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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東金氏 世藏之碑
글쓴이: 金儀東
옮긴이: 金彰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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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驪州治北 三十里 大神 鄕有山 東西對峙 若揖若拱 松梓相望川流經其間
東曰牛山之草峴枕乙原而開局中有 四大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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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역:
1. 여주 관아에서 다스리는 북쪽 삼십 리 대신 마을에 산이 있는데.
동쪽과 서쪽으로 서로 맞서서 우뚝 솟아있는 모습이 절하는 듯 손을 맞잡은 듯하며,
소나무와 가래나무가 서로 바라보고 있고, 그 사이를 냇물이 흐르고 있다.
동쪽을 우산이라 이르며 그 산의 초현 마을 을좌<묏자리나 집터 따위가 을방을 등지고 앉은 자리 정동(正東)에서 남쪽으로 15도의 방위를 중심으로 한 각도의 안.> 의 벌판에 임하여서
한 구획을 일구니 그 가운데 네 개의 산소가 있다.
♣ 여주 대신면 초현리 마을에 사대 산소가 있다.
18세 몽와 김창집-19세 죽취 김제겸- 20세취백헌 김성행-21세장경 김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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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寔我 十世祖 忠獻公 夢窩 先生 諱昌集 九世祖 忠愍公 竹醉先生 諱 濟謙 八世祖 忠正公 翠栢軒 先生 諱省行 七世祖 掌樂院正 贈議政府 左贊成諱 履長 衣履之攸藏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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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역:
2. 바로 나의 10세 조 충헌공 몽와 선생 휘 창집(金 昌集 1648-1722)< 문곡의 첫째 아드님. 자 汝成 호 夢窩 시호 忠獻 .壬寅獄事로 죽은 老論 四大臣의 한 사람> , 나의 9세 조 충민공 죽취선생 휘 제겸( 金 濟謙 (1680~1722) <자는 필형(必亨). 호는 죽취(竹醉). 문집 《죽취고》 편서 《증보삼운통고(增補三韻通考)》 신임사화 때 죽은 삼학사(三學士) <조성복(趙聖復)·김민택(金民澤)>
나의 8세 조 충정공 취백헌 선생 휘 성행( 金省行 1696~1722)< 자 사삼(士三), 호 취백헌(翠栢軒)
시호 충정공(忠正公) 1722.5.19 옥중에서 杖死. 四代不遷之位 四代忠臣 一廟四忠의 가문>
나의 7 세조 장악원정 증의정부 좌찬성 휘 이장( 金 履長1718-1714) <자 長卿. 蔭 掌樂正 증 좌찬성>은 유골은 없이 신과 옷만을 묻었다. <의리지장衣履之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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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西則 峨嵋山 栗里 有枕酉之封. 掌樂院正 府君 第二子 贈 議政府 左贊成
諱泰淳 字 來仲之藏也
其右岡庚坐 有贊成府君曾孫 刑曹叅判 諱 永均 字 穉胤之墓
其右岡坤坐有 叅判府君系子 成均進士 諱 斗鎭 舊諱興鎭 字 聖賓之墓
贊成府君兆下酉坐 有進士府君長子 學生 諱 景漢 字君星之墓
其左岡 戌坐 有孺人恩津宋氏之墓 諱 乃彬女 隆熙 一年己酉二月二十五日生 丁巳 十一月 三日 歿 卽 我室人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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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역
3. 서쪽 아미산 율리< 율촌리 속칭:배미>마을에 유좌<묏자리나 집터 따위가 유방인 정서 쪽을 등지고 앉은 자리 > 자리에 산소가 있는데, 장악원정<정삼품의 악관 >부군의 둘째 아들 증 의정부 좌찬성 휘 泰淳이 묻혀 있고, 자가 내중이다.
그 오른쪽 언덕 경좌 庚坐 <집터나 묏자리 따위가 남서쪽인 경방(庚方)을 등짐>에 찬성부군
태순의 증손 형조참판 휘 永均의 산소가 있고, 자는 치윤이다.
