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안동 가문 시 모음/몽와 김창집의 시 모음

김 숭겸의 哭從兄 好謙 歸櫬 (곡 종형 호겸 귀츤)

백촌거사 2010. 11. 12. 23:27

 

哭從兄 好謙 歸櫬 (곡 종형 호겸 귀츤)---------

명정은 비에 젖고

金 崇謙 (김숭겸)

1682-1700 (숙종8-숙종26)

字: 君山‚ 號: 觀復菴‚

父: 昌協‚ 母: 延安 李氏

 不復見吾兄。孤舟素幔輕。

세상에서 다시 못 뵐 내 형이구나

외론 배에 흰 장막만 가벼이 날뿐.

 何心慰諸父。一慟盡平生。

어떻게 아버님들 위로 드릴까.

한 번 슬픔 평생을 다하실 텐데

 滄海游如昨。殘篇骨欲驚。

푸른 바다 노닐던 일 어제 같은 듯

남긴 시문 뼛속까지 스미려 하네.

 西風江水永。暮雨濕銘旌。

서풍 따라 강물은 깊이 흐르고

저녁 비에 형의 명정 축축이 젖네.

<觀復菴詩稿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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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용이해> ---------------------------------------

<1.2 행>-- 죽음으로 돌아온 사촌 형--- 직핍의 서정- 素幔- 슬픔의 토로

            타향에서 죽어 배를 타고 관에 넣어 온 모습

< 3.4 행>-- 諸父를 걱정하는 마음

< 5.6 행>-- 사촌 형에 대한 아련한 추억--- 그리움-- 감정의 절정

            함께 江都<지금의 강화(江華)>에서 노닐던 추억

< 7.8행>--- 형의 명정이 젖는 쓸쓸한 모습

주제: 사촌 형에 대한 통곡과 그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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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상이해>-----------------------------------------------

호겸, 숭겸 두 분 모두가 문곡의 손자님들이시다. 나이는 한 살 차이 서로가 먼 앞날의 꿈을 그리며 정겨운 우정을 나누었으리라. 죽취 제겸 형님처럼  정치적인 사화에 빠져들지 않고 서로 가문에 대한 긍지와 자랑으로 사촌 간의 혈육의 정을 나누었으리라. 백부가 되시는

金昌集이 留守로 있는 江都<= 현재 강화>에서 자주 만나  넓은 바다를  바라보면서 호쾌한 기상을 세우기도 했으리라. 항상 맑은 성품으로 주위의 호감을 주었던 한 살 위의 형님이

 강화도에 머물러 있다가 병이 들어 19 살 나이에 저 세상을 떠난 것이다. 하얀 장막에 덮여서 고향으로 돌아오는 그 형님의 모습에 온 세상이 적막해진다. 이제는 다시 형님을 부르지 못한다는 가슴이 아픈 통곡소리 조용한 강물에 넘쳐흐르고 있다. 저리도 젊은 나이에 형님을 버리다니 . 18 살이 된  숭겸에게 깊은 충격을  준 것이다. 저녁 비가 명정을 적시고 있다. 흐르는 강물도  깊은  슬픔을 담아 흐르는 것 같다. 고향을 떠나 객지에서 관에 담겨  다시 고향 땅에 돌아온 사촌 형의 슬픈 만가 소리가 귀에 쟁쟁하게 울려온다. 한없이 울고 있다. 서로가 죽음을 약속이나 한 듯   한 살 뒤늦게 태어난 지은이도 19 살 젊은 나이에 그 사촌 형을 따라 이 세상을 하직하였다. 은빛 물결처럼 빛나는 많은 시문을 남긴 숭겸의 잔잔한 숨소리가 사촌 형님을 영결하고 있는 이 시에서도 반짝 빛나고 있다.

  사촌 간에 오갔던 깊은 정이 넘쳐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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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휘이해> ---------------------------

從兄 아버지와 한 항렬(行列)의 당내친(堂內至親)

      堂內至親 ①팔촌 이내(以內)의 친척(親戚) ②가장 가까운 일가(一家)

 호겸과 숭겸은 모두 문곡의 손자들이며 사촌 형제간이다. 숭겸보다 바로 한 살 위였다.

 호겸의 부친은 죽취 제겸의 아버님이신  몽와 창집이고, 죽취는 호겸의 친 형님이다. 숭겸은 문곡의  둘째아들인 창협의 오직 하나뿐인 아드님이시다.

호겸이 문곡의 제일 큰 형님이신 수증의 둘째 아들이신 창숙 댁으로 양자로 가게 되어 6 촌의 사이가 되었지만 서로 나이도 비슷하고 하여 서로 정감이 잘 오고 간 듯하다.

 같은 핏줄의 친 형제간은 아니었어도 마음 속 깊이 가슴에 두었던 형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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歸櫬    타향에서 죽어 고향의 선산으로 돌아가는 것을 말한다.

