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안동 가문 시 모음/몽와 김창집의 시 모음

입춘 날에 ( 김창집. 김창업 ). 입춘일

백촌거사 2008. 2. 4. 15:10

 

 

立春日 입춘일 ---------------------

 

 

 

                                                                                     김창집(金昌集)

 

                                                                         1648년(인조 26)-1722년(경종 2)

 

 

               입춘 날에

 

 

旅館居然見立。 여관거연견입춘

思歸轉覺客愁。 사귀전각객수신

頻招譯舌探消息。 빈초역설탐소식

幾日應爲上馬。 기일응위상마인

                                << 몽와집권지삼(夢窩集卷之三) 연행훈지록(燕行塤篪錄에서)>>

풀이

타관에서 아늑히 입춘 날 맞으니

고향 생각 불현듯 그리움 새록새록

역관을 자주 불러 소식을 묻는구나.

몇 날을 말 위에서 보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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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居然 거연: 편안히. 조용한 마음. • 轉覺 전각 : 불현듯 깨달음.

• 客愁 객수 : 여행 중 일어나는 수심. • 頻招 빈초 : 자주 부르는 것.頻 자주 빈.

招 부를 초.•譯舌 역설 : 통역관 • 應爲 응위 :마땅히 응함 • 上馬 상마: 말을 타는 일.

감상이해 ---------------------------------------------------

낯선 땅에서 맞이하는 입춘 날에 불현듯 떠오르는 고향 생각의 그리움을 담은 시이다.

<여관>. <객>의 시어는 낯선 땅에 있음을 <사귀>. <객수> 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의 표현이다. 3 연에서 역관을 자주 불러 물어보는 것은 고향 생각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을 담고 있는 표현이다. 4 연에서는 3 연 을 더욱 심화시킨 표현으로 이제는 말을 타고 여행하는 신분에서 벗어나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뜻이다.

봄의 시작을 알리는 입춘 날이 그리움을 담아내는 동기가 되어 있다.

이 시는 1712 년 사은겸동지사(謝恩兼冬至使)의 신분으로 연경(燕京)에서 머물고 있을 때 다음과 같은 동생의 시에 운자를 맞춰 화답한 시이다.

잠시라도 떠나 있는 고향 생각에 대한 그리움의 정이 동생과 같은 심정으로 담겨 있는 시이다. 화답하는 분위기에서 형제간의 오가는 은밀하고 포근한 정도 담겨 있는 듯하다.

동생의 시가 더욱 더 감각적인 서정이 담겨 있는 듯하고, 그리움이 더욱 구체적인 것 같다. 동풍 ( 봄바람 ) 호아 (蒿芽 (쑥))등의 봄 사물을 동원하여 자식들에 대한 그리움을 짙게 표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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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가재 김창업의 원운시(元韻詩)

 

客裏光陰已立。객리광음이입춘

東風歸思不禁。동풍귀사불금신

遙憐兒女靑門外。요련아녀청문외

挑得蒿芽憶遠。도득호아억원인

풀이

나그네로 세월은 이미 입춘이로다.

봄바람에 고향 생각 새록새록 떠 오고

동쪽 멀리 아이들 생각 간절히 그리워라

돋아난 쑥 향기 그리움 더 솟구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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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燕行塤篪錄<연행훈지록>

 

1712년 11월부터 1713년 3월까지 사은겸동지사 (謝恩兼冬至使)로 연경(燕京)에 다녀올 때

 

동생 김창업(金昌業)도 동행하였다. 이때 형제간에 수창(酬唱)한 시88題를 모은 시집이다.

 

권두에 1720년에 김창흡(金昌翕)이 지은 서(序)가 있다. 그 뒤에 숙종(肅宗)이 이 사행(使

 

行)을 보내면서 지어준 〈어제신장(御製贐章)〉 2수와 이이명(李頤命)이 1721년에 지은

 

발 (跋)이 있다. 내용은 여정(旅程)에서의 감회(感懷)를 읊은 시가 대부분이고, 부친 김수항

 

金壽恒이 1673년에 사은사(謝恩使)로 다녀왔을 때 지은 시에 차운(次韻)한 작품도 많다. 또

 

권미에 1713년에 이시록 (詩錄)을 처음 보고 이이명(李頤命)이 지었던 발 (跋)이 실려 있다.