그 오른쪽 언덕 곤좌 坤坐<서남쪽에서 동북쪽으로 향한 좌향.>에는 참판부군 永均을 이은 아들
성균진사 휘 斗鎭의 산소가 있는데, 옛 휘는 흥진이요, 자가 聖賓이다.
찬성부군 泰淳의 산소 아래 유좌 酉坐<묏자리나 집터 따위가 유방인 정서 쪽을 등지고 앉은 자리> 에는 진사 부군 큰 아들 학생 휘 景漢의 산소가 있는데 자는 君星이다.
그 왼쪽 언덕 술좌戌坐 <서북서에서 동남동으로 향한 좌향>에는 부인 은진 송씨의 산소가 있는데, 휘 내빈 (乃彬)의 딸이고, 1909년(융희 1 년 기유) 2 월 25 일에 태어나고 1977년정사년 11 월 3 일에 세상을 떠나니 곧 나의 아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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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我金世系 詳載先碣可按覩也.
贊成府君以 英祖丁卯 十二月 二十四日生 距其生 十九年 乙酉 四月 十三日卒 配 贈貞敬夫人 潘南朴氏 判書 諱 宗德 女生 先府君一年 丙寅 三月二十日歿 後府君 五十二年 丁丑 十一月 六日 祔府君墓 府君蚤世事 行佚 不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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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역
4. 우리 안동 김가의 대대로 내려온 계통은 자세히 기록된 선조의 묘갈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찬성부군 泰淳은 英祖丁卯 <1747년(영조23 정묘)>12월 24 일에 태어나셨고, 태어나신 후 19년인 1765 년 (영조41 을유) 4 월 13 일에 돌아가셨다.
부인은 증 정경부인 반남 박씨며 판서인 휘 종덕의 따님으로 돌아가신 부군보다 일 년 먼저인 1746년( 영조22병인) 3 월 20 일 태어 나셨다. 부군이 돌아가신 후 52 년이 되는 1817년( 순조17 정축) 10 월 6 일에 부군의 묘에 합사하다. 부군의 요절에 대한 기록은 없어져 전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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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府君之從祖祖父渼湖先生祭文有曰
吾以汝爲仁而好善 才而嗜文 又其氣貌明秀 志慮安靖 類可以進於學
而中心之汝者遠矣。且聞汝自余之南遊 日夕遲余以來學 而其誠盖惓惓睠睠
則汝之所以嚮余者 又可知也。
今余歸而汝則死矣。惜其不能卒敎 以觀其成而止于此也。
其遠大之期嗟惜之慟果何如也 發揮 性情之蘊 贊美品質之粹 足以徵信於後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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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역
5. 태순 부군의 종조부 渼湖선생은 <金元行<1702 년 ( 숙종 28) - 1772 년 ( 영조 48) 자 伯春 호 渼湖 , 雲樓 시호 文敬 李縡 의 門人 > 제문에서 말하기를
“나는 네가 어질면서 선을 좋아했고, 재주가 있고, 문장을 좋아했다고 생각한다.
또한 그 풍채와 외모가 빼어나게 아름다웠고, 사물을 헤아리고 판단하는 작용이 고요하여 학문의 길에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여 마음속으로 너에게 기대한 것이 매우 원대하였단다.
또한 내가 들은 바로는 내가 남쪽에 유람을 하러 가 있을 때 네가 밤낮으로 나를 기다리며 배우러 오고자 하면서 그 정성을 쏟았다고 하니, 나에게로 향한 너의 마음을 또한 알만 하구나.
그런데 지금 나는 돌아왔지만 너는 죽었으니, 끝까지 너를 가르쳐서 네가 성취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여기에 멈추고 만 것이 매우 애석하구나. „ 라고 하였다.