          널(사람의 시체를 넣는 상자 오동나무로 관을 사용) <츤>자 이다. 관.

※ 글의 흐름으로 보아 사촌 형은 강화도에서 객사한 듯하다. 그 당시 부친이

강화도 유수로 계셨기에 둘은 자주 강화도를 찾아 정담을 나눈 듯하다.  김숭겸은 실제로

1699 년 <숙종 25 년>에 아버님을 모시고 백부가 계신 江都에 다녀온 일이 있다.

시에서 滄海는 강화도의 넓은 바다이다. 호겸과 그 곳에서 만나 서로 사촌간의 우정을 나누었을 것이다.

백륙애음(百六哀吟)을 쓴 김신겸은 강화<沁都>에서 병사했다고 적고 있다.

彦明 兄

名好謙 竹醉公弟 愷悌 不忮十九病卒 沁都 最愛余

여츤(旅櫬)   객사자의 영구. 잠시 관에 담아 옮기는 일.

반츤(反櫬) : 외지(外地)에서 죽은 사람을 고향으로 반장(返葬)하는 것이다

츤궁(櫬宮)- 천자의 관

* 객지에서 세상 떠난 사람이 어찌 없으랴만 / 雖有客

* 아득한 타향에서 고향 길 찾는 영구(靈柩) / 旅發天涯

* 외로이 강변에 임시로 묻히네 / 孤寄江濆

* 하늘 끝 쓸쓸히 관(棺)에 실려 오다니 / 天涯返孤

숙종 24 1698  11월, 江華 留守가 되다. -몸와 김창집

숙종 25 1699  3월, 부친을 모시고 백부 金昌集이 留守로 있는 江都에 다녀오다.

숙종 25 1699 기묘 5 월 9 일  향년 19세로 요절.-- 김호겸의 죽음. 병사.


素幔

막 만 ㉠막 ㉡장막(帳幕)


* 지금 흰 장막 거느리고 / 秖今將素幔

* 흰 장막을 누가 돌아보겠는가 / 素幔人誰顧

* 펄럭이는 흰 장막 어찌 볼거나 / 那看素幔

* 흰 장막 빈소는 수양관에 차렸고 / 素幔首陽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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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가< 강화도에서 남양주 미호강으로 운구>에 펄럭이는 관을 덮은 흰천막<= 죽은 사촌형>을 바라보면서 이제는 볼 수가 없는 내 사촌형이로구나 하고 이렇게 슬픔을 토로하고 있다. 호겸의 묘자리는 평구역 근처에 있었기에 배로 옮겨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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諸父  아버지와 한 항렬(行列)의 당내친(堂內至親) 

 아버지의 형제들. 곧 백부, 중부, 숙부, 계부(伯.仲.叔.季). 부로(父老)한 동네에서 나이가 많은 남자 어른을 높여 이르는 말.들.

 이 글에서는 문곡의 아드님들을 말하고 있다. 물론 양자로 가게 된  집의   양부도 말하고 있다.

 19 살 젊은 나이에 요절했으니 아버님들에게는 얼마나 큰 마음의 아픔이실까.

*제부의 전범(典範)을 오롯이 간직한 분 / 諸父典刑在

*게다가 아저씨들 모두가 고위 관직 / 諸父方得輿

*공에게 절하기를 숙부 대하듯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 則不得不拜公猶諸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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滄海 ①넓고 큰 바다. 대해(大海) ②푸른 바다

 이  시에서는 사촌 형님과 함께 노닐던 강화( 江都= 沁州)도 바다를 말한다.

 김신겸의 <百六哀吟>의 시에도 다음처럼 강화도의 앞바다로 그려지고 있다.

淸標尙記沁州 乘海茫茫淚是 <沁州는 강화의 옛날 명칭이다. 12 살 차이인 사촌형님이다>


* 바다에는 채색 신기루 이뤄지고 / 滄海結綵蜃

* 푸른 바다라면 어찌 넓지 않으리요 / 滄海豈不闊

* 한 바다 아득아득 달조차 지려는데 / 滄海茫茫月欲沈

* 바다같이 깊은 정을 시 한수에 남기노라 / 滄海深情一首詩

* 넓은 바다 조각배에 작고 작은 이 몸 / 一帆滄海此身微

殘篇 남겨 놓은 향취를 남긴 책

 여기에서는 어떤 책을 말하기 보다는  서로 돈독한 우정을 나누어 갈 때 형과 주고받던 수많은 이야기들, 그리고 시문들 곧 형님의 모든 체취가 배어 있는 그리운 모습들을 하나의 남겨 놓은 책과 같은 것으로 표현하였다고 본다.   형님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이다.

틀림없이 사촌 형인 호겸도 많은 시문을 썼을 것이지만 불행스럽게 남겨진 시문이 없는 듯하여 무척이나 안타까웠다.


