始祖太師(시조 태사
墓壇記묘단기) ------
(農巖集卷之二十四記에서)
글쓴이:
김창협[金昌協]1651(효종 2)~1708(숙종 34).
호는 농암(農巖). 상헌(尙憲)의 증손자이며, 아버지 수항(壽恒)의 둘째.
시호는 문간공(文簡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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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始祖太師金公諱宣平。新羅末。爲古昌城主。麗太祖討甄萱。公與權幸,張吉。以郡歸附。太祖得之。遂有甁山之捷。由是義聲益振。卒以滅萱。本公等三人力也。
풀이
시조(始祖) 태사(太師) 김공(金公)의 휘(諱)는 선평(宣平)이시니, 신라 말기에 고창 성주(古昌城主)이셨다. 고려 태조가 견훤(甄萱)을 토벌할 적에 공께서는 권행(權幸)·장길(張吉)과 함께 군(郡)으로써 귀부(歸附)하여 태조가 이를 얻고 나서 드디어 병산(甁山) 싸움의 승리가 있게 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의병(義兵)의 성세(聲勢)가 한층 더 떨치게 되어 마침내 견훤을 물리치게 되었으니, 이는 본래 공을 비롯한 세 분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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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 노트
古昌: 지금의 안동을 가리키는 옛 이름.
甄萱 :( 867 ~ 936 ) 후백제의 초대 왕(재위 900~935). 궁예의 후고구려와 충돌하며 세력 확장에 힘썼으며 고려 왕건에게 투항했다. 왕건에게 신검 토벌을 요청, 후백제를 멸망시켰다
權幸: 안동 권 씨 시조인 태사로 후삼국 시기에 고려와 후백제가 싸운 고창 전투에서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승리함으로써 공신에 책봉되어 권 씨로 사성(賜姓)받았다
張吉: 안동 장씨 시조. 삼한 통합에 공을 세우고 삼한벽상삼중대광공신이 된 태사공(太師公) 장정필(張貞弼). 장정필의 처음 이름은 장길(張吉)로, 930년 고려 태조를 도와 김선평(金宣平)·권행(權幸) 등과 함께 견훤군을 격파함.
歸附 :귀속하여 붙좇음
甁山之捷 : 후삼국시대인 930년 1월에 고려군과 후백제군이 지금의 경북 안동(安東) 지방인 당시의 고창군 병산(甁山)에서 벌인 전투. 고창지첩(古昌之捷)’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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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策功。首以公爲大匡。權幸,張吉爲大相。俱賜號三韓壁上功臣。爵太師。陞古昌爲安東府。公旣卒。安東民。思其功德。立廟府司。與權張二太師並享。至今不絶。事具退溪李文純公所爲記中。
풀이
공(功)을 봉하는 데 있어 제일 으뜸으로 공을 대광(大匡)으로 삼았고, 권행과 장길을 대상(大相)으로 삼아 모두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이라는 작호(爵號)와 함께 태사(太師)라는 벼슬을 내렸고, 고창은 안동부(安東府)로 승격시켰으며, 공께서 돌아가신 후에는 안동 고을 백성들이 공의 공덕을 사모하여 안동부의 아문 안에 사당을 짓고 권 태사·장 태사와 함께 제향(祭享)을 받들어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 이런 사실들은 모두 퇴계(退溪) 이 문순공(李文純公:滉)이 쓴〈安東府삼공신묘증수기(三功臣墓增修記)〉에 갖추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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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 노트
大匡 :문관과 무관에게 수여된 관계 중 실질적으로 최고위에 해당하며, 정1품 상계(上階)를 대광(大匡), 정1품 하계(下階)를 정광(正匡)이라 하였다.태조가 고려를 세운 직후에 태봉(泰封)의 관계를 이어받아 919년(태조 2)부터 사용하기 시작하여 995년(성종 14)까지 쓰였고, ‘태광(太匡)’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大相 : 고구려의 관등으로 태봉·고려 초기에, 16등급 가운데 일곱째 품계. 뒤에 금자흥록대부로 고쳐 문관의 품계(品階)로만 사용하였다. 고려 초기에, 향직(鄕職) 9등급 가운데 넷째 등급
三韓壁上功臣: 정일품. 문관. 벽상공신이라는 호칭은 《고려사》 〈세가(世家)〉 태조 34 년에 처음 나타난다. 936년(태조 19)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뒤 940년 신흥사(新興寺)를 중수하고 이곳에 공신당(功臣堂)을 세우면서 공신당의 동서 벽에 삼한공신의 모습을 그려 넣었다. 벽에 그린 삼한공신이라 하여 이들을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으로 부르는데, 벽상공신은 바로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삼한은 고려를 가리킴.