큰 인물이 될 것이라는 기대가 무너졌으니 애달프고 안타깝게 여기는 서러움이 정말로 어떠하였을까. 타고난 본성의 쌓임을 드러내고, 인품의 아름다움을 찬양 한 것은 훗날에 족히 믿을 만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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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叅判府君 卽 我曾祖也 生於純祖壬午 三月 二日 庚戌進士 戊午 庭試文科
官止 刑曹叅判 卒 於 壬申 七月 九日 配 贈貞夫人 全州李氏 叅判 諱寅夔 女 壬午 三月 一日 生 壬子 十月 二十二日 歿 祔府君 墓
繼配 貞夫人 密陽朴氏 諱 韺進女 丁酉 二月 四日生 甲午 七月 六日 歿 祔府君 墓 府君之世 己遠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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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역
6. 叅判府君 永均은 곧 나의 증조다. 1822년(순조22 임오) 3월 2 일에 태어나시고, 1850년 (철종 1경술)에 진사, 1858년(철종9무오)에 정시문과에 급제 하였고, 관직은 형조 참판에 이르렀다. 1872년 (고종9 임신) 7 월 9 일에 세상을 떠나시다. < 향년50세>
부인은 증 정부인 전주이씨로 참판 휘 인기의 따님이다. 1822년 (순조 22 임오) 3 월 1일에 태어나시고 1852년 (철종3임자) 10 월 22 일에 돌아가시다. 부군의 묘에 합장하다. 후부인은 정부인 밀양 박씨로 휘 영진의 따님이다. 1837년(헌종3정유) 2 월 4 일에 태어나시고, 1894 (고종31 갑오) 7 월 6 일에 돌아가시다. 부군의 묘에 합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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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府君之世 己遠矣 潛德懿行文獻多闕 略述 家庭所聞則
興宣大院王之訪府君也 府君以酒饌 款待 大院王辭氣頗倨傲
府君盛怒曰 閤下何若是待我 我不受閤下之節制自是除拜一切不就
府君之 剛直於斯乎可以仰揣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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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역
7. 부군 永均<1822.3.2-1872.7.9 향년 50세 자 穉胤. 형조참판> 산소 찬성공조우강경좌 삼합폄>의 세대가 이미 오래되어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미덕(美德)과 아름다운 행실이 문헌에 빠진 것이 많아서 우리 가문 가정에 들리는 바를 간략히 말하면 다음과 같다.
“흥선 대원왕興宣大院君, 1820년 음력 11월 16일(양력 12월 21일) ~ 1898년 음력 2월 2일(양력 2월 22일))정치가, 화가이다. 이름은 이하응(李昰應부인은 여흥부대부인 민씨이다
자는 시백(時伯), 호는 석파(石坡)·해동거사(海東居士)이며, 본관은 전주이다. 1907년 10월 1일 대원왕(大院王)으로 추봉되었고, 헌의(獻懿)를 시호로 흥선헌의대원왕(興宣獻懿大院王)이 되었다.[2]. 남연군(원래는 인평대군의 6대손이나 후에 양자 입적)과 군부인 민씨의 넷째 아들이며, 고종의 친아버지이다.
이 부군을 방문하였다. 부군은 술과 음식을 차려 놓고 정성껏 대접하였다. 대원군의 말하는 태도나 상태가 매우 오만불손하기에 부군은 대단히 노여워하여 말하기를“ 합하는 어찌하여
나를 이렇게 대우하는가, 나는 합하가 절제하지 않고 제멋대로 관직을 임명하는 것을 받아드릴 수 없다.„라고 하면서 일체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부군의 꿋꿋하고 곧음이 이와 같으니 우러르고 헤아려 볼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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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嗣以文忠公仙源先生諱尙容 十世孫 北部都事 諱 命圭 舊 諱 頀均第 三子 進士府君 卽 我祖考也 . 高宗乙丑 八月 二十八日生
自幼天資非凡 八歲 過房 是年 叅判府君下世慽容號泣 儼若成人事
朴夫人 凡事 每先意 承順 怡愉洞屬 不以止慈而或怠 朴夫人甚安之至
壬午時事 大 變奉 朴夫人 盡室退處于驪州
辛卯 中司馬試 甲午 朴夫人之喪 居廬 終制 守淸 白簞瓢屢空處之晏如也 .
