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실서원(石室書院)
석실서원은 경기도 미금시 수석동에 있었던 서원으로, 1656년(효종 7)에 김상용(金尙容), 김상헌(金尙憲) 형제의 충절과 학덕을 기리기 위해 사우를 창건하고 위패를 모셨다. 지금은 수석동으로 부르고 있으나, 옛적에는 '서원말'로서 서원이 있던 마을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덕소리의 석실마을과 수석동의 서원마을은 약 8km정도 떨어져 있다.
1663년(현종 4)에 "석실사(石室祠)"라고 사액되어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그뒤 1697년(숙종 23)에 김수항(金壽恒), 민정중(閔鼎重), 이단상(李端相), 1710년(숙종 36)에 김창협(金昌協)을 추가 배향하였다.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어 위패는 묻었으며, 서원 터는 폐허화 되었다.
석실서원 묘정비(廟庭碑)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 석실마을 안동김씨 세장지지(世葬之地)에 있는 묘정비. 묘정비란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서원이나 향교 등의 뜰에 세우는 비석인데, 이 묘정비는 1672년(현종 13)에 건립되었으며, 1868년에 서원이 헐리면서 수석동에 있던 것을 지금의 자리로 옮겨 놓았다.
이곳에 석실서원묘정비와 송백당 유허비, 취석, 도산석실려 등의 비군(碑群)이 형성되어 있다. 석실마을 입구에서 약 300여m 떨어진 김상용 선생 묘에서 김상헌 선생 묘소까지 가는 사이에 있다.
비군(碑群) : 왼쪽부터 석실서원묘정비, 취석, 송백당유허비, 뒤로 작게 보이는 것이 도산석실려
묘정비 (앞면) : 송시열이 짓고, 손자 김수증이 글과 전(篆)을 썼다.
묘정비 (뒷면)
송백당유허비 : 김상헌이 심양에서 풀려나 이곳 석실마을의 '松栢堂' 이라는 별서(別墅, 논 밭이 있는 근처에 한적하게 지은 집)에 돌아와 1652년 83세를 일기로 별세할 때 까지 머물렀던 곳이다. 이 시기에 주로 '석실산인(石室山人)' 이라는 호를 썼다. 1861년(철종 12) 김문근(金汶根)이 비문을 짓고, 김보근(金輔根)이 글씨를 썼다.
취석(醉石) : 취석은 도산정사(陶山精舍)를 세울 당시 송시열이 김상헌의 손자 김수증에게 써준 것을 4년 뒤 1672년에 각자(刻字) 하여 세운 것이다.
'도산정사'는 원래 이름이 석실서원이었다. 퇴계 이황 선생의 도산서원과 유사하다는 의견들도 있었으나,
송시열이 주장하여 '도산정사'로 명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도산석실려(陶山石室閭) : 도산석실임을 알리는 입석. 원래 이 자리에 있었던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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