* 남은 글 십칠 편이 이 세상에 떨어졌네 / 十七殘篇此世零

* 묵은 책 읽고 나니 가을밤이 깊었구나 / 讀罷殘篇秋夜深

* 온종일 문을 닫고 책갈피만 뒤진다네 / 閉門終日檢殘篇

* 외로운 등불 낡은 책을 환하게 비추고 / 孤燈耿耿照殘篇

骨欲驚  뼛 속까지 놀라게 하려고 한다. 깊은 마음속에 사무쳐 오는 그리움을

         과장적인 표현으로 담고 있다. 그만큼 사촌 형의 모든 모습이 나를 경탄하게 한다는 의미이다.

*긴 바람이 말고삐를 쳐서 깜짝깜짝 놀래는데 / 長風掉鞅欲驚動

* 남쪽으로 가는 기러기 서리에 놀라네 / 南雁欲驚霜

* 북풍이 옷에 스며들어 뼈가 굳으려 한다

* 신선과 통하는 듯, 뼈가 홀짝 가벼워지네 / 通仙骨欲輕

* 시국 걱정에 뼈는 녹으려 하누나 / 憂時骨欲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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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風 서쪽에서 불어오는 바람. 하늬바람 서녘 바람. 가을바람

 일반적으로 서풍은 가을바람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 시에서는 그냥 서쪽에서 불어오는 쓸쓸한 바람인 듯하다.  호겸 사촌 형은 1699 년 숙종25 년 기묘 5 월 9 일에 향년 19 세로 세상을 떠나가신 것으로 기록이 되어 있다.  이 기록으로 보면 가을바람은 아닐 것이다.

 시간이 지난 뒤에 쓴 회고적인 시가 아닐까 하고 생각을 해 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다음 구절에 저녁비가 영정에 젖고 있다는 생생한 표현은 그 당시 바로 그 현장에서 목도하고 있는 사실감인 것 같아 그냥 서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으로 보았다.


* 더위 쫓아 빗방울 서늘해지니 / 西風鏖暑雨生凉

* 가을바람 옷깃에 사무치누나 / 西風吹客衣

* 한밤중 가을바람 흰 이슬 재촉하네 / 一夜西風白露催

* 어젯밤엔 불어오는 갈바람 속에 / 西風昨夜至

* 가을바람에 정원의 나무 우수수 낙엽 지고 / 西風庭樹鳴摵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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銘旌 :죽은 사람의 관직과 성씨 따위를 쓴 깃발 모양의 천이다

일정한 크기의 긴 천에 붉은 색 비단에 흰 글씨로 쓰며, 장사 지낼 때 상여 앞에서 들고 간 뒤에 널 위에 펴 묻는다. 돌아간 이의 영혼을 모시는 또 하나의 표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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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好謙과 崇謙  信謙 간의 관계 -----------文谷 壽恒의 손

                   증조            

                       광찬

          조    2촌

 수증(1)

수항(3)

        제 부     4촌

창숙(2)

2  촌

창집(1)

창협(2)

창업(4)

 

  6촌

호겸(1)

1681-1699 

4   촌

호겸(2) 종숙 댁으로 양자

  숭겸(1)

1682-1700

신겸(3)

1693~1738

 

 

好謙

( 1681숙종7년 신유 11 21 일-1699 숙종 25년 기묘 5 월 9 일  향년19세 )

  생부 昌集의 둘째 아들. 竹醉 濟謙의 아우

  자 언명(彦明) 증 이참(吏叅)

 부인 증 정부인(贈貞夫人) 용인 이씨( 龍仁李氏) 경신1680- 경오 1750 7 26 일 향년71세

목사(牧使)세항(世恒) 목사(牧使) 하악(河岳) 증조 진사(進士) 후지(後之)

외조 첨추(僉樞) 유명재(柳命才) 본 진주(晉州)

 묘  先兆下卯坐 合窆 表 三淵公撰集 谷雲公 隸字

    先兆 창숙 昌肅- 양주 평구역촌묘좌 壽增의 二 子

묘: 양주평구역촌 하묘좌

 好謙의후손 계통--------------------------------

峻行( 20 德中 생부 濟謙1701-1743 생부 濟謙 4남1녀)

履信(21 公祐1723-1793 2 남)-文淳(22 在人1744-1811 2남 4녀)

鼎根(23 君輔 1787-1821 1남1녀)-炳箕(24 생부 重根 永叔 1804-1866 1남4녀 )

聖均(25 天奎 1828-? 1남  )-台鎭(26 聖三 1853-1902 1남2녀 )

朝漢( 27 1895-19241남 1녀 ) -五東(28 생부 龍漢 문충공상용파 1917-1943)

茂顯(29 1943 계미생 부인 高山延氏 )-冕年(30 1970 경술)

혹시 好謙 선조님의 후손께서 이 글을 보시게 되면은 산소가 어디에 계신지를

   연락 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곡운 수증 선조님의 아드님이신 창국치겸 최겸 익겸 의겸 선조님의 산소는 전부 화장을 해드렸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金 好謙  조상님의 계통  -------------------------

호겸 선조님을 따라 잠시 문정공파 집안을 더듬어 보았다.