敎子孫以嚴御 婢僕以恩隣里之赤貧者 盡心而 恤之 目見世路去益 險巇迺絶意 榮進屛居簡出優遊以 卒 卽週甲之年 十一月 十五日也.
配 孺人 恩津宋氏 郡守 諱 殷老女 壬戌 二月 二日生 庚子 六月 二十九日 歿 祔府君 墓. 繼配 淸州郭氏 諱 致恒女 乙酉 六月 二十六日生 丙午 九 月 十五日 歿 祔府君 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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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역
8.후사後嗣는 문충공 선원선생 휘 상용의 10세손인 북부도사 휘 명규( 구휘 호균)의 셋째아들로 진사부군이며 곧 나의 할아버지이다. 1865년 (고종2 을축) 8 월 2 8일에 태어나셨다.
어려서부터 타고난 성품이 뛰어나 8 살에 양자가 되었으며, 이 해에 참판부군 영균이 세상을 떠나가자 근심에 쌓인 모습으로 소리 높여 목 놓아 우니 의젓한 모습으로 인간사를 다루었다.
박부인은 모든 일에 부모의 뜻을 미리 헤아리고, 그 뜻에 따라서 일을 처리하였고,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대하였고, 지극히 인자하신 정 으로 혹시라도 태만하지 않았다.
박부인은 매우 편안한 경지에 이르렀다.
1882년 (고종 19년 임오)임오군란의 큰 변란을 만났을 때 박부인은 가족 모두를 이끌고 여주에 물러나 있었다.
1891년 (고종28년 신묘 )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고, 1894년(고종31년 갑오년)에
박부인의 상을 당해서는 삼년상을 마칠 때까지 초막에서 거처하였고, 재물에 대한 욕심이 없이 곧고 깨끗함을 지켰고, 식량이 자주 떨어졌어도 그 처지에 마음이 안정되고 편안하였다.
자손을 가르치기를 엄정하게 다스리었으며, 비복들은 좋은 이웃 마을의 매우 가난한 사람에게 마음을 다해서 돌보았으며, 세상을 살아가는 길이 갈수록 더욱 험준함을 눈으로 보고는 곧 뜻을 접고 벼슬길에서 때를 보고 물러나와 편안하고 한가롭게 지내다가 60 이 되는 해 11 월 15 일에 세상을 떠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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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學生府君 卽 我 先考也. 高宗戊子 正月 十一日生
自在 齠齔 德器 夙就 年甫 十三 遭內艱執禮
斬斬見者 莫不嘖嘖 及 丁外憂 情文允備 一無遺慽事
繼母至孝與諸弟湛樂而 必敎 之以 義方 恂恂 有法家風
甲戌 七月 二十二日 卒 壽 僅 四十七 配 孺人 完山李氏 大司成 諱 秀萬女 乙酉 三月 二十三日 生 甲寅 三月 十一日 歿 祔府君 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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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역
9. 학생 부군은 곧 나의 돌아가신 아버님이다.1888년(고종25 무자년) 1 월 11 일에 태어나셨다. 어렸을 때부터 덕스러운 인품을 일찍 이루었고, 나이 겨우 13 세에 어머님의 상을< 부인 은진 송씨 1862 (철종 13임술) 2.2 -1900 (고종 37 경자) 6.29 39세>만나 장사를 지내드렸다.
엄숙히 처리하는 것을 본 사람들은 칭찬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상을 당해서도 情理와 예문을 잘 갖추어 하나도 근심을 남기지 않았다.
계모<후배 청주 곽씨 1885(고종22을유) 6, 26 -1966(병오) 9.15 향년 82세 >에 이르러서는 효도하였고 ,여러 동생들과 평화롭고 화락하게 지냈으며, 반드시 올바른 사람이 되는 바른 길과 공손하고 진실함, 그리고 예법(禮法)을 숭상하는 집안이라고 가르쳤다.