府司: 호장(戶長)의 처소. 삼태사를 추모하여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냄. 삼공신의 위패를 모심.
退溪李文純公 :
퇴계(退溪)는 이황 (李滉 : 1501∼1570년)의 아호이고 文純公은 시호이다. 退溪先生文集에
안동부삼공신묘증수기(安東府三功臣墓增修記)라는 글이 실려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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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蓋當公之守古昌也。羅運旣訖。而逆萱戕虐君父。義在必報。顧公以孑然一孤城。當凶鋒之衝。不能自立而有爲。則決策附麗。共滅讎賊。以自伸其義。此殆與張司徒佐漢滅秦楚。以報韓仇者相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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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이
대개 공께서 고창을 지키고 계실 당시에는 신라의 국운이 기울었고 역신(逆臣) 견훤이 군부(君父)를 죽이기까지 하였으니, 의리상 반드시 보복을 했어야 했다. 그러나 공께서는 외로이 외로운 하나의 성을 돌보며 사나운 적군의 기세를 막아내려면 능히 자립으로 하지 못할 경우에 고려에 귀부하는 대책을 내려서라도 함께 원수의 적을 물리치고 스스로의 의리를 펴야 할 상황이었다. 이는 마치 장량(張良)이 한(漢)나라를 도와 진(秦)나라와 초(楚)나라를 물리쳐서 한(韓)나라의 원수를 갚은 일과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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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 노트
君父 : 신라 말의 경애왕. 후백제 견훤이 경애왕을 살해함.
26세의 고창 성주인 김선평(金宣平)( 안동 김의 시조)은
930 년(경순왕 4)에 권행(權幸:안동권의 시조), 장정필(張貞弼:안동장 시조)과 함께 향병(鄕兵)을 모으고 왕건을 도와 고창(안동)군에서 후백제(後百濟)의 견훤군(甄萱軍)을 토벌하여 병산대첩(甁山大捷)의 전공을 세웠다.
張良 : (?~B.C.168).중국 한나라의 건국 공신. 자는 자방(子房). 한나라 고조 유방을 도와 천하를 통일하였다. 소하·한신과 함께 한나라 창업의 삼걸(三傑)로 일컬어진다.
장량은 세상에 익히 알려진 경세가이며 전략가이다. 자(字)는 '자방'(子房)이고 원래 전국시대 '한'(韓)나라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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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而其遺風所激。民勇於義。如夜別抄及紅巾賊之亂。皆能出死力。以衛君上。遂成美俗。此尤公之所以爲德於一方。而其於廟食百世。宜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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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이
그래서 공의 유풍(遺風)에 격동되어 백성들도 의리에 용감하였다. 야별초(夜別抄) 및 홍건적(紅巾賊)의 반란에도 모두 나서서 사력(死力)을 다하여 임금을 호위하여 마침내 아름다운 풍속을 이루었다. 이는 더욱이 공께서 한 지방에 덕을 베풀어 놓은 까닭으로 이 세상 오래도록 제향을 받아 마땅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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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 노트
夜別抄:고려시대 경찰·전투의 임무를 수행한 부대의 이름. 고려(高麗) 고종(高宗) 때 최우(崔瑀)가 도적을 막기 위하여 밤마다 순행하던 군대(軍隊). 삼별초(三別抄)의 모체(母體)로, 뒤에 수가 많아져 좌우(左右) 두 부대(部隊)로 나누었음. 좌별초·우별초·신의군(神義軍)의 3개 별초군(別抄軍)으로 나누어 삼별초(三別抄)라고 하였다.