   족보에 나타난 출생 연도가 잘못이 된 곳도 있어 애를 먹었다.

 우리 안동가문도 먼 훗날의 후손들을 위해서 쉽게 읽을 수 있는 족보의 편찬이 이루어져야 할 것 같다.

判官公(판관공) 係權派 (계권파)

                文正公(문정공) 尙憲派(상헌파)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고국 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하여라. < 청음 김 상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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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세 계권(係權) ( 미상-1458 한성부판관(漢城府判官))

11세 영수(永銖) ( 1446-1502 자 자형(子衡)호 귀옹(歸翁). 장령(掌令) )

12세 번(璠) ( 1479-1544 자 문서(文瑞) 장동파조(壯洞派祖)

               평양 서윤(平壤庶尹) )

13세 생해(生海) ( 1512-1558 자 지혼(之渾) 신천군수(信川郡守) )

 

14세 대효(大孝) (1531-1572 자 희순(希舜) 삼가현감 (三嘉縣監))

     원효(元孝)( 1536-1612 구휘(舊諱) 달효(達孝)

                진사(進士)자 희주(希周) 군기시정(軍器寺正) )

     극효(克孝) ( 1542-1618 자 희민(希閔 )사미옹(四味翁) 도정(都正))

     선효(善孝) ( 생몰연대 미상. 묘 沃溝敦多山. 學生公派 二子)

 

15세 상헌(尙憲)

          ( 1570-1652 청음(淸陰) 석실산인(石室山人)( 좌의정(左議政) )

                       극효의 4 남. 대효 댁으로 양자)

      상준(尙寯) (1561-1635)자 여수(汝秀) 호 휴암(休菴).형조참판(刑曹參判))

      상용(尙容) (1561-1637) 자 경택(景擇), 호 선원(仙源)·풍계(楓溪)

                  노서(老西)의 영수로, 병자호란 때 순국했다. 극효의 장남)

      상관(尙寬)(1566-1621. 자 중율(仲栗), 호 금시재(今是齋).

                  장단부사(長湍府使) 극효의  차남)

     상건(尙謇)(1567-1604 자 계직(季直) 광릉참봉 (光陵參奉). 극효의 삼자)

     상헌(尙憲)(1570-1652. 大孝 댁으로 양자 가심. 克孝의 4 남)

     상복(尙宓)(1573-1592  자 중정(仲靜) 경주부윤(慶州府尹) 극효의 5 남)

     상안(尙安)(1576-1638 부인 함안 손씨.)

     상빈(尙賓)(  생몰연대 미상. 수첨중추(壽僉中樞)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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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준(尙寯)조상님에 대한 족보 오기

★453쪽 안동김씨 세보 권5 임술본-- 중종신유라고 표기라고 오기

 중종시대에는<신미 신사 신묘 신축뿐> 신유는 없음 명종16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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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 광 <光> 자 항렬

大孝-- 尙憲 --------- 문정공파 <文正公파>

광찬(광)(1597~1668)

자는 사회(思晦). 호는 운수거사(雲水居士). 생부는 장단부사 김상관.

삼촌인 좌의정 김상헌(金尙憲)의 양자로 입양되었다. 부사공파에서 문정공파로

 부인 정경부인 연안김씨 자녀: 7 남 6 녀를 두심

 사위: 李挺岳(용인) 洪柱天(풍산) 李重輝(전주) 宋奎濂(은진) 李光稷(한산) 許墅 (양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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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孝-- 尙寯 --------- 휴암공파 <休庵公派>

http://cafe.daum.net/andongkim.hm/g1Qv/10 휴암공파

※휴암공파 인물에는 이름 자에도 불 화 (火) 변이 들어가 있다. 그리고 손자 이름에는 문정공파와는 다르게 盛자로 되어 있다.< 문정공파는 으로 되어 있음>

광욱(광)(1580~1656) 빛날 욱

자는 회이(晦而). 호는 죽소(竹所).시호 문정공(文貞公)

《청구영언》, 《해동가요》에 시조 22수. 연시조 율리 유곡(栗里遺曲). 정자 歸來亭

 저서에 《죽소집》이 있다.  부인은 정경부인 전주이씨.

