輓詞<만사> ------------------------------------------
동갑내기 친구
李遇輝에게 보내는 만사
김 창집(金昌集)
1648(인조 26)∼1722(경종 2)
童丱論交到老蒼 동관논교도노창
어린 시절 교분 맺어 늙은 나이에 이르렀고
同門同甲誼難忘 동문동갑의난망
함께 수학했던 동갑내기 그 우의 잊을 수가 없구나.
摳衣志業河南士 구의지업하남사
스승을 곁에 모셔 학업에 뜻 품은 하남 땅 선비이시고
頌袴聲名漢世良 송고성명한세량
선정으로 이름 떨치셨으니 한 나라의 어진 관리 같으셨네.
雲峽冷泉差少病 운협냉천차소병
깊은 산골 약수 물에 병환이 조금 차도 있다더니
黃陵春草忽封堂 황릉춘초홀봉당
봄풀 돋은 무덤에 갑자기 유택을 잡으셨네.
郊扉屛蟄違攀紼 교비병칩위반불
시골에 쳐 박혀 있어 관 줄 잡아줌을 어겼으니
死友深慚舊范張 사우심참구범장
친구인 이 몸은 옛날의 범장에게 심히 부끄럽도다.
< 聽溪堂文集에서 >
※ 이 만사는 <몽와 집>에는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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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어 이해 >
◂童丱동관: 어린 아이.<丱>은 총각관으로 어린아이의 머리를 두 가닥으로 나누어 땋아서 머리 양쪽에 뿔 모양으로 맨 모양을 말함. 뜻이 바뀌어 어림. 동남동녀의 뜻. 총각.
丱童, 丱齒도 같은 뜻이다.
◂論交논교: 교분을 맺음.◂老蒼노창: 늙은이. 나이가 들어 보임
◂同門: 같은 선생의 문인. 20 대 시절에 尤庵 宋時烈 선생과 <1607(선조 40)~1689(숙종 15)> 과 同春 宋浚吉<1606-1672>선생에게 성리학과 소학을 함께 배움.
◂摳衣구의:옷자락을 걷어든다는 것은 자기의 옷자락을 걷어들고 어른의 뒤를 따라간다는 뜻으로, 흔히 스승을 모신다는 뜻으로 쓰인다.
◂志業지업:①학업에 뜻을 둠 ②지망하는 사업(事業)
◂河南 하남 :程子의 고향이며, 시의 대상자이신 聽溪 李遇輝가 경기도 하남 땅에 청계당이라는 정자를 짓고 20 여년간 생활을 했던 곳이기도 하다
◂頌袴송과 : 바지를 칭송했다는 노래로, 지방 수령(守令)이 선정(善政)을 아주 잘한 것을 비유해서 한 말이다 《後漢書 廉范傳》 에 의하면
동한(東漢) 염범(廉范)이 촉군 태수(蜀郡太守)가 되었는데, 전에는 화재를 방지하기 위하여 백성들이 밤에 불을 켜고 일하는 것을 금지하였으나, 염범은 물을 많이 준비하여 밤에 일을 하도록 하니, 백성들이 편케 여겨서 노래를 불렀는데, “염 숙도(廉叔度:염범의 자)가 왜 늦게 왔던가. 불을 금단하지 않으니 백성이 편케 일한다. 전일에는 적삼도 없었는데, 지금은 바지가 다섯 벌일세.”<廉叔度﹐来何暮?不禁火﹐民安作。平生无襦今五褲。'"后遂以"歌袴"为歌颂官吏德政之典 >하였다는 데서 나온 것으로, 정사를 잘하였다는 것을 의미함.
이 글에서는 이우휘<李遇輝>가 남평현감, 한성부판관 순창군수 등의 직책으로 큰 업적을 남겼다는 의미이다.
◂聲名성명 : 명성. 좋은 평판◂漢世良한세량: 한나라 세상의 어진 관리
◂雲峽운협 : 깊은 산골짜기◂黃陵황릉: 산소 자리의 높임. 동정호가 바라보이는 중국 호남성의 산이름인데 순의 두 왕후묘가 있다고 전해짐.
◂封堂봉당: 안방과 부엌을 연결하는 부분에 마루를 놓지 않은 채 흙바닥으로 둔 곳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산소의 친근한 표현.