紅巾賊之亂 :
홍두적(紅頭賊)·홍적(紅賊)이라고도 한다. 머리에 붉은 수건(紅巾)을 둘러 표를 했으므로 홍건적이라 했다.
중국 원나라 말기에 허베이 성[河北省] 영평(永平)에서 한산동(韓山童)·유복통(劉福通) 등이 중심이 된 한족(漢族) 반란군으로 홍건적은 고려를 2 번이나 침입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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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獨公墓宅。歲久失其處。勝覽記。其在府西古台莊里 而自曾祖文正公府君。嘗率諸宗人。徧行尋求。至爲文以禱于天燈山而竟不得焉。
府西十餘里。有峰曰台莊。卽天燈山之左麓也。其下地名堂洞。而村人樵獵者。皆稱太師墓洞云。
풀이
유독 공의 묘소가 세월이 오래 되면서 그 장소를 잃은 채《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 '김선평의 묘: 부의 서쪽 옛 태장리(台莊里)에 있다.'라는 기록이 보여서 증조 할아버지 문정공(文正公:尙憲) 부군께서 일찍이 여러 종인(宗人)을 거느리고 산을 두루 다니며 찾았고, 심지어 축문(祝文)을 지어 천등산(天燈山) 신령께 빌기까지 하였으나 끝내 찾지 못하였다.
안동부 서쪽 10여 리에 있는 태장이라는 산봉우리가 있으니 곧 천등산의 왼쪽 기슭이다. 그 밑에 당동(堂洞)이라는 이름의 동네가 있는데, 이 마을의 나무꾼이나 사냥꾼이 모두 태사묘 마을이라고 일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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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 노트
勝覽 :조선(朝鮮) 성종(成宗)의 명을 받들어 노사신(盧思愼)
<1427(세종 9)~1498(연산군 4)>. 등이 『대명일통지(大名一統志)』를 본 떠 조선(朝鮮) 각 도의 지리(地理)ㆍ풍속(風俗) 그밖의 특기할 만한 사실(史實)을 기록(記錄)한 책. 중종(中宗) 때에 와서 새로 증보(增補)한 것이 있음.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이라는 책.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4권 에 <부서 십여리 천등산 좌룡 유봉 왈 태장(府西 十餘里 天燈山 左龍 有峰 曰 台莊) > 이라고 기록.
자료에 근거하여 기단(基壇)을 설치하여 매년 음력 10월 10일에 시향을 지내고 있다.
현재 안동시 서후면 태장리 천등산 왼쪽 기슭에 위치하고 있는 태사공의 묘단은 참으로 애석하게도 오랜 세월동안 실전(失展-잃어버림)되었다가 조선 인조 4년(서기 1624년)에 예지승람에 기록된 부서 십여리 천등산 좌룡 유봉 왈 태장(府西 十餘里 天燈山 左龍 有峰 曰 台莊) 자료에 근거하여 기단(基壇)을 설치하여 매년 음력 10월 10일에 시향을 지내고 있다.
文正公: 金尙憲<1570(선조 3)~1652(효종 3)>의 시호임.
인조반정에 참여하지 않은 청서파(淸西派)의 영수이며, 병자호란 때는 끝까지 주전론(主戰論)을 주장했다. 자는 숙도(叔度), 호는 청음(淸陰)·석실산인(石室山人)·서간노인(西磵老人). 아버지는 돈녕부도정 극효(克孝)이고, 형이 우의정 상용(尙容)이다. 윤근수(尹根壽)의 문인이다.