갑술년<1934년> 7 월 22 일에 돌아가시니 수명은 겨우 47 세이다. 부인은 유인 완산 이씨로 대사성 휘 수만의 따님이고, 을유 년<1885년 고종 22> 3 월 23 일에 태어나시고, 갑인년< 1974년> 3 월 11 일에 세상을 떠나다. 부군의 산소에 합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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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嗚呼 贊成叅判 兩府君之墓 但有表焉
祖考之墓 因風說 並 不設 石儀
先考之墓 尙闕 顯刻 夙夜 是懼而力 不能 各記
謹撮其大較樹之阡道用詔來昆 於 無窮云
六 世孫 儀東 謹撰 並書
檀紀 四千 三百 十一年 戊午 八月 立 <1978 -4311 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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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역
10.
아아! 찬성부군 泰淳과 참판공 永均의 산소에는 표석만 있고,
돌아가신 할아버지 斗鎭의 산소에는 출처를 알 수 없는 떠도는 소문 때문에
함께 석물을 세울 수가 없었고, 돌아가신 아버님 景漢의 산소에는 묘비가 없어 밤낮으로 이것을 송구스러워 했으나 각각 기록하는 것은 힘이 부족하였다.
삼가 그 행적의 대강을 한데 모아서 묘도에 세워 후손들에게 알리노니 무궁하게 되기를 바라노라.
6 세손 의동이 삼가 짓고 글을 쓰다.
단기 4311 년 < 서기 1978 년> 무오 8 월 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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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글을 보고 큰 손자 < 희년 >이가 쉽게 쓴 글을 아래에 옮긴다.
조상님을 생각하는 그 오롯한 마음이 흐르고 있음에 뿌듯한 마음이다.
< 공기> 선조님의 산소를 여주군 대신 면 율촌리로 이장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안동김씨 세장지비(安東金氏 世藏之碑)
여주(驪州) 관아에서 북쪽으로 삼십 여리 떨어진 대신(大神) 마을에 두 개의 산이 있는데. 동쪽과 서쪽으로 서로 맞서서 우뚝 솟아있는 모습이 마치 절을 하려고 손을 맞잡은 듯하며, 소나무와 밤나무, 가래나무들이 서로 바라보고 있고, 또한 그 사이를 큰 개울이 흐르고 있다.
두 개의 산 중에서 동쪽에 있는 산을 우산(牛山)이라 부르며, 그 산의 앞자락에는 초현리(草峴里, 아랫새재마을)가 자리하고 있다. 그 뒤 우산(牛山) 중앙부의 앞으로 나온 평평한 산자락 구릉의 위에서 아래로 네 기의 묘소가 모셔져 있는데 각각 몽와(夢窩) 김창집(金昌集), 죽취(竹醉) 김제겸(金濟謙), 취백헌(翠栢軒) 김성행(金省行), 장경(長卿) 김이장(金履長) 선생의 묘소이다.
그 묘소들 중에서 제일 윗대인 몽와(夢窩) 김창집(金昌集, 1648~1722, 자(字) 汝成, 시호(諡號) 忠獻) 선생은 나의 10대조로 신임옥사(辛壬獄事)로 돌아가신 노론(老論) 4대신(四大臣: 김창집·이이명·이건명·조태채) 중의 한 분이었고,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 1629~1689, 자(字) 久之)의 첫째 아드님이시었다.
김수항(金壽恒) 선생의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이패동(二牌洞) 산 11번지에 있으며, 정경부인 안정 나씨(安定 羅氏)와 합장묘이다.
9대조는 충민공(忠愍公) 죽취(竹醉) 선생으로 휘(諱)는 제겸(金濟謙, 1680~1722), 자(字)는 필형(必亨)이고, 문집으로는 ‘죽취고(竹醉考)’가 있고, 편서로는 ‘증보삼운통고(增補三韻通考)’가 있다. 신임사화(辛壬士禍) 때 사사(賜死)된 삼학사(三學士 김제겸·조성복·김민택) 중 한 분이시다.