광위(광)(1582~1637)  빨갈 위 빛 휘

자 회보(晦甫). 진사.  참찬 부인은 죽산 안씨 안동 권씨

광소(광)(1585~1646)  밝을 소 환할 소

자 회성 (晦成) 통정 通政 부인 의성 김씨 김해 김씨

광혼(광)(1591~1660)  빛날 혼

동중추(同中樞) 부인 정부인 창녕 조씨

광련(광)(1618~1689) 달굴 련

진사(進士) 사과(司果) 증 공조참의 (工曹叅議) 부인 숙부인 동래 정씨

광희(광)(1620~1641) 빛날 희 밝을 희

 

<82년 임술보>에는 구체적인 내용이 없다. 安東金氏世譜(甲子譜)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고 하는데 필자는 아직 본 적이 없다. 인터넷에 소개된 그 내용을 요약해 본다.

호 는 선희(仙希). 병자호란(丙子胡亂)때 義士(의사).병조참판(兵曹參判)으로 추증

부인은 貞夫人(정부인) 安東權氏(안동권씨). 외아들 通德郞(통덕랑) 司直(사직) 壽埈(수준)이 있으며,墓所(묘소)는 慶北(경북) 醴泉郡(예천군) 知保面(지보면) 九龍洞(구룡동) 重華山(중화산) 酉坐(유좌)에 合窆(합폄)이다.

 

克孝-- 尙容 --------- 문충공파 <文忠公派>

김상용(金尙容) 1561(명종 16)~1637(인조 15).병자호란 때 순국했다.  자는 경택(景擇),   호는 선원(仙源).·풍계(楓溪)·계옹(溪翁).성혼(成渾)의 문인이기도 하다. 이항복(李恒福)·신흠(申欽)·오윤겸(吳允謙)·이정구(李廷龜)·등과 교류하였다.

 병자호란 때 왕족을 시종하고 강화로 피란하였다가, 이듬해 강화성이 함락되자 화약에 불을 질러 자결하였다. 족보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正月二十二日 登南門樓 據火藥櫃 投火 自焚死 十三歲 孫兒 壽全 從人 安善承 同死>

 이 때에 다음과 같은 미완성의 절명시를 남겼다.

日暮江頭 臣力無何 '<해지는 강머리에 신하는 힘이 없으니 어찌할꼬'>

글씨의  서체는 이왕체(二王體:왕희지와 왕헌지의 글씨체)를 본뜬 글씨를 썼고, , 시조로 유고(遺稿)에 《오륜가(五倫歌)》(5편) 《훈계자손가(訓戒子孫歌)》(9편) 등이 있고, 그 밖에도 《가곡원류(歌曲源流)》 등에 여러이 실려 있다.

양주(楊州)의 석실서원(石室書院) 인천의 충렬사(忠烈祠),  상주(尙州)의 서산서원(西山書院), 안변(安邊)의 옥동서원(玉洞書院), 정주(定州)의 봉명서원(鳳鳴書院)에 배향되었다.

문집에 《선원유고(仙源遺稿)》, 저서에 《독례수초(讀禮隨抄)》등이 있다.

 日暮江頭 臣力無何김상용은 '해지는 강머리에 신하는 힘이 없으니 어찌할꼬(日暮江頭 臣力無何)'라는 짤막한 절명시(絶命詩)를 남겼다.병자호란 때  척화신(斥和臣)이었던 청음 김상헌(淸陰 金尙憲, 1570∼1652)의 형이다.

부인은 정경부인 안동 권 씨이고 자녀는 4 남 7 녀를 두시다

 사위는 南好學(의령) 張維(덕수) 李以省(여주) 韓仁及(청주) 李應寅(전의) 李碩望(성주) 成   後龍(창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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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형(광)(1577~1602. 1662)  빛날 형

 자 회백(晦伯) 증  좌승지(左承旨)- 아들 壽昌의 무훈으로. 숙부인 완산 이씨.

 상용의 장남이다.

광환(광)(1579~1642) 불꽃 환

자 회숙(晦叔) 돈녕도정(敦寧都正) 숙부인 전주 이씨

광현(광)(1584~1647)  밝을 현

자는 회여(晦汝), 호는 수북(水北). 시문집으로 〈수북유고〉

 글씨는 전서·해서를 잘 썼으며, 시문에도 능했다 1634년(인조 12)에 부제학으로 있던 중 대사간 유백증(兪伯曾)이 인조의 사친 추숭(私親追崇)을 옹호하면서 임금에게 아부한다 하여 탄핵하다가 삼수(三水)로 유배당하였고 이듬해에 방면되어 돌아왔다. 상용의 3 자이고,

 부인은 정부인 청송 심씨.

광소(광)(미상)      불탈 소

 진무공신(振武功臣) 통정(通政)평강현감 (平康縣監) 증 호판(戶判) 동원군(東原君)

振武功臣 1624년 李适의 亂을  평정한 공로자에게 내린 훈호(勳號).

  족보의 기록에 보면은  자녀가 3 남 4 녀로 기록이 되어 있다.