김선평묘(金宣平墓) :<부의 서쪽 고태장리(古苔莊里)에 있다. 장길묘(張吉墓) 부의 서쪽 성곡리(城谷里)에 있다. 권행묘(權幸墓) 부의 서쪽 본파곡리(本破谷里)에 있다.>라고 동국여지승람에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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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崇禎丙寅。宗人金인(土+寅)等。以其名尋求至其地。有申姓者葬其中累世矣。直一墓後十許武。有若古冢而夷者。堦砌外周。廣輪可辨。蓋類大葬焉。而其形局案對。又多與古籍及鄕父老所記者合。旣十八九可徵。
풀이
숭정(崇禎:명 의종의 연호. 천계(天啓)6 년 병인(丙寅:1626인조 4 년)에 종인 김인(金인) 등이 이 이름을 가지고 그 곳에 가서 찾으니 신씨(申氏)라는 자가 여러 대에 그 곳에 묘를 썼고, 바로 그 묘의 뒤편 10여 보에 마치 무너진 고총( 古冢 )처럼 보이는 것이 평평하게 되어있는데, 계체(階砌가 둘러 있고 윤곽을 분변할 만하여 살펴보니 대체로 큰 묘지와 같고 형국(形局)과 안대(案對)가 또 고적(古籍) 및 시골 부로(父老)들이 기록한 내용과 대개 일치하여 이미 10에 8,9는 입증이 될 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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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 노트
崇禎:중국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 의종(毅宗) 때의 연호(1628~1644). 명나라가 망한 뒤에도 조선은 청나라 연호를 쓰는 것을 꺼려 이 연호를 사용하였다.
그런데 숙정연간에는 간지로 병인년이 보이지 않는다. 병인년은 명 희종(明熹宗)의 연호를 쓰던 1621~27)에는 1626년이 간지로 병인년이 보인다.
계체(階砌) 층계 의 섬돌砌 섬돌체
形局: 묏자리의 생김새
案對:무덤의 방향을 잡을 때 안산이나 조산의 봉우리와 무덤의 방향을 일치시키는 좌향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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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而又聞申姓之葬也。實發二古冢。瘞之他所。而於砌下。又得埋石若誌者匿之。益可疑。
於是諸宗人。相率具其事。訟之官。官爲逮問。果得 其發冢狀。卽掘去之。而石終不可得。無以爲驗。官亦不肯竟其事。事遂已。
풀이
또 들으니 신씨가 묘를 쓸 적에 실로 두 개의 고총을 파내어 다른 곳에 묻었고 또 그 섬돌아래에서 또 지석(誌石)과 같이 생긴 돌이 나와 감추었다고 하니 더욱 의심스러워하였다.
이에 여러 종인들이 서로 나서서 이 사실을 갖추어 적어 관가에 고소를 하게 되었고 관가에서 신씨를 체포해서 심문한 결과 과연 고총을 파내었다는 사실을 자백 받아 즉시 신씨의 묘를 파내었으나, 돌은 끝까지 찾지 못하여 입증할 수가 없었고, 관가 역시 이 일을 끝까지 추궁하려 하지 않아서 이쯤에서 그만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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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 노트
瘞 묻을 예
誌石: 후에 무덤의 주인이 쉽게 찾아내도록죽은 사람의 이름ㆍ생일과 죽은 날ㆍ행적(行蹟)ㆍ무덤의 방향(方向) 따위를 적어 무덤 앞에 묻는 판석(板石), 또는 도판(陶板)
성명, 생졸(生卒) 연월일, 행적, 무덤의 좌향 등을 기록하는 것으로서, 돌 두 쪽에 회(灰)로 글씨를 쓰거나, 새기거나, 오지 그릇에 글을 새겨 구워서 광중 앞 가까운 곳에 묻는 것을 말한다. 뚜껑이 되는 돌을 지개석(誌蓋石)이라 하고, 바닥이 되는 돌을 지저석(誌底石)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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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旣已無可奈何。則有言曰。惟我太師。功在羅麗之際。名顯史策。德施鄕邦。子姓蔭庥。不爲不蕃。而衣冠之葬。失不知處。歷幾百年。灑掃莫及。今幸幾得眞兆。而顧爲奸人盜占。塋域毀傷。碑版泯滅。卒無以驗其實而加封築焉。痛心疾首。其何以慰追遠之思。