8대조인 충정공(忠正公) 취백헌(翠栢軒) 선생은 휘(諱)가 성행(金省行, 1696~1722)이시고 자(字)는 사삼(士三)으로 1722년 5월 19일에 역시 옥(獄)중에서 장사(杖死)하셨다.
7대조인 장악원정(掌樂院正: 정삼품의 악관), 증 의정부 좌찬성 김이장(金履長, 1718-1714, 자(字) 長卿) 선생은 유골은 없이 신발과 옷가지만을 묻었는데(의리지장 衣履之藏), 그 이유는 알려지지 않는다.
안동김씨 일묘사충 정려문(安東金氏 一廟四忠 旌閭門)은 초현리의 안동김씨세장지(世葬地: 대대로 묘를 쓰고 있는 땅)에 있고, ‘일묘사충지문(一廟四忠之門)’이라고 쓰여진 편액(扁額)이 걸려 있는데, 이는 충신 네 분을 안치했다는 뜻이다.
네 충신은 1689년(숙종 肅宗 15)의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사약을 받고 돌아가신 김수항(金壽恒), 1722년(경종 景宗 2)의 신임사화(辛壬士禍)로 돌아가신 아들 김창집(金昌集), 손자 김제겸(金濟謙), 증손자 김성행(金省行)이시다.
이 선조들의 나라에 대한 목숨을 다한 충성에 대해 숙종대왕은 4대불천지위 4대충신 1묘사충(四代不遷之位 四代忠臣 一廟四忠)의 가문이라는 지위를 내려 후세의 추앙을 받게 하였다.
두 개의 산 중에서 서쪽에 위치한 아미산(峨嵋山) 앞자락에 율촌리(栗村里, 속칭 배미)가 있고, 마을이 끝나고 아미산이 시작되는 야트막하고 넓은 구릉의 꼭대기, 마을과 개울 건너 우산(牛山)이 한 눈이 들어오는 자리에 묘소가 있으니, 내게는 6대조이시고 장경(長卿) 선생의 둘째 아들로 의정부 좌찬성으로 추증되신 김태순(金泰淳, 자(字) 來仲) 선생의 묘소이다.
또, 우산(牛山)을 마주보고 서서 오른쪽으로 약간 떨어져 있는 야트막한 언덕에 내중(來仲) 선생의 증손(曾孫)이시고 내게는 증조(曾祖)가 되시는 형조참판 김영균(金永均, 자(字) 치윤(穉胤)) 선생의 묘소가 있다.
그리고 증조부의 묘소에서 마을 쪽으로 나와 고개를 가로질러 야트막한 산자락을 올라가다보면 金永均 선생의 아들이고 내게는 조부가 되시는 성균진사 김두진(金斗鎭, 옛 휘(諱) 흥진, 자(字) 聖賓) 선생의 묘소가 배미마을을 굽어보고 계시다.
다시 6대조 金泰淳 선생의 묘소 아래에는 金斗鎭선생의 큰 아들인 김경한(金景漢, 자(字) 君星) 선생의 묘소가 있는데, 이 분이 내 선친(先親)이시다.
그 왼쪽으로 마을을 가로질러 아미산의 안쪽으로는 은진(恩津) 송씨(휘(諱) 宋得任)의 묘소가 있는데, 송내빈(宋乃彬) 선생의 따님으로, 1909년(융희 1년, 己酉) 2월 25일에 태어나고 1977년 (丁巳) 11월 3일에 세상을 떠나니 곧 나의 아내이다.
우리 안동김가(安東金家)가 대대로 내려온 역사는 자세히 기록된 선조의 묘갈(墓碣: 무덤 앞에 세우는 머리 부분이 둥그스름한 작은 돌비)을 살펴보아야 정확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찬성부군 金泰淳 선생은 英祖 23년(丁卯 1747년) 12월 24일에 태어나셨고, 19년 후인 1765년(영조 41, 乙酉) 4월 13일에 청년의 나이에 돌아가셨으나 요절(夭折)의 이유에 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부인은 증 정경부인 반남(潘南) 박씨이며 판서인 박종덕(朴宗德) 선생의 따님으로, 돌아가신 부군보다 일 년 앞선 1746년(영조 22, 병인) 3월 20일에 태어 나셨다. 부군이 돌아가신 후 52년이 되는 1817년(순조 17, 정축) 10월 6일에 부군의 묘에 합사했다.
