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에도 시와 그림의 우아한 아취를 실용적 목적으로 이용하는 경우가 더러 있지만 전근대시기의 한시와 병풍은 미적 감상의 대상 말고도 그 실용적, 장식적 기능이 많았다. 병풍에 제사와 관련한 의례를 빡빡하게 적어 실무자들이 보고 익히게 한다든지 복잡한 성리학을 도형으로 그려 이해를 도우면서도 공간의 분할이나 시각의 정돈 등을 위한 장식적 효과를 꾀한 것 등이 그러하다. 어느 지역의 풍물과 인문 정보를 한시로 기록한다든지 놀이의 흥을 도우기 위해 한시 구절을 이용하는 것 등 그 예도 풍부하고 다양하다. 한시를 실용에 이용하는 것은 옛 시대 사람들이 수학 과정이나 과시를 준비하면서 한시를 많이 익혔을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한시를 사교나 행세, 혹은 의례의 일환으로 활용하여 평소 친숙하기 때문이다.
이 시는 지금 규장각에 소장된 『경상도명승도』 8폭 병풍 중 동래의 몰운대를 그린 그림에 화제로 쓰여 있는 것이다. 경상도 지역의 대표적인 명승 8곳을 가려 뽑고 그 명소의 자연 풍광과 함께 인문 고적을 소개한 것인데, 첫 작품 「만하정(挽河亭)」에 나오는 ‘통제영을 옮겨 세 바다를 관장하니 지금까지 태평 속에 300년이 지났네[仍徒營府管三陲, 至今昇平三百載]’ 등의 시구를 통해 볼 때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어름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 병풍에는 통영의 만하정(挽河亭), 안동의 영호루(映湖樓), 합천의 해인사(海印寺), 진주의 촉석루(矗石樓), 거창의 수승대(搜勝臺), 동래의 몰운대(沒雲臺), 밀양의 영남루(嶺南樓), 포항의 내연산(內延山)을 산수화 풍으로 그려 놓고, 그림의 상면에는 행초서로 시를 적어 놓았는데 서유봉(徐有鳳), 이선조(李善祚), 윤필관(尹必觀), 윤효관(尹傚觀), 김두갑(金斗甲), 최영식(崔映湜) 등이 쓴 시가 붙어 있다. 필체를 볼 때 시를 지은 사람이 직접 글씨도 쓴 것으로 추정된다. 서유봉은 만하정과 해인사, 윤필관은 촉석루와 수승대 2편에 각각 시를 남겼는데 이들이 지방의 인사라 그런지 행적을 알기 어렵다.
이 그림 병풍을 펼치면 먼저 아하! 조선 말기에 경상도 명승으로 이 8곳을 꼽았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무엇이 그려져 있는지 보게 되는데 그림의 제목에 보이듯이 누대가 승경의 꽃이구나, 하는 생각을 절로 하게 된다. 또 상단에 적힌 시를 읽어 보면 그 승경에 대해 어떤 정보를 중요하게 생각했는지를 알 수 있다. 병풍 전체에 대해서는 다른 지면에서 논하기로 하고 우선 여기서는 몰운대 그림 한 폭과 시를 감상하며 이런 병풍과 한시의 기능에 대해 생각해 본다.
먼저 그림을 보면 두 명의 유객이 바다로 쑥 들어간 벼랑 끝에 서서 장관을 앞에 두고 서로 마주 보며 관람 소감을 나누는 모습이 보인다. 소나무의 상단이 꺾인 것이나 벼랑의 구도와 필법은 명나라 심주의 「청려장 짚고 멀리 바라보다[杖藜遠眺]」라는 작품을 떠올리게 할 만큼 문인화풍을 띠고 있다. 앞에 보이는 군도(群島)에는 ‘구름에 잠긴다’는 몰운대(沒雲臺)라는 명칭답게 섬의 허리 부분에 구름이 날고 그 사이로 나룻배 한 척이 다가온다. 섬 너머로는 안개에 반쯤 가린 나룻배 두 척의 돛을 그려 멀리 대양이 펼쳐져 있음을 보였다.
▶ 작자 미상, 『경상도명승도』, 몰운대 폭(136×38)의 부분, 서울대 규장각 소장.
