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孝明世子 令書의 국역✤
한국 고전 번역원의 노 성두 선생님의 큰 도움으로 여기에 그 해석을 담았다.
令正憲大夫水原府留守兼揔理使 金逌根書
✶효명세자의 대리청정 1827년(순조 27년) 2월부터 1830년(순조 30년) 5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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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역1:
왕세자(=孝明世子)는 아래와 같이 이르노라. 한편으로
保障[보루와 장벽, 즉 국방]의 중대한 일을 당하여, 참으로
이 일을 통제할 사람이 모름지기 필요한데, 八座(육판서와 좌우참찬)에서 명망과 실력이 높은 사람을 선발하여, 모든 일을 처리하는 자리에 앉혀
王世子若曰 一面當保障之重 正須彈壓 之人八座㨂望實之隆俾 居揔 28
왕세자약왈일면당보장지중정수탄압지인팔좌동망실지륭비 거총
국역2:
처리하는 자리에 앉혀 특별히 외직으로 보내는 전례에 따라, 이에 留守의 직임을 주노라. 惟 생각하건대 경은 대대로 충정이 매우 도탑고 신실하고, 집안에 시례(詩禮)의 학문을 전하였으며,
처지가
理之地特用補外之例爰畀留後之任惟卿世篤忠貞家傳詩禮處地 27
리지지특용보외지례원비류후지임유경세독충정가전시례처지
국역 3:
다른 사람보다 정분이 유달리 두터워 국가와
기쁨과 근심을 함께 하였으니, 고아한 명망으로 세상에서
추앙하고, 조정에서 원대한 계책을 논하는데 참여하였다 .廟높은 벼슬에 올라서도 항상
與他自別同休戚於國家雅望爲世所推叅訏 謨於廊廟 躋崇秩而常 27
여타자별동휴척어국가아망위세소추참우 모어랑묘 제숭질이상
국역 4:
경계하여 삼가 조심하여 겸손하고 검약함은 곧 규범을 이루었으며䂓 ,예리한 기량을 안고 한꺼번에 어려운 업무를 맡았으니 문장 짓는 일이야 하찮은 일이었다. 事
懷兢惕謙約卽其成䂓抱利器而合試錯盤文章乃是餘事蜚英 25
회긍척겸약즉기성규포리기이합시착반문장내시여사비영
국역 5:
이른 나이에 이름을 날려 임금을 도와 두루 역임한 직책이 이미 많고 벼슬길에서 자취를 감추되 銓衡<= 인재 뽑음>을 돕는 일은 사임되어서야 그만두었다乃
早歲贊黼黻而歷敡者旣多斂跡名途佐銓衡則缷免而乃已向 25
조세찬보불이력이자기다렴적명도좌전형즉사면이내이향
국역 6:
지난 번 西藩<평안도 관찰사=서백(西伯)>의 해임을 허락한 것은
사사로운 사정을 따랐을 뿐이고, 中權< =中軍>의 직임을 애써 사양한 경우는 특별히 예(禮)로써 부리는 의리를 헤아린 것이었다. 義
也西藩之許解不過曲循其私至於中權之力 辭 特推禮使之義 睠玆 27
야서번지허해불과곡순기사지어중권지력 사 특추례사지의 권자
국역 7:
돌아보건대, 이 華城=<=水原>은 감싸 호위하는 땅이니, 곧 나의 선왕조<=< 정조>께서 처음 세우신 터전으로, 仙寢<= 사도세자 릉, 융릉>을 호위하고 도우니, 神京<=서울. 한양>의 체모가 四都<개성(開城)·강화(江華)·수원(水原)·광주(廣州)임>의
華城拱護之地卽我 先朝經始之基衛 仚寢 而翼神京軆貌 爲四 25
화성공호지지즉아 선조경시지기위 선침 이익신경체모 위사
국역 8:
으뜸이 되었으며, 畿甸<=京畿>을 당겨서 지으니 巨鎭<군사진영>(軍事鎭營)>의 管轄<=권한에 의하여 거느려 다스림> 이 三路의 <삼도(三道)와 같은 말. 보통 충청도와 전라도와 경상도> 요충지에 자리 잡았다. 衝 산