金泰淳 선생의 종조부이신 渼湖 선생(金元行, 1702년(숙종 28)~1772년(영조 48), 자(字) 伯春, 호(號) 渼湖, 雲樓 시호(諡號) 文敬, 李縡의 門人)은 祭文에서 이렇게 선생을 평하였다.
“너는 성품이 어질어 선을 좋아하며, 재주가 있고, 문장이 뛰어났다. 또한 그 외모와 풍채가 빼어나게 아름다웠고, 사물을 헤아리고 판단하는 능력이 뛰어나 학문으로 대성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여 내심 기대가 매우 컸다. 또한, 내가 집을 비웠을 때 네가 배움에 정진하고 밤낮으로 나를 기다리며 무사귀환을 빌었다고 하니, 내게로 향한 너의 마음을 또한 알만 했다. 그런데 지금 나는 돌아왔지만 너는 세상에 없으니, 끝까지 너를 가르쳐서 네가 성취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여기에 멈추고 만 것이 매우 애석하구나.”
큰 인물이 될 것이라는 기대가 무너졌으니 안타깝고 애달픈 부모의 마음이 어떠하였을까? 타고난 본성과 길러진 성품과 능력에 대한 조부의 칭찬을 통해서 그의 사람됨은 후대의 사람들이 족히 짐작할 만하다고 할 것이다.
김영균(金永均) 선생은 나의 증조부이시다. 1822년(순조 22, 壬午) 3월 2일에 태어나시고, 1850년(철종 1, 庚戌)에 진사, 1858년(철종 9, 戊午)에 정시문과에 급제하였고, 관직은 형조참판에 이르렀으며, 1872년(고종 9, 壬申) 7월 9일에 享年 50세로 세상을 떠나셨다.
부인은 증 정부인 전주(全州) 이씨로 참판 이인기(李寅夔) 선생의 따님이시다. 1822년(순조 22, 壬午) 3월 1일에 태어나시고 1852년(철종 3, 壬子) 10월 22일에 돌아가시어 부군의 묘에 합장하였다. 後부인은 정경부인 밀양(密陽) 박씨로 박영진(朴韺進) 선생의 따님이신데, 1837년(헌종 3, 정유) 2월 4일에 태어나시고, 1894(고종 31, 갑오) 7월 6일에 돌아가시어 역시 부군의 묘에 합장하였다.
金永均(1822. 3. 2~1872. 7. 9, 자(字) 穉胤, 享年 50세) 선생의 세대가 이미 오래되었고,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美德과 강직한 행실이 문헌으로 전해지지 않는 까닭에 우리 가문의 가정(家庭)에 들리는 바를 간략히 적으면 다음과 같다.
“남연군(南延君, 仁祖의 셋째 아들인 인평대군(麟平大君)의 6대손)과 군부인 민씨의 넷째 아들이며, 고종의 친아버지인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1820. 11. 16 ~ 1898. 2. 2) 이하응(李昰應)이 어느 날 金永均 선생의 댁을 방문하였다.
선생은 술과 음식을 정갈하게 차려 놓고 정성껏 대접하였으나, 대원군의 말하는 모습이나 태도가 오만불손하기 짝이 없었다. 그 모습을 참다 못한 선생은 매우 노여워하며 말하기를 “합하(閤下)는 어찌하여 나를 이렇게 대우하는가? 나는 합하가 제멋대로 관직을 임명하고 절제 없이 행동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소.”라고 꾸짖으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고 말았다. 그 즉시 관직에서 물러나 이후 일체 관직에 나가지 않았는데, 부군의 꿋꿋하고 곧음이 이와 같아 주변의 우러름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1865년(高宗 2, 乙丑) 8월 28일에 태어나신 김두진(金斗鎭) 선생은 문충공(文忠公) 선원(仙源, 휘(諱) 尙容) 선생의 10세손인 북부도사(北部都事) 김명규(命圭, 구휘(諱) 호균)의 셋째 아들로 나의 조부이시다.