  3 명의 아들은 壽全 壽長 壽延 이다.

그런데 壽全은 남문루에서 할아버지와 함께 분사한 기록이 있다. 선원 조상님의 묘역의 왼쪽에 작은 무덤 하나가 바로 13 세에 분사한 壽全이시다. 그리고 壽長의 아들 昌發은 문정공파 壽徵의 아들이고 창발의 아들은 俊謙으로 기록이 되어 있다. 壽延은 折衝 이라고만 기록이 되어 있다.

  절충 折衝 --- 절충장군  조선시대 무산계 가운데 하나.서반의 정3품 당상관 위계이다.

                    조선 시대에 둔, 정삼품 당상관 무관 벼슬. 어모장군(禦侮將軍)의 위이다.

                     禦侮將軍 조선 시대에 둔 정삼품 당하관 무관의 품계

 

 

 

문충공파는 16세손의  이름에 <불 화 火변>이 들어간 것은 휴암공파와 같다. 18 세손은 昌과 盛 두 가지로 썼으며. 19 세는 문정공파가 謙을 쓴 것과는 다르게 <때 시 時>자로 돌림을 삼았다. 문정공파가 겸손할 겸(謙)자를 썼음은 그 근거가 다음과 같은 문곡 김수항의 시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定諸孫名。書示兒輩

盛滿招神忌。榮名作禍根。須將一字。勉勉戒諸孫。文谷集卷之六

< 가득 참은 귀신의 시기 부르고/ 榮名은 재앙의 뿌리가 되네/ 모름지기 한 글자    謙     을 주노니/ 힘써서 자손들을 경계하여라. < 한양대 정민 교수 번역 옮김: 호걸이 되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151쪽 김영사 인용>

 

克孝-- 尙寬 --------- 부사공파 <府使公派>

1566-1621.자 중률(仲栗) 호 금시재(今時齋) 음장단부사(蔭長湍府使) 증좌찬성(贈左贊成)

 부인 정경부인 의령 남씨 자녀 5 남 4 녀를 두심. 극효의 차남이고, 그의 두 동생 尙謇과 尙憲이 있다.

 

광혁(광)(1590~1643) 불빛 혁

자 회경(晦卿) 호 동림(東林) 진사(進士) 좌승지(左承旨) 증 영의정(贈領議政)

부인 정경부인 광주 김씨로 동지중추부사 김존경(金存敬)<1569∼1631>의 딸이다.

   尙寬의 장남으로  자식이 없어  상헌의 양자로 들어간 光燦의 둘째 아들인

 퇴우당 壽興<1626(인조 4)~1690(숙종 16)>이 양자로 들어왔다. 尙憲은 실제로 尙寬의 동생으로 아들이 없어 형님이 되시는 상관의 둘째 아들인 光燦을 양자로 입적시킨 것이다.

 壽興의 산소는 남양주시 돌누깨 마을에 있고  석실 마을을 바라보고 있다.

 尙寬< 극효의 차남>의 둘째 아들 光燦 尙憲< 극효의 4 남>의 둘째 손자 壽興

형제간의 이런 관계 때문이었을까 부사공파 상관과 문정공파 상헌은 똑같이

   壽 昌 謙으로 돌림자를 사용하고 있다. 20세 부터는 같은 돌림자를 쓰고 있다.

※ 돌림자의 쓰임--------------------------------------

 대효- 상헌 문정공파---- 壽<17세> 昌<18세> 謙<19세>

 원효- 상준 휴암공파---- 壽<17세> 盛. 昌<18세> 時<19세>

 극효- 상용 문충공파-----壽 <17세>盛 .昌<18세> 時<19세> 유일하게  문정공파와 연                             결 된  昌發 하나뿐이다.

        상관 부사공파--- 壽 <17세> 昌<18세> 謙<19세>

        상복 부윤공파--- 壽< 17세> 盛. 昌<18세> 謙<19세>   昌聖. 昌道 둘뿐

       

 선효-   상안. 상빈  학생공파--  重<17세> 昌 <18세> 謙 <19세> 17세에 得生,

                    19세에 應敏이라는   돌림자를 벗어난 경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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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김씨 세보 首篇에는 淳(22)根(23)炳(24) 均. 圭(25)鎭(26) 漢(27) 東(28)顯(29)

(30) 鎰(31)求(32)模(33)(34) 培(35) 銑(36)源(37)榮(38)思(39)埈(40)善(41) 澤(42) 植(43) 煥(44) 喆(45) 鏞(46)이라는 글자를 넣어 이름을 지으라고 권하고 있다.