풀이
일은 이미 어떻게 할 수가 없게 되자 의논하기를, <<우리 태사께서는 신라와 고려의 시대에 공로가 있어서 이름이 역사에 드러나고 공덕이 향방(鄕邦)에 베풀어졌으며, 자손들이 그 음덕을 입어서 번창하지 않은 것이 아니나 의관 등이 묻어 있는 묘소를 실전하여 장소를 모른 채 몇 백 년이 지나도록 향사 享祀를 지낼 길이 없다가, 지금 다행히 진짜 묘소를 찾을 번하였으나 간인(奸人)의 도굴로 인하여 묘역이 훼손되고 비석이 인멸되어 마침내 그 사실을 입증하여 봉축(封築)을 가할 길이 없게 되었으니, 마음이 아프고 골치를 앓을 정도로 걱정되니 조상을 추모하는 그리움을 어떻게 달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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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 노트
鄕邦: 시골 지방
蔭庥(음휴): 조상의 음덕, 혹은 조상의 훈적(勳績)
灑掃 (쇄소): 물을 뿌리고 비로 쓰는 일
塋域 (영역): 산소(山所)
泯滅 (민멸): 형적이 아주 없어짐
封築 (봉축): 무덤을 만들 때, 흙을 쌓아 올림
疾首 (질수): 골치를 앓음 걱정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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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唯古者之祭。固有望墓而壇者。今若倣而爲之。使來者得以彷像其體魄所在。而耕犁樵牧。亦無敢闌入焉。則於禮其或可。咸曰然。
풀이
예전의 제사도 본래 묘소가 바라보이는 곳에 제단을 쌓아 제사를 올린 사례가 있으니, 지금 만약 이 사례를 본떠 제단을 쌓아서 찾아오는 사람들이 그 체백(體魄)이 계시는 곳을 짐작하게 하고, 또한 밭을 갈거나 나무를 하고 짐승을 기르는 이들이 역시 감히 들어갈 수 없게 한다면 예법에 있어 옳을 수도 있소.>>하니, 모두들 그렇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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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 노트
倣 (방): 본을 뜨다
體魄 (체백):죽은 지 오래 된 시신, 또는 땅 속에 묻은 시신
耕犁 (경리): 밭을 가는 일
樵牧 (초목): 땔나무를 하고 짐승을 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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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遂卜用某年某月某甲子。除地爲壇於洞中。旣成而祭。宗人咸會。 自是春秋享祀。一如上冢儀。期永久遵行。而且謀立碑壇側。鑱記其事。以詔後之人。伯父命昌協草具其本末。以備立言者採錄。謹書之如此云。
풀이
드디어 아무 해 아무 달 아무 갑자년에 날짜를 잡아 동네 안에 터를 닦고 묘단을 쌓아 제사를 올리기로 하였다. 공사가 이루어지고 나서 제사를 올리니 종인들이 일제히 모여들었다. 이로부터 봄가을의 제향을 일체 묘소에 올라가서 거행하는 예의처럼 봉행하고, 영원히 준수하기로 약속하고 또 제단 옆에 비석을 세워 그 사실을 새겨서 후인들에게 깊이 전할 것을 도모하였다. 백부(伯父:壽增)께서 창협에게 명하여 이 사실의 전말을 갖추어 적어서 뒷날 입언자의 채록에 대비하라고 하시므로, 삼가 이와 같이 쓰는 것임. 후손 창협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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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 노트
卜用: 날짜를 잡음(예시:卜用是月丁酉)
上冢儀: 묘소에 올라가 거행하는 예의
김수증(金壽增)
조선 시대의 문신(1624~1701). 자는 연지(延之). 호는 곡운(谷雲). 숙종 15년(1689) 기사환국으로 동생 수항이 사사(賜死)되고 이듬해 동생 수흥도 배소(配所)에서 죽자 벼슬을 그만두고 곡운산(谷雲山)에서 은거하였다. 저서에 《곡운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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