그림과 시 중 어느 것이 먼저 제작되었는지 아니면 각각 따로 주문한 것인지 분명히 알 수는 없지만, 그림에서 구름과 섬이 어우러진 풍광을 감상하는데 주안을 두었다면 시에서는 그 풍경도 풍경이지만 몰운대에서 전사한 이순신의 부장 녹도 만호(鹿島萬戶) 정운(鄭運)을 추억하며, 아름다운 강산과 태평을 누리는 현재의 모습을 오래전 임진란의 상흔과 대비시키고 있다. 몰운대에서 봐야 할 것이 풍경 외에도 아픈 역사가 있음을 말하여 보는 이에게 풍부한 교양 정보를 정리하여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4구에서 사용된 『노자』에 나오는 닭과 개 소리가 들릴 만큼 마을이 인접해 있다는 말은 임진년의 참상을 겪고 나서 이제 다시 평화를 회복하였다는 뜻이다. 5구의 ‘자루 모양의 지형[坤之柄]’은 『주역』 「설괘전(說卦傳)」에서 인용한 말로 몰운대의 지형을 말하고 있다. 몰운대가 전체적으로 산으로 되어 있는데 인두의 모양인데다가 앞에 보이는 섬 쪽으로 자루처럼 지형이 쑥 튀어나왔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6구의 ‘용서(舂鋤)’는 백로가 물을 건널 때 머리를 까닥거리는 모습이 마치 절구질이나 호미질을 연상시켜 붙여진 말인데, 몰운대에서 선계와 같은 풍경을 감상하느라 유람객이 목을 빼어 이리저리 보는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재미나는 표현이다.
임란 때 의병을 일으키기도 한 안방준(安邦俊)은 「부산기사(釜山記事)」를 엮어, 임진왜란 때 국토를 회복한 것은 호남을 보전하였기 때문이고 호남을 보전한 것은 이순신의 해전 덕택이며 이순신의 해전은 녹도 만호 정운이 앞장서서 힘써 싸웠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임진년 9월 부산진의 왜군을 공격할 때, 정운이 선봉으로 몰운대를 지나다가 마음이 떨리고 자신의 이름 ‘운(運)’과 몰운대의 ‘운(雲)’이 음이 같으므로 여기서 자신이 죽을 것을 예감하고 자신이 죽더라도 적에게 죽음을 알리지 말라고 하였다 한다. 정운이 전사하자 이순신은 자신의 팔이 잘렸다고 말하였고 원균의 참소가 마침내 행해졌다고 하였다. 삼국지에 나오는 낙봉파(落鳳波)에서 죽은 봉추(鳳雛) 방통(龐統)의 일화와 같은 이 이야기는 원경하(元景夏)의 『창하집(蒼霞集)』 「녹도만호정공묘지명(鹿島萬戶鄭公墓誌銘)」과 윤휴(尹鑴)의 『백호전서』 「제장전(諸將傳)」 등에 나온다.
1834년에 이시눌(李時訥)이 그린 『임진전란도』를 보면 임진란 초기의 부산진과 다대포진에서의 처절한 항전을 중심으로 그리면서도 왼쪽 아래 몰운대가 그려져 있고 그 곳에 ‘정만호운비(鄭萬戶運碑)’가 비각 안에 큼직하게 서 있으며, 정운이 수행한 부하 2명과 함께 서 있고 그 옆에는 정운이 타고 온 녹도 전선까지 그려 놓아 당시 사람들의 정운에 대한 존모와 인지도를 헤아릴 수 있다. 순조 때 군수를 지낸 박재형(朴齊珩)의 시 「몰운대」는 그런 애정을 잘 보여준다.
몰운대 아래서 구름에 묻혀 슬프구나 沒雲臺下沒雲悲 물속의 물고기와 용도 그 한을 아는 듯 水底魚龍恨亦知 구름에 묻힌다 해도 이름은 묻히지 않아 雲可沒兮名不沒 몰운대 위에 정공의 비 서 있구나 沒雲臺上鄭公碑 『조야시선(朝野詩選)』 권2
앞에서 말한 운(雲)과 운(運)의 참을 전제로 시상을 전개하였는데 간결하면서도 리듬감 있는 언어를 구사한 재치가 넘친다. 몸은 구름에 묻혔지만 이름은 묻히지 않아 비석에 남아 있다는 진술이 앞에서 소개한 병풍의 시와 잘 연결된다. 몰운대에는 지금도 정운의 순의비가 서 있다.
병풍의 시는 이러한 한시 전통을 잘 알고, 보이는 풍경과 보이지 않는 역사를 직조하여 그림의 깊이를 더하고 있다. 병풍에 그려 넣은 명승지를 두루 다녀본 사람에게는 와유(臥遊)의 자료가 되고 아직 가 보지 못한 사람에게는 명승지 가이드의 역할도 하는 셈이다. 아울러 위세품이나 장식적 기능도 겸하였을 것이다.
이렇듯이 한시에는 중요한 정보를 전달하는 실용적 목적으로 쓴 시들이 많은데, 그런 경우에도 우아한 언어를 사용하여 보는 이의 감정에 공명하고 기억에 각인하는 힘을 높이려고 한 의도를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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