 

                                                                            < 한국고전 번역원 자료에서 인용 >

지은이 소개 -----------------------------------

김 창집 (金昌集)

1648년(인조 26)--1722년(경종 2) 

자: 여성(汝成) 아호: 몽와(夢窩) 시호: 충헌(忠獻) 

임인 옥사(壬寅獄事)로 죽은 노론(老論) 사대신(四大臣)의 한 사람

노론사대신 :김창집(金昌集)ㆍ이건명(李健命)ㆍ이이명(李頤命)ㆍ조태채(趙泰采)

 

▶1722 년 임인 4 월 18 일의 조선 왕조 실록의 기록 ---------

 

1. 조태구(趙泰耉)·최석항(崔錫恒)이 차자(箚子)를 올려 김창집(金昌集)·이이명(李頤命)에게

 

 

사사(賜死)를 명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2. 김창집의 자(字)는 여성(汝成)인데 본관(本貫)은 안동(安東)이다. 아버지 김수항(金壽恒)

 

 

은 숙종(肅宗)을 보좌하여 영의정이 되었었는데,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과 함께 참

 

 

소(讒訴)를 받고 죽었다. 시호(諡號)는 충헌(忠獻) 이다.

 

 

 

3.김창집은 침착하고 굳세어 대절(大節)이 있었다. 젊어서 을과(乙科)로 급제(及第)하여 숙

 

 

종 말년에 영의정에 임명되었다. 경종(景宗) 원년에 대신(大臣)들이 저사(儲嗣)를 세우려고

 

의논할 적에 김창집을 시민당(時敏堂)에서 불러 보았는데, 그 자리에서 대비(大妃)에게 아

 

 

뢰어 국본(國本)을 정할 것을 청하니, 경종(景宗)이 허락하였다. 김창집이 물러나와 합문(閤

 

 

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임금이 다시 김창집을 불러 안탁(案卓) 위에 놓여져 있는 봉

 

 

서(封書)를 가리키면서 이르기를,

 

“이것이 대비(大妃)의 휘지(徽旨)이다.”

 

하고, 어필(御筆)로 연잉군(延礽君)이라고 써서 여러 신하들에게 보였는데, 김창집이 눈물을

 

 

흘리면서 드디어 정책(定策)하고 연잉군을 세워 세제(世弟)로 삼으니, 나라 사람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4.김창집이 이에 충문공(忠文公) 이이명(李頤命), 충익공(忠翼公) 조태채(趙泰采), 충민공(忠

 

 

愍公) 이건명(李健命) 등과 차자(箚子)를 올려 왕세제(王世弟)에게 명하여 국정(國政)을 대리

 

 

(代理)하게 할 것을 청하였다.

 

5.그런데 조태구(趙泰耉)가 은밀히 환관(宦官) 박상검(朴尙儉)과 결탁하여 몰래 선인문(宣仁

 

 

門)으로 들어가 대리시키게 하는 것을 극력 저지하였다. 12월에 박상검이 용사(用事)하여

 

 

김창집을 거제부(巨濟府)에 안치시켰다. 다음해 3월에는 무옥(誣獄)이 일어났는데, 김창집이

 

 

체포되어 성주(星州)에 이르자 사사(賜死)하라는 명이 있게 되었다.

 

 

김창집이 종자(從子)인 김신겸(金信謙)을 돌아보면서 말하기를,

 

 

“내가 세제(世弟)의 안위(安危)를 알 수가 없으니, 이것이 한이 될 뿐이다.

 

 

 

<吾不知世弟安危, 此爲恨耳>

 

 

하고, 뜰 아래로 내려가 북쪽을 향하여 네 번 절하였다.

 

 

6. 그리고 나서 전지(傳旨)를 들은 뒤 또 네 번 절하고 드디어 사명(死命)을 받았는데, 이

 

 

때의 나이가 75세였다. 영종(英宗) 원년에 관작(官爵)을 회복시키고 충헌(忠獻)이란 시호(諡

 

 

號)를 내렸으며, 강가에 사당(祠堂)을 세우고 제사지냈다. 정조(正祖) 3년에 특별히 영종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하게 하였다.                             <<조선왕조 실록 인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