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광장/고전의 향기

우국(憂國)의 마음을 불살랐던 한 선비 취운김공전(醉雲金公傳)」김병기(金炳夔)

백촌거사 2015. 8. 27. 11:25

- 이백예순일곱 번째 이야기
2015년 8월 27일 (목)
우국(憂國)의 마음을 불살랐던 한 선비
말로만 국사(國事)를 염려해서야 살아서 무엇하겠는가

言念國事 生果何爲
언념국사 생과하위

- 송병화(宋炳華, 1852~1916)
 『난곡집(蘭谷集)』 별집 권6
 「취운김공전(醉雲金公傳)」

 

  
  구한말 외세의 침략이 가속화되어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곳곳에서 국난 극복을 위한 저항 운동들이 일어났습니다. 특히 유생 계층들은 위정척사(衛正斥邪)를 기치로 내세우며 의병항쟁운동의 중심으로 활약했습니다. 또 국운이 기울어 가는 현실에 개탄하다가 비분강개한 나머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우국지사(憂國之士)들의 숙연한 의거도 이어졌습니다. 한편 호서(湖西)의 이름난 선비였던 송병화(宋炳華) 선생은 당시 적극적인 항쟁운동에 나서지는 못했지만 대신 그의 문집인 『난곡집』에 한 우국지사의 행적을 전(傳)으로 수록하여 후대에 남겼으니, 바로 「취운 김병기(金炳夔) 전[醉雲金公傳]」입니다.

  김병기 선생은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끝까지 주전론(主戰論)을 주장하다가 청(淸)나라로 압송되어 고초를 겪었던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의 후손으로, 명문 안동 김씨(安東金氏) 가문이었습니다. 선생은 34살 때 과거에 급제하여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우세마(右洗馬) 등을 지내다가 이후 지방관으로 발령받아 장련 군수(長連郡守), 용궁 현령(龍宮縣令)을 역임했죠. 하지만 구한말의 어지러운 현실은 그를 가만두지 않았습니다. 위정척사를 내세우던 강직한 선비였던 선생은 조정에서 지방 수령들에게까지 강제로 단발령(斷髮令)을 시행하자 이에 반발하여 1907년(고종 44) 벼슬을 내버리고 은거했습니다. 늘 국사를 염려하며 번민하던 선생은 때로는 손으로 땅을 내리치거나 하늘을 향해 “이래 살아선 무엇하랴!”라고 탄식하며 가슴에 맺힌 울분을 표출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벼슬도 내던진 쉰 살 넘은 가난한 시골 선비가 이런 암울한 현실에서 무언가 적극적으로 항거할 수 있는 수단은 별로 없었습니다.

  하루는 선생이 벗인 송병화 선생의 집을 찾았다가 우연히 벽에 걸린 자경문(自警文) 한 구를 보았습니다. “사람이 사람답지 못하다면 살아서 무엇하리오![人而不人 生何爲哉]”, 이 여덟 글자는 고뇌하던 한 우국지사의 심장을 마구 후벼 팠고, 선생은 끝내 오열하며 “말로만 국사(國事)를 염려해서야 살아서 무엇하겠는가!”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얼마 후 고을 수령이 그의 곤궁한 처지를 염려하여 다시 벼슬길에 나갈 것을 권했지만 듣지 않자, “공은 민충정공(閔忠正公, 을사조약 체결 후 자결한 민영환(閔泳煥))의 뒤를 밟고자 하시오?”라며 개탄했습니다. 당시 그 수령의 눈에 비친 선생의 모습에는 이미 죽음도 각오한 의연함이 가득했나 봅니다.

  이후 선생은 끼니도 거르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채 번민 속에 며칠을 보내다가 어느 날 홀로 인근의 봉황산(鳳凰山)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그리고는 인적도 드문 깊은 산 속에서 선생은 담뱃불을 피워 옷에 불을 붙였습니다. 이렇게 선생은 우국의 울분을 활활 불태우며 홀연히 분사(焚死)했습니다. 때는 국권을 빼앗기기 2년 전인 1908년(고종 45) 봄으로, 당시 선생의 나이는 54세였습니다. 그 옛날 중국 남송(南宋)의 윤곡(尹穀)은 몽골군의 침입에 성이 함락되자 분신 자결했고, 선생의 선대(先代)인 청음 김상헌의 형이기도 한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은 병자호란 때 청나라의 침입으로 강화도가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스스로 화약고에 담뱃불을 붙여 폭사(爆死)했습니다. 나라의 위태로움을 눈앞에 두고 끝내 자기 자신을 불사르고 말았던 지사(志士)들의 뒤를 김병기 선생 역시 그대로 따른 것입니다.

  광복 70주년을 맞이하여 그 옛날 국난을 당했을 때 목숨도 아낌없이 내버렸던 우국지사들의 충정과 울분을 되새겨 봅니다. 비록 그들의 한 목숨은 그 자리에서 끊어졌지만, 그 정신만은 의연히 살아남아 훗날 목숨 바쳐 독립운동에 나선 여러 의사(義士), 열사(烈士)에게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 민족은 광복을 맞이했고, 지금은 어느덧 70년이란 세월이 흘렀죠. 하지만 얼마전 위안부 문제 등 일제 시대의 역사적 만행을 끝끝내 사과하지 않는 일본 정부의 오만한 태도에 분개한 나머지 한 독립운동가의 후손이 일본 대사관 앞에서 분신 자살하였다는 안타까운 뉴스가 전해졌습니다. 얼마나 더 많은 지사의 몸을 태우고 또 태워야 우리에게 진정한 광복이 찾아오는 걸까요? 어딘가에는 여전히 총성 없는 싸움이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우리 후손들은 결코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글쓴이 : 허윤만(한국고전번역원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