천초목에는 아직도 은하수의 광채(=제왕의 덕)가 덮여 있고,
都之冠控畿甸而作巨鎭管轄處三路之衝山 川草木尙被 雲漢之 도지관공기전이작거진관할처삼로지충산 천초목상피 운한지 26
국역 9:
성곽과 망루는 오래도록 유지되었고, 위험한 일에도 미리 대비를 하였다. 備
原廟는 月遊<= 정조의 현륭원 참배>를 받드는 곳이니 漢나라 西京의 瞻依<= 한나라 고조의 능침참배>가
輝城郭樓譙永鞏陰雨之備原廟奉月遊之所漢西京之瞻依 24
휘성곽루초영공음우지비원묘봉월유지소한서경지첨의
국역 10 :
이에 간직되고, 高山은 天作이라는 詩에서 찬미하였으니 周나라 東郊가 편히 다스려짐이 가장 중요하다 .이에 경에게 수원부 유수
斯存高山頌天作之詩周東郊之保釐㝡重玆 授卿以水原府留 25
사존고산송천작지시주동교지보리최중자 수경이수원부류
국역 11 :
겸 총리를 제수하여, 경으로 하여금 삼가 그 명을 따라 임지에 가서 신중히 직책을 맡게 하노니, 財賦<=재화와 부세> 를 수리하고 軍民을
위로하여 三輔<=경기 지방>의 방어를 소홀히 하지 말고,
守兼揔理使卿其祗服厥命往愼乃司繕財 賦而撫軍民 岡忽三輔 26
수겸총리사경기지복궐명왕신내사선재 부이무군민 강홀삼보
국역 12 :
城池를 수리하고 군졸과 수레를 선발하여 임금이 맡긴
중임<重任>을 수행하라. 楨幹< =중심인물, 핵심인물>으로서 알려진 명예로야 어찌 유독
之防禦修城池而簡卒乘克軆重宸之委毗楨幹播譽豈專
23
지방어수성지이간졸승극체중신지위비정간파예기전
국역 13 :
申伯의 아름다운 자취만 있겠는가,蹟 裘帶로 坐鎭하는 것은
의당 叔子(羊祜)의 남긴 풍도를 따라야 할 것이다.風 이는 나의 고굉(股肱)같은 사람이니 위엄과 명망이 없으면 누가 진정시킬 것
이며,
申伯之美蹟裘帶坐鎭宜追叔子之遺風是吾 股肱非威望孰 能鎭 26
신백지미적구대좌진의추숙자지유풍시오 고굉비위망숙 능진
申伯 주 선왕(周宣王)의 외숙(外叔)《시경(詩經)》 대아(大雅) 숭고(崧高)에 나오는 주(周) 나라 인물로 주나라의 국가의 기둥이 되는 인재(=宰輔)
裘帶 존귀한 신분 완대경구(緩帶輕裘)의 약칭임. 《진서(晉書)》양호전(羊祜傳)에 “군중에 있을 적에도 완대와 경구로 지내며 몸에 갑옷을 걸치지 않는다.”하였다.
坐鎭 가만히 앉아서 진정
羊祜 진(晉) 나라 명장. 전진(戰陣) 속에서 치밀하게 작전에 대처하면서도 한가롭고 여유로운 모습을 보여 주는 장수의 풍도(風度)
정남 대장군(征南大將軍)으로 대군을 거느릴 적에, 갑옷 대신에 가벼운 옷을 입고 허리띠를 느슨하게 하고 다녔으며[輕裘緩帶] 시위(侍衛) 군사도 10여 명을 넘지 않았다는 고사가 있다. 《晉書 卷34 羊祜列傳》
股肱 다리와 팔. 임금이 가장 믿고 중하게 여기는 신하
국역 14 :
肺腑<=친밀한 관계> 같은 사람에게 맡겼으니 저 가려 뽑은 것이 어찌 공연히 한 일이겠는가.哉 어찌 散職<=품계의 이름만 있고 일정한 직무가 없는 관직>을 에 두고 閑職<=중요하지 아니한 직위나 직무> 에 두도록 해서야 되겠는가. 바깥일을 보고 안 일도 똑같이 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也託以肺腑伊揀選豈徒然哉何可使置散而 投閑盖欲其視 外而 26
야탁이폐부이간선기도연재하가사치산이 투한개욕기시 외이
국역 15 :
청신(淸慎)<=청렴하고, 신중함>하고 염간(恬簡)< =편안하고 간결함>한 점은 집안을 잘 꾸리는 고아한 풍모에서 이미 드러나고, 보호하고 회유하는 점은 울타리를 만드는 훌륭한 공적에서 더욱 부지런하였다.
