 있다.

 

넷째, 부계 중심의 가부장적인 사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남자들은 이름과 시호까지 기록한 반면, 딸들의 경우 이름 없이 로만 표시하여 누구에게 시집갔다라고만 하고 그나마 결혼 안한 딸들은 몇 명이라고 밝히지도 않은 채 餘幼라는 말만 덧붙였을 뿐이다. 그리고 아내들도 어머니의 이름 없이 아버지의 이름만 들어 누구의 딸이라고 적은 것은 남자 중심의 남존여비의 사회였음을 말해 준다.

 

다섯째, 조상들의 죽음에 대한 경외심을 엿볼 수 있다. 崇儒의 시대인 만큼 죽음을 모든 것의 끝으로 보지 않고, 윤회나 재생 또는 부활이 아닌 삶의 연장 내지는 새로운 시작으로 여겼다. 시신의 머리는 北邙山을 뜻하는 북쪽이나 해가 뜨는 방향인 동쪽으로 두었다. 동쪽은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 묘지에 艮坐原이라는 말은 팔방의 하나인 북동을 중심으로 45도 범위 이내의 방위인 艮方을 등지고 반대 방위인 坤向 즉 남서를 향한 언덕이라는 뜻으로 머리를 북동으로 하고 다리는 남서로 한 것이다. 이것은 요즈음도 祭床을 놓을 때 북쪽을 등지고 남쪽을 보는 위치에 두고 陳設시 생선의 머리는 동쪽을 향하게 하는 것과 통하는 얘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묘곽의 방향은 계절에 따라 조금씩 바뀐다. 이십사 방위로 간방은 丑方寅方의 사이인 북동을 중심으로 한 15도 범위 이내의 방위이며 곤방은 未方申方 사이의 방위이다. 十二支를 기준으로 한 곤방은 이십사 절기로 立秋에 해당하며, []로는 67사이이다. 이것은 원행이 죽은 계절과 같다.

 

원행이 임진(1772) 77일에 죽어 9월에 장사지내고 이듬해인 계사(1773) 8월에 묘지를 묻은 것은 길일을 택한 것이다.

 

묘의 위치도 풍수설에 근거한 명당을 잡았고 묘곽의 방위도 여러 가지를 고려하였고 장사지낼 때 길일을 택한 것 등은 선조들의 죽음관을 나타낸 것이다. “잘 되면 제 덕, 못 되면 조상 탓인 요즘 사람들과 달리 조상의 음덕으로 생각한 그들의 조상숭배사상과 생명존중사상을 엿볼 수 있다.

 

4. 결론

 

삶의 시작인 탄생을 상징하는 태지에는 부모의 자식 사랑하는 마음이 들어 있다. 자식의 앞날에 대한 건강 장수 평안 안녕 부귀 다남 등을 바라는 부모의 축원이 담겨 있다. 그리고 부모의 편의와 이기적인 생각으로 인한 낙태를 서슴없이 행하며, 보험금을 타내려 자식의 손마저 절단하는 요즈음과 달리 태반까지도 신체의 일부로 여겨 소중히 다루었다는 점에서 생명중시사상과 부모에 대한 효심을 읽을 수 있다.

 

죽음을 기억하라는 라틴어 경구인 “Memento Mori?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중세 유럽에서 뱀을 장식한 두개골을 이르기도 하는데, 이때에는 인생의 무상함을 나타낸다고 한다. 영화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에서는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기억할까?”라는 뜻으로 쓰였다고 한다. 죽음 앞에서 사람들이 나를 기억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은 영원히 살고 싶은 永生에 대한 염원이다. 묘지에서도 죽음이 끝이 아닌 삶의 연장이거나 새로운 시작으로 보는 당시 사람들의 죽음관을 볼 수 있다. , 영생에 대한 바람의 표현이다. 그리고 사후 묘지에 행적이 적힐 일을 대비하여 항상 죽음을 기억하고 언행을 신중히 할 수 있는 계기도 될 것이다. 위의 묘지에서는 돌아가신 부모도 극진히 모시는 자식들의 를 알 수 있고 남존여비사상과 함께, 가문과 입신양명을 중시하는 관료주의사상도 엿볼 수 있다. 죽음에 대한 경외심도 나타나 있으며 태지와 마찬가지로 생명중시사상과 중국에 대한 모화사상도 드러나 있다. 그리고 병자호란 때 청에 대한 척화를 주장하다 선양(瀋陽)에 끌려가 3년간 고생한 김상헌의 후손이므로 청의 정통성을 부인하여 有明이라는 말과 崇禎이라는 명의 연호를 썼다.

 

<>

 

1) 국립중앙박물관 역사자료실의 전시대의 표찰에는 和穗로 태지의 원문에는 和壽로 되어 있어 확인 후 정정이 필요함.

2) 국립중앙박물관 역사자료실 소재

3) 지두환, 조선의 왕실 11-3 중종 후궁, 중종대왕과 친인척, 역사문화, 2001, p208216 참조.

4) 국립중앙박물관 역사자료실의 안내문에는 물갈이로 표시되어 있다. 정정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5) 국립중앙박물관 역사자료실의 전시물에는 아래 으로 쓰였으나, 두 글자가 同字로 취급되므로 으로 표기하였음. 다음에 같은 글자가 나오는 경우도 같음.

6) 상동에는 책받침 부에, 멀경 몸 안에, 작은 입 구()’로 되어 있으나 이 속자이므로 으로 표기함

7) 국립중앙박물관 역사자료실 소재

 

<참고 자료>

 

1. 국립중앙박물관 역사자료실 안내문

2. 박시인, 알타이 신화, 청노루, 1994.

3. 뿌리찾기 운동본부 한국 성씨 족보대전 편찬위원회, 자랑스런 나의 족보, 4) 김씨 35) 서씨 48) 홍씨, 민예사, 1997.

4. 이희승, 국어대사전, 민중서림, 1996.

5. 지두환, 조선의 왕실 11-3 중종 후궁, 중종대왕과 친인척,

역사문화, 2001.

 

원문 http://blog.naver.com/poesytr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