<五行의 生生하는 次序로 先規를 받들어 議定하니 우리 諸宗은 좇아 命名하고 合敬 同愛하는 뜻을 붙이라.>는 말로 議定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필자의 작은 바람------------------------- 청음의 14 세 손-------------

年자에서 오는 발음 때문에 겪는 사람들이 이름에서 오는 정신적인 고통을 받고 있는 일은 없는지를 생각해 보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내 집안에서 자식들과 조카들이 벌써 이름을 개명하였다. 굳이 년을 넣어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이름이 하나의 욕으로 바뀌어져 놀림을 당한 아픔을 당한 사람이 많지 않을까 생각한다.   오행의 土에 해당하는 글자가 년 하나뿐일까.  신성한 이름이 전체의 발음 때문에  수치감을 받게 하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돌림자의 년을  바꾸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지 말았으면 한다. 애초에 돌림자를 정할 때에 그런 경우도 생각을 했어야 했다. 앞으로 34 세然의 돌림자 에서도 이런 고통을 당하지 않을까 해서 지금부터 걱정을 해 본다. 극한적인 고통을 당하면서도 조상이 지어준 이름이라고 긍지를 가지는 분도 만난 적이 있다. 아마 소수일 것이다.

 

광찬(광)(1597~1668) 빛날 찬

숙부인 문정공파 상헌의 양자로  들어감. 府使公派에서 문정공파로.

광선(광) 생몰 미상   불사를 선

  말릴 한,불사를 선,공경할 연 으로 읽음

 절충 折衝 .부인은 김해 허씨 라고 기록했을 뿐이다.

광적(광)(1610~1673) 열기 적

자 군회(君晦) 음상의원별제 (蔭尙衣院別提) 부인 문화 柳씨. 여흥 민씨

광요(광)(1674~?) 불빛 환할 료(요)

부인 월성 이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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克孝-- 尙謇 -----부사공파 <府使公派>에 기록

절손이  되신 듯. 족보에는 대가 끊어진 것으로 기록이 되어 있다.

자 계직(季直) 상건(尙謇) (1567-1604)  광릉참봉 (光陵參奉). 극효의 삼자.

부인은 은진 송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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克孝-- 尙宓------ 부윤공파<府尹公派>

 

상복(尙宓)(1573-1592)  자 중정(仲靜) 경주 부윤(慶州府尹) 극효의 5 남

 진사. 경주(慶州) 부윤(府尹).수동 중추(壽同中樞) 부인은 청해 이씨. 자녀 1 남 3 녀.

광식(광) (1616 ~1664)    불 모양 식

자 자회(子晦) 진사 한산군수(韓山郡守) 부인 숙부인 고령 신씨 후부인 숙부인 함안 조씨 삼배 부인 숙부인 제주 양씨 아들은 壽南이다.

 문곡의 4 남인 노가재 공의  셋째 아드님이신 김신겸이 쓴 묘표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凡擧六男子한대 公居第四로 以農巖三淵兩先生爲仲叔이다. 公生於崇禎紀元戊戌孝宗九年二月二日이라 七歲에 養于族祖母趙淑人하다 始文正公有季弟慶州府尹諱尙宓의 嗣子韓山郡守諱光烒한대 無后라 淑人其繼配也하고 以公尸其祀하다 <老稼齋集附錄墓表[金信謙]>

남자가 모두 여섯으로 공은 넷째 아들로서 농암선생과 삼연선생이 중씨와 숙씨가 된다. 공은 명나라 숭정제 원년 무술년 효종 9년 2월 2일에 태어났었다. 7 세에 족조모 조숙인에게 양육되었다. 처음 문정공에게는 막내아우인 경주부윤 휘 상복의 대를 이을 아들 한산군수 휘 광식이 있었는데 後嗣가 없자, 숙인이 그의 후처가 되었고, 공을 그 제사에 시동으로 삼았다. <포상선생님 번역>

  尸童 : 옛날에 제사(祭祀) 지낼 때에 신위(神位) 대신(代身)으로 교의(交椅)에 앉히던 어린아이.

 

 선효(善孝) -- 尙安. 尙賓 --학생공파 (學生公派)

    상안(尙安)(1576-1638 부인 함안 손씨.) 이자 (二子)

     상빈(尙賓)(  생몰연대 미상. 수첨중추(壽僉中樞) ) 일자 (一子)

  광후(光厚)( 1605 ~1675)상안(尙安)의 장남

   부인 전주 이씨

  후일(厚逸) 미상 상안(尙安)의 차남

  광일(光逸) 미상 상빈(尙賓)의 장남

※ 광후는 돌림자이나 후일과 광일은 逸자가 돌림자인 양 기록이 되어 있다.

 

 

19세 겸(謙)

     

18세 창(昌)

    부

17세 수(壽)

     조

16세 광(光)

   증조

15세 상(尙)

   고조

 치겸()

1677∼1747 생부 창翕

 창국 ()

 1644∼1717

   수증(增)

  (1624~1701)

연지(延之) 호는 곡운(谷雲)

광 찬 (光燦)

(1597~1668)

자는 사회(思晦). 호는 운수거사(雲水居士).