猶內淸愼恬簡已著克家之雅規保輯懷綏益 勉作屛之嘉績 24
유내청신념간이저극가지아규보집회수익 면작병지가적
국역 16 :
아! 사시마다 향기로운 제사<=芬苾분필>하는 예를 받들어 나의 그리워하는 마음을 위로하라,思 한 고을<一府=수원>에서 수호하는 위엄을 굳건히 하는 것은 경의
錀 : 鑰의 오류. *훌륭한 공적에서 더욱 부지런하였다
於戱 四時奉芬苾之禮慰余羹墻之思一府 壯 鎻鑰之威藉卿 24
어희 사시봉분필지례위여갱장지사일부 장 쇄약지위자경
羹墻之思: 조상을 사모하는 그리움. 사후(死後)에 간절히 흠모하는 마음
갱장(羹墻) : 앙모(仰慕)의 뜻. 요(堯)임금이 죽자 순(舜)임금이 3년 동안 앙모하여 담장[墻]에서도 요임금을 보고 국[羹]그릇에서도 요임금을 보았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
鎻鑰之威: 요충지를 지키는 위엄. 쇄약(鎖鑰) : 문의 자물쇠. 즉 중요한 곳을 지키는 것.
방비 태세 .문단속. 요충지를 지킴.
《송사(宋史)》 구준전(寇準傳)에 "북문의 쇄약은 구준이 아니면 안 된다." 하였다.북문 쇄약(北門鎖鑰) : 북방의 수어(守禦)를 뜻한다. 송(宋)나라 구준(寇準)이 대명부(大名府)를 맡아 지킬 때에 요(遼)나라 사신이 와서 구준에게 ‘상공(相公)은 명망이 높은데 어찌하여 중서(中書)에 있지 않고 여기 있느냐?" 하니, 구준이 "임금이 북문의 쇄약은 구준이 아니면 안 된다 하시기 때문이다." 하였다. 《송사(宋史)》 구준전(寇準傳). 쇄약(鎖鑰) : 국가의 중책을 뜻한다.
국역 17 :
鈴轄 <=관할>이 하는 책략의 덕분이다.
略그러므로 이에 令示하니, 의당 잘 알 것이라 생각하노라.
鈴轄之略 故玆令示想宜知悉 12
영할지략 고자령시상의지실 12
국역 18 : 道光 七年:1827년 순조 27년
✶ 道光: 청(淸) 선종(宣宗)의 연호(1821~1850)
道光 七年 九月 十五日 9
도광 칠년 구월 십오일
✶ 道光: 청(淸) 선종(宣宗)의 연호(1821~1850)
번호는 영서 원본의 번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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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고궁 박물관 효종 특별전 전시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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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세자(=孝明世子)는 아래와 같이 이르노라. 한편으로
保障[보루와 장벽, 즉 국방]의 중대한 일을 당하여, 참으로
이 일을 통제할 사람이 모름지기 필요한데, 八座(육판서와 좌우참찬)에서 명망과 실력이 높은 사람을 선발하여, 모든 일을 처리하는 자리에 앉혀 처리하는 자리에 앉혀 특별히 외직으로 보내는 전례에 따라,
이에 留守의 직임을 주노라.
생각하건대 경은 대대로 충정이 매우 도탑고 신실하고, 집안에 시례(詩禮)의 학문을 전하였으며,
처지가 다른 사람보다 정분이 유달리 두터워 국가와 기쁨과 근심을 함께 하였으니,
고아한 명망으로 세상에서 추앙하고, 조정에서 원대한 계책을 논하는데 참여하였다 .
