墓表[金信謙]
公諱昌業이요 字大有이며 號稼齋이다. 我金籍安東이시다. 鼻祖諱宣平으로 高麗太師이시고 曾祖左議政文正公諱尙憲이시고 祖同知中樞1)諱光燦이시고 考領議政諱壽恒이시다. 妣貞敬夫人安定羅氏로 牧使諱星斗之女이시다.
(공의 휘는 창업이고, 자는 대유이며, 호는 가재이다. 우리 김씨로 관향이 안동이시다. 시조 어른은 휘가 선평으로 고려태사이시고, 증조어른은 좌의정 문정공으로 휘가 상헌이시고, 할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로 휘가 광찬이시고, 아버지는 영의정으로 휘가 수항이시다. 어머니는 정경부인 안정나씨로 목사이신 휘가 성두이신 어른의 딸이시다.)
凡擧六男子한대 公居第四로 以農巖三淵兩先生爲仲叔이다. 公生於崇禎2)紀元戊戌孝宗九年二月二日이라 七歲에 養于族祖3)母趙淑人4)하다 始文正公有季弟慶州府尹諱尙宓의 嗣子韓山郡守諱光烒한대 無后라 淑人其繼配5)也하고 以公尸6)其祀하다
(남자가 모두 여섯으로 공은 넷째 아들로서 농암선생과 삼연선생이 중씨와 숙씨가 된다. 공은 명나라 숭정제 원년 무술년 효종 9년 2월 2일에 태어났었다. 7세에 족조모 조숙인에게 양육되었다. 처음 문정공에게는 막내아우인 경주부윤 휘 상복의 대를 이을 아들 한산군수 휘 광식이 있었는데 後嗣가 없자, 숙인이 그의 후처가 되었고, 공을 그 제사에 시동으로 삼았다.
二十四中辛酉進士하고 公戒家方隆盛하고 絶意公車7)하니 議政公惜其才云이러라 及己巳에 議政公遇禍하여 侍羅夫人廬白雲하다 甲戌更化8)에 授內侍敎官하나 不應하고 遂就松溪하여 力農圃9)自晦하다 晩隨伯氏夢窩公入燕하여 記詠名山川古蹟하며 以寫幽欝10)感慨11)하다 歸十年終于家하니 辛丑十二月十二日也이요 享年六十有四이다
24세에 신유년 진사에 합격하고, 공이 집안을 경계하니 바야흐로 융성해졌고, 과거에 뜻을 두지 않으니, 의정공이 그의 재주를 아까워했다고 이른다. 己巳士禍에 미쳐 의정공이 화를 만나서, 나부인을 모시고 백운동에 거처하였다. 갑술년에 경화됨에 내시교관에 除授받았으나 응하지 않고, 마침내 송계에 나아가 농사일에 힘쓰며 스스로를 감추었다. 晩年에 백씨인 몽와공을 따라 연나라에 들어가 이름난 산천과 고적을 기록하며 읊어, 답답하고 우울한 감개를 토로하였다. 돌아 온지 10년에 집에서 생을 마치시니, 辛丑年 12월 12일이요, 향년 64세이시다.
明年二月에 權12)長湍江漣里新卜之原하다. 至乙巳에 移左數十步午向하고 以孺人李氏墓合窆하다 公英明介直하고 節謹詳恕하니 文章自高潔하다 輒以敏悟理事하고 見難兄弟間이면 然未甞自多하고 深惡貌餙徇名者하다
다음해 2월에 임시로 장단 <하서면> 강연리 신복언덕에 매장하였다가 을사에 이르러 좌측 수십보지역 오향에 이장하고, 유인 이씨를 묘에 합장하였다. 공은 영명하며 절개가 곧고, 절도있고, 삼가며, 자상하고, 너그러우시니, 문장은 절로 고결하였다. 문득 민첩하고 슬기로움으로 일을 처리하시고, 형제간에 어려운 일을 당하면, 그러나 일찍이 자신을 많이 하였다 않고, 모양을 꾸미고 명예를 쫒는 것을 매우 싫어하였다.
孺人宗室益豊君諱涑之女로 宣祖大王四世孫也이다 先公二年生하고 十六歸하여 三十八卒하시어 始葬楊州栗北里하다 農巖先生甞有誌하니 稱孝順之德하다 生三男一女하시니 男長祐謙先沒하고 一子由行이요 女李顯重이다 次彦謙이니 三女로 長任命周하고 二幼하다 次信謙進士로 二男亮行이니 一幼하다 女適脩撰趙文命하니 二子載浩載淵이요 側室子女各二이니 卑謙이고 餘幼하다 嗚呼라 公卒未幾하여 三淵先生繼沒하시고 夢窩公罹極禍하시니 於是에 諸父皆亡하시고 世無知公者하니 不肖孤信謙은 泣血謹識13)하노라
유인은 종실의 풍익군 휘 속의 딸로 선조대왕의 4세손이다. 공보다 2년 먼저 생하시고 16세에 시집와 38세에 졸하시어, 처음에는 양주 율북리에 장사지냈다. 농암선생이 일찍이 기록을 남겼는데 효순의 덕을 칭하였다. 3남 1녀를 낳으시니 장남 우겸은 일찍 죽으니, 아들은 유행이고 딸은 이현중의 처이다. 차자는 언겸이니 딸이 셋으로 장녀는 임명주에 시집가고 둘은 어리다. 다음 차자는 신겸이니 진사로 2남이니 언행이고 하나는 어리다. 따님은 수찬 조문명에게 시집가시니, 두 아들이 재호와 재연이다. 측실의 자녀가 각 둘이니 비겸이고 나머지는 어리다.