어려서부터 타고난 성품이 남달라 양자로 들어 온 8세에 양부(養父)인 김영균(金永均)선생이 세상을 떠나시자 슬픔에 쌓여 소리 높여 목 놓아 울고, 그 후 어린 나이였음에도 의젓한 모습으로 가솔을 이끌었다고 전해진다.
선생은 모든 일에 어른의 뜻을 미리 헤아리고, 그 뜻에 따라서 매사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임하였고, 타고난 근면함과 지극한 인자함으로 양모(養母)인 박부인을 편안하게 모시었다. 1882년(고종 19년, 壬午)에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일어나자 선생은 가솔을 모두 이끌고 여주(驪州)로 낙향했다.
1891년(고종 28년, 辛卯)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고, 1894년(고종 31년, 甲午)에 박부인의 상을 당해서는 삼년상을 마칠 때까지 초막에서 거처하였고, 재물에 대한 욕심 없이 곧고 깨끗함을 지켰으며, 식량이 자주 떨어져 곤궁한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절제된 마음가짐으로 동요됨이 없었다고 전해진다.
자손을 엄격하게 훈도하였으며, 비복들은 마을의 가난한 사람들을 마음을 다해서 돌보았으며, 세상이 갈수록 험악해지는 광경을 보신 공은 벼슬길로의 뜻을 접고 향리로 물러나와 풍파에서 벗어나 지내시다가 60이 되던 해 11월 15일에 세상을 떠나셨다.
김경한(金景漢) 선생은 곧 나의 아버님으로 1888년(고종 25, 戊子) 1월 11일에 태어나셨다. 어렸을 때부터 덕스러운 인품을 지니셨고, 나이 겨우 13세에 어머님(은진(恩津) 송씨, 1862(哲宗 13, 壬戌) 2월 2일 ~ 1900(高宗 37, 更子) 6월 29일, 享年 39세)의 상을 당했으나, 침착하고 엄숙하게 장례를 치루는 모습을 본 사람들은 이를 칭찬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고 전해진다. 또한 아버님의 상을 당해서도 상주로서의 역할에 소홀함이 없어 일절 근심을 남기지 않았다고 한다.
계모인 청주(淸州) 곽씨(1885(高宗 22, 乙酉) 6월 26일 ~ 1966(丙午) 9월 15일, 享年 82세)께도 극진히 효도를 다하였고, 동생들을 자애롭게 대하여 동기 간에 화락하게 지냈으며, 조상에 정성을 다하는 예법(禮法)을 숭상하는 집안으로 이끌었다. 1934년(甲戌) 7월 22일에 돌아가시니 선생의 享年 겨우 47세였다.
부인은 완산(完山) 이씨(이숙응)로 대사성(大司成) 이수만(李秀萬) 선생의 따님이고, 1885년(고종 22, 乙酉) 3월 23일에 태어나시고 1974년(甲寅) 3월 11일에 세상을 떠나시어 부군의 묘소에 합장하였다.
찬성부군 金泰淳 선생과 참판공 金永均 선생의 묘소에는 표석만 있고, 조부인 金斗鎭 선생의 묘소에는 석물을 세우면 후손에게 불길하다는 한 유명 지관의 조언 때문에 함께 석물을 세울 수가 없었으며, 돌아가신 아버님 金景漢 선생의 묘소에는 묘비가 없어 송구스러운 마음이 이를데 없었으나 각각 기록하기에는 힘이 부족하였다.
그런 연유로 삼가 우리 조상님들 행적의 대강을 한데 모아서 묘도에 세워 후손들에게 알리노니 이글이 후손들에게 무궁하게 전해지기를 바라노라.
6世孫 의동(儀東)이 삼가 글을 짓고 쓰다.
檀紀 4311년(西紀 1978년) 무오(戊午) 8월에 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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