생부 부사공파 상관(尙寬)

상헌     (尙憲)

1570(선조3)~1652(효종 3).

자 숙도(叔度) 호  청음(淸陰)

 석실산인(石室山人).서간노인(西磵老人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최겸()미상

 익겸()

1701∼1747

 의겸()

1694∼1754

호겸(好)

1681∼ 1699 생부 창 集- 문곡의 장남

 창숙(肅)

 1711∼1733

 일겸(逸)

1694∼1719

 창직(直)

1653∼1702         

 퇴겸(退)

1700∼1779

 문정공파 종가댁. 숙종의 후궁 영빈1669-1734( 수증 손녀)

원겸(元)

1693∼1748

 창설()

1669∼1732

   수흥(興)

 (1626 ~1690)

기지(起之) 퇴우당(退憂堂).

생부  광찬 양부 광혁. 부사공파 상관 입적

형겸(亨)

1694∼1770

이겸(利)

1700∼1755

정겸(貞)

1709∼1767

 

 

제겸(濟)

1680 1721

 창집(集)

1648 ∼1722

    수항(恒)

(1629∼1689 )  자 구지(久之), 호 문곡(文谷), 시호 文忠

호겸(好)

1681 1699

숭겸(崇)

1682 1700

 창협(協)

1651∼ 1708

양겸(養)

1675∼1723

 창흡(翕)

1653 ∼1722

치겸(致)

1677∼1747 종숙 창國  양자

후겸(厚)

1687∼1727 계부 창 양자

우겸(祐)

1676∼1709

 창업(業)

1658∼ 1721

언겸(彦)

1686∼1738

신겸(信)

1693∼1738

비겸(卑)

1698∼1748

윤겸(允)

1711∼1775

용겸(用)

1702∼1789

 창집(緝)

1662∼1713

후겸(厚)

1687∼1727 생부 창

 창립(立)

1666∼1683

 ※흔히 六昌이라 불리는 집안이다. 문곡에게는 1656년 병신년에

昌燮이 출생하여 그 해 9 월에 요절하였고, 1659 년 기해년에 昌習 (=昌順)이 태어나 1664 년 갑진년에 요절한 아들이 있었다.

 

희겸(喜)

1680∼1742

 창석(碩)

 1659∼1686 1746

  수징(徵)

(1636∼1706)자 유지(悠之) 호 벽오당 (碧梧堂)

세겸(世)

1684∼?

 

 창엽(曄)중부 수 양자

 준겸(俊)

 1701∼?

 창발(發)재종숙 수 양자. 양부- 壽長

 문충공 상용파

 상용- 光熽(광소)(4)

 생몰 미상.

 상용의 후손- 상용은 형제 사이

상용- 광소- 수장- 창발- 준겸- 옥행

부겸(富)

 1699∼?

 창술(述)

 1678∼?

귀겸(貴)

 1707∼?

우겸(愚)

 1721∼?

택겸(宅)

1713∼1769

 창필(弼)

 1684∼1758

충겸(忠)

1720∼1746 

홍겸(弘)

1722∼1774

지겸(智)

1709∼1756

창실(實)

1687∼1766

성겸(聖)

1712∼1753

목겸(牧)

1709∼1781

 창길(吉)

 1689∼1733

석겸(奭)

1712∼1784

숙겸(肅)

1714∼1787

직겸(稷)

1716∼1798

식겸(軾)

1719∼1793

도겸(道)

1687∼1752

 창엽(曄)

 1662∼ 1745 생부   수징(徵)

수응(應)

(1640∼1695) 자   응지(應之)

덕겸(德)

1703∼?

위겸(撝)

 미상

존겸(尊) 

 미상

종겸(宗)

 1693∼?

 창진(震)

 1666∼1692

  수칭 (稱)

(1642∼1704) 자    칭지(稱之)

낙겸(樂)

1698∼1779

 창언(彦)

 1676∼1722

인겸(仁)

1707∼1772

 창복(復)

 1683∼1750

  수능(能)

(1644∼1704) 자 능지(能之)

 

※ 무슨 파에 속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인물에 대한 구체적인 생각이나 정황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아직도  번역이 된 것이 없는  선조님들의 많은 글이 잘 번역이 되어 먼 훗날 우리 안동 가문의 후손들이 자랑하며 볼 수 있는 터전이 마련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리고 인터넷에 보이는 우리 안동가문의 잘못된 자료가 떠돌아  다니지 않도록 우리 가문이 서로 힘을 모아 노력을 했으면 하는 깊은 바람으로 이 자료를 여기에 실어 본다.  안동 소산리의 청원루 안에 있는 청음시비는 지금은 수정이 제 대로 되었는지 궁금하다.

혹시 오류가 있으면  질정 해주시기를 부탁드리며. ------ 청음의 후손. 彰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