오호라 공이 돌아가신지 얼마 되지 않아 삼연선생이 연이어 돌아가시고, 몽와공이 지극한 재앙에 걸리시니, 이에 제부께서 모두 돌아가시고, 세상에 공을 아는 사람이 없으니, 불초 고아 신겸은 피눈물을 흘리며 삼가 기록합니다.
1) 同知中樞: 朝鮮時代 때의 中樞府의 從二品 벼슬
2) 숭정제 (崇禎帝 ; 1610~1644). 명나라 제17대 황제(재위 1628∼1644)로서 이름은 주유검(朱由檢)이며 묘호는 의종(毅宗)이다. 그리고 시호는 장렬민제(莊烈愍帝)이다. 연호를 따서 숭정제라고 한다.
3) 族祖(족조): 동족 중 祖父와 같은 항렬의 남자
4) 淑人(숙인): 조선(朝鮮) 때 당하관(堂下官) 정3품(正三品)ㆍ종3품(從三品)인 문무관(文武官)의 아내에게 주던 봉작(封爵)
5) 繼配(계배): 후처의 높임말
6) 尸(시): 주관하다. 주장하다. 尸童
7) 公車(공거): 과거에 급제하는 것
8) 更化(경화): 정치를 개혁하여 교화를 다시 한다는 뜻
1694년(숙종 20) 갑술년에 노론과 소론이 남인을 몰아내고 다시 정국을 장악한 정치적 변동. 갑술옥사(甲戌獄事) 또는 갑술경화(甲戌更化)라고도 한다.
[경과]
1694년 노론계의 김춘택(金春澤)과 소론계의 한중혁(韓重赫) 등 노론.소론계 자제들은 비밀자금을 모으고 궁중의 환관.궁녀들과 내통하여 폐비 민씨의 복위운동을 통해 남인의 축출과 서인의 재집권을 계획하였는데, 이 사건은 그들의 일당이었던 함이완(咸以完)의 고변으로 전모가 드러났다. 그러자 실권을 쥐고 있던 남인계의 민암(閔黯).이의징(李義徵) 등이 그 주동자들을 심문하여 옥사사건은 크게 확대되고, 많은 서인들이 여기에 연루되었다. 그런데 3월 29일에 서인 김인(金寅)이 영조의 생모가 되는 숙원 최씨의 독살설을 역고변하였고 숙종은 그로 인해 매우 큰 충격을 받았다. 남인들의 지나친 정권욕에 염증을 느끼고 폐비사건도 차츰 후회하게 된 숙종은 독자적인 결단에 의해 돌발적인 환국을 단행하였다. 4월 1일 밤 2시경에 우의정 민암과 판의금부사 유명현(柳命賢) 등을 귀양보내는 등 남인을 축출하고 서인을 다시 등용했던 것이다. 환국 도모는 대체로 두 방향에서 추구되었다. 즉 한중혁의 소론쪽은 집권 남인측의 막후실력자인 총융사이며 왕비 장씨의 친동생인 장희재(張希載)와 동평군(東平君) 항(杭)에게 뇌물을 쓸 것을 계획하였다. 이것은 폐비 민씨를 복위시키되 별궁에 거처하게 한다는 방침으로 남인계와 정면으로 맞서기보다는 세력을 잃은 노론과 소론의 진출을 어느 정도 만회하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다른 하나는 숙종이 갖고 있던 남인과 왕비 장씨에 대한 편향심을 돌리게 하여 남인의 동향을 자세히 보고하도록 한 것이다. 그들은 숙종의 유모인 봉보부인(奉保夫人)을 통하여 기사환국 이후 새로이 왕의 사랑을 받게 된 숙빈 최씨와 연결을 가져, 숙종에게 남인계의 잘못된 점을 자세히 알리게 하였다. 그리하여 숙종은 민암 등 남인의 고변사건에 대한 보고를 받기도 전에 태도를 바꾸어 정국의 반전을 단행하였던 것이다.
[결과]
환국을 단행한 그날, 숙종은 영의정 권대운(權大運), 좌의정 목내선(睦來善), 우의정 민암 등 남인 신료들을 물리치고 남구만(南九萬)을 영의정, 박세채(朴世采)를 좌의정, 윤지완(尹趾完)을 우의정에 각각 기용하여 소론정권을 성립시키게 되었다. 노론측도 폐비 민씨가 복위된 것을 비롯하여, 서인의 정치적 지주인 송시열(宋時烈)과 민정중(閔鼎重).김익훈(金益勳).김수흥(金壽興).조사석(趙師錫).김수항(金壽恒) 등도 복관되는 등 1698년에 일어난 기사환국(己巳換局) 이전의 상태가 되었다. 남인측은 민암.이의징이 사사되고 권대운.목내선.장희재 등 다수가 유배되었으며 왕비 장씨도 희빈으로 강등되었다. 남인들은 이 환국을 계기로 정치적으로 완전히 몰락하여 두 번 다시 정국의 주도권을 잡을 수 없게 되었다. 한편 이 사건의 뒷처리 과정에서 환국 계획에 중인.상인층의 자금이 뇌물수수의 방법으로 이용된 것이 밝혀져 국왕이나 조정의 큰 논란거리가 되었다. 이것은 이미 사회경제의 변동으로 중앙정치 양상이 정치자금 수수와 밀접히 관련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9) 農圃(농포): 農作物을 가꾸는 밭
10) 幽欝(유울): 마음이 답답하고 개운치 못함
11) 感慨(감개): 마음 속 깊이 사무치게 느낌
12) 權(권): 임시로
13) 識(지): 기록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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