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광장/고전의 향기

[한시감상 172] 작법으로 읽는 한시(5) - 불사(不似)

백촌거사 2017. 9. 14. 09:55

[한시감상 172] 작법으로 읽는 한시(5) - 불사(不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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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감상
2017년 9월 14일 (목)
백일흔두 번째 이야기
작법으로 읽는 한시(5)
불사(不似)

태평관에서 당신암의 시에 차운하다[次大平館用唐新庵韻]

 

서른 곳 객관을 거치는 동안
외람되이 함께 하며 시문을 주고받았네
저 옛날 여음 땅의 노인처럼
말 타고 새벽닭 울음 듣던 것에 비하랴

 

行行三十館 행행삼십관
壁輝東借西 벽휘동차서
不似汝陰老 불사여음로
騎馬聞朝鷄 기마문조계

- 정사룡(鄭士龍, 1491∼1570), 『호음잡고(湖陰雜稿)』 권6 「황화화고(皇華和稿)」

해설

   조선 중종 연간에 시로 명성이 자자하였던 저자가 1521년 종사관(從事官)으로 선발되어 명(明)나라 사신 당고(唐皐)를 접대하는 과정에서 지은 시이다.

 

   여음(汝陰)의 노인은 송(宋)나라 때의 저명한 문장가이자 대신이었던 구양수(歐陽脩)를 가리킨다. 은퇴한 뒤 자신이 한때 수령으로 있었던 영주(潁州)의 여음에 살았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다. 그가 정승으로 있을 때, 조정에서 벼슬을 내려도 응하지 않던 여음 땅의 처사(處士) 상질(常秩)에게 시를 주면서 벼슬살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신세를 자조한 적이 있다.

여음의 상처사여, 나 자신이 우습구려 / 笑殺汝陰常處士(소살여음상처사)
십 년째 말 타고 새벽닭 울음을 듣나니 / 十年騎馬聽朝鷄(십년기마청조계)

 

   시인은 평안도 의주에서 처음 사신을 맞이한 뒤로 긴 여정을 함께하면서 힘들었을 터인데도, 사신과 시를 주고받는 즐거움이 새벽 일찍부터 조정에 나가 일상적인 근무를 하는 것보다 훨씬 나았던 모양이다.

 

   ‘같지 않다’는 의미의 ‘불사(不似)’는 ‘A不似B’의 형태로 사용되는데, A와 B를 비교할 때 사용한다. 같은 의미의 ‘불여(不如)’, ‘불약(不若)’, ‘불비(不比)’, ‘승여(勝如)’ 등의 유사어로 대체해서 쓰기도 한다. 다만, 이 시어들은 용법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

 

   절구에서 이 기법을 사용하는 경우, 일반적으로 ‘A가 B보다 낫다’는 의미일 때는 제3구 첫머리에 ‘불사(不似)’, ‘승여(勝如)’를 쓰는 것이 정격(正格)이다. ‘A가 B보다 못하다’는 의미일 때는 제3구 첫머리에 ‘불여(不如)’, ‘불약(不若)’, ‘불비(不比)’를 쓰는 것이 정격이다. 후자의 경우, 조금 더 강한 어기를 표현하고자 할 때는 ‘하여(何如)’라는 말로 대체할 수 있다. ‘A何如B’라고 하여 ‘B에 비하면 어떤가? B가 낫다’라고 표현한다.

 

   이 규칙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불사(不似)’, ‘승여(勝如)’의 경우 시인에 따라서는 변격(變格)도 종종 사용한다.

물이 아무리 세차도 심경은 늘 고요하고 / 水流任急境常靜(수류임급경상정)
꽃이 자꾸만 진다 해도 마음은 절로 한가롭네 / 花落雖頻意自閑 (화락수빈의자한)
세상 사람들이 늙도록 아등바등하며 / 不似世人忙裏老(불사세인망리로)
평생 얼굴 펼 날 없는 것과는 다르다네 / 生來未始得開顏(생래미시득개안)

   ‘불사(不似)’를 ‘A가 B보다 낫다’는 의미로 사용한 예이다. 송나라 때의 철학자 소옹(邵雍)이 천진교(天津橋)를 지나다가 소회를 읊은 「천진감사음(天津感事吟)」이다. 나 자신의 가치 기준이 확실하면 주변 환경에 영향을 받지 않고 평온을 유지할 수 있다는 내용으로, 현대 중국에서도 자주 인용하는 시이다.

 

   ‘같지 않다’는 말이 반드시 어느 한쪽이 더 낫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아무런 고민 없이 ‘색다름’에 대해 ‘우열’의 잣대를 들이댄다. 현대인이 느끼는 고뇌의 상당 부분은 끊임없이 남과 비교하는 데에서 생기는 것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렇다고 사람마다 성현이 아닌 이상 현실에서 완전히 초탈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문득문득 ‘그래도 그보다는 낫다’고 위안해 볼 수만 있어도 행복한 삶이 아닐까.

권경열
글쓴이권경열(權敬烈)
한국고전번역원 성과평가실장

 

주요 역서
  • 『국역 국조상례보편』공역, 국립문화재연구소, 2008
  • 『국역 매천집 3』, 한국고전번역원, 2010
  • 『국역 가례향의』, 국립중앙도서관, 2011
  • 『임장세고』, 한국국학진흥원, 2013 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