높은 벼슬에 올라서도 항상 경계하여 삼가 조심하여 겸손하고 검약함은 곧 규범을 이루었으며,
예리한 기량을 안고 한꺼번에 어려운 업무를 맡았으니 문장 짓는 일이야 하찮은 일이었다.
이른 나이에 이름을 날려 임금을 도와 두루 역임한 직책이 이미 많고 벼슬길에서 자취를 감추되
銓衡<= 인재 뽑음>을 돕는 일은 사임되어서야 그만두었다.
지난 번 西藩<평안도 관찰사>의 해임을 허락한 것은
사사로운 사정을 따랐을 뿐이고, 中權의 직임을 애써 사양한 경우는 특별히 예(禮)로써 부리는 의리를 헤아린 것이었다.
돌아보건대, 이 華城=<=水原>은 감싸 호위하는 땅이니, 곧 나의 선왕조<=< 정조>께서 처음 세우신 터 전 으로, 仙寢<= 사도세자 릉, 융릉>을 호위하고 도우니, 神京<=서울. 한양>의 체모가 四都<개성(開城)·강화(江華)·수원(水原)·광주(廣州)임>의으뜸이 되었으며, 畿甸<=京畿>을 당겨서 지으니
巨鎭<군사진영>(軍事鎭營)>의 管轄이 三路의 요충지에 자리 잡았다.
산천초목에는 아직도 은하수의 광채(=제왕의 덕)가 덮여 있고,
성곽과 망루는 오래도록 유지되었고, 위험한 일에도 미리 대비를 하였다.
原廟는 月遊<= 정조의 현륭원 참배>를 받드는 곳이니 漢나라 西京의 瞻依<= 한나라 고조의 능침참배가
이에 간직되고, 高山은 天作이라는 詩에서 찬미하였으니 周나라 東郊가 편히 다스려짐이 가장 중요하다 .
이에 경에게 수원부 유수 겸 총리를 제수하여,
경으로 하여금 삼가 그 명을 따라 임지에 가서 신중히 직책을 맡게 하노니, 財賦를 수리하고 軍民을
위로하여 三輔<=경기 지방>의 방어를 소홀히 하지 말고,
城池를 수리하고 군졸과 수레를 선발하여 임금이 맡긴
중임<重任>을 수행하라. 楨幹< =중심인물, 핵심인물>으로서 알려진 명예로야 어찌
유독 申伯의 아름다운 자취만 있겠는가,蹟 裘帶로 坐鎭하는 것은 의당 叔子(羊祜)의 남긴 풍도를 따라야 할 것이다
이는 나의 股肱같은 사람이니 위엄과 명망이 없으면 누가 진정시킬 것
이며, 肺腑같은 사람에게 맡겼으니 저 가려 뽑은 것이 어찌 공연히 한 일이겠는가. 어찌 散職에
두고 閑職에 두도록 해서야 되겠는가. 바깥일을 보고 안 일도 똑같이 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청신(淸慎)<=청렴하고, 신중함>하고 염간(恬簡)< =편안하고 간결함>한 점은 집안을 잘 꾸리는 고아한 풍모에서 이미 드러나고, 보호하고 회유하는 점은 울타리를 만드는 훌륭한 공적에서 더욱 부지런하였다.
아! 사시마다 향기로운 제사<=芬苾분필>하는 예를 받들어 나의 그리워하는 마음을 위로하라,
한 고을<一府=수원>에서 수호하는 위엄을 굳건히 하는 것은 경의 鈴轄 <=관할>이 하는 책략의 덕분이다.
그러므로 이에 令示하니, 의당 잘 알 것이라 생각하노라.
道光 七年:1827년 순조 27년
✶ 道光: 청(淸) 선종(宣宗)의 연호(1821~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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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효명 > 특별 전시회-- 국립고궁 박물관-- 효명 세자가 내린 영서<1809-1830> (0) | 2019.07.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