◂郊扉교비: 시골의 들판 집.변두리의 작은집◂屛蟄병칩: 문을 닫고 집속에 틀어 박혀 있음
◂攀紼반불: 상여줄을 당기는 것. 불<紼> 은 <상여줄 불>.
예기 곡례에適墓不登壟(적묘불등롱) : 무덤에 가서는 봉분 위에 올라가지 않으며. 助葬必執紼( 조장필집불) : 장송을 도울 때에는 반드시 상여의 줄을 잡는다라는 말이 있음. 마지막 보내는 예의로 장례에 참석한다는 의미이다. 실제로 몽와는 이우휘가 세상을 떠났을 때에<숙종 33년 1707년에 좌의정이 되었고, 영의정 崔錫鼎이 상소하여 논척하다가. 嚴批를 받고 성 밖에서 대죄하고 있었을 때라 참석을 하지 못하였다.
◂死友사우:죽는 한이 있어도 서로 저버리지 아니할 정도로 절친한 벗.
◂范張 범장 :
후한(後漢)의 범식(范式)과 장소(張劭)를 말한다. 둘이 휴가를 얻어 향리로 돌아갈 때 범식이 장소에게 “2년 뒤에 집으로 찾아가 부모님께 인사드리겠다.”고 하였으므로 2년 뒤의 그날 장소가 술을 빚어 놓고 기다리자 과연 약속대로 찾아왔다는 고사가 전한다. 《後漢書 獨行 范式傳》
범장(范張)은 후한(後漢) 때 사람인 범식(范式)과 장소(張劭)이다. 범식과 장소는 친하게 지냈는데, 장소가 죽어 장사 지낼 때 범식이 미처 도착하지 못하였다. 마침내 발인하여 폄관(窆棺)하게 되었는데, 상구가 움직이려 하지 않다가 범식이 도착하여 상여 끈을 잡고서 끌자, 이에 상구가 움직여서 장사 지낼 수가 있었다. 《後漢書 卷81 獨行列傳 范式》
친구 장례에 참석하지 못하여 우정의 신의를 저버린 듯한 자신의 내면적인 부끄러움을 말하기 위한 중국고사의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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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이해>
함께 동문수학을 했고 어린 시절 같은 동갑내기인 친구의 우정을 회고하며, 친구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한 내면적인 부끄러움을 실토하는 심정이 표현되어 있다. 어린 시절 깊은 우의를 나누었던 친구에게 신의를 지키지 못한 내면적인 통곡스러움에 더한층 친구를 그리워하며 담담하고 솔직한 심정을 담아 보내는 輓詞이다.
내용분석 ------------------------
< 1-2 행 >-- 어린 시절의 정분 회고--- 동문. 동갑이던 친구의 그리움
< 3-4 행 >-- 친구의 배움과 정사 찬양-- 대구적인 표현
< 河南士---經明行修하던 선비: 漢世良--- 바른 정사하던 관리 >
< 5- 6 행 >--- 친구의 서거 소식---- 내면적인 애통스러움.
< 7- 8 행 >--- 장례에 불참석---- 내면적인 부끄러움.< 고사의 인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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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물 소개
이 우휘(李遇輝)<인조무자1648.7.8-숙종정해1707. 1.27>
조선시대 세종의 다섯째 아들 廣平大君(1425~1444). <이름은 여(璵). 자는 환지(煥之). 호는 명성당(明誠堂)>의 10 세손으로 定安副正公파이다.
< 족보 기록 > 자:君晦 아호: 聽溪堂. 薦 經明行修通訓漢城府庶尹
부인: 淑人 파평 윤씨. 병술1646.1.7- 신미1691. 5.21
자녀: 4 남 1녀 庶 일 남< 深-漸-沉- 淹- 泳- 청송 심씨 沈廷敍 >
◄ 우의정이었던 寒水齋 권상하(權尙夏 : 1641∼1721)가 찬한 묘갈墓碣에는
다음처럼 이우휘를 찬양하였다.------------------------------------
於惟聽溪韞潛德아아, 청계는 숨겨진 덕 간직하여
保赤子心濟以學적자의 마음 보존하고 학문을 겸하였네
孝悌孔宜動可則효제가 심히 마땅하여 행동 본받을 만하며
大連居喪風敎立대련의 거상 따라 풍교를 세웠네
乍莅桐鄕遺黎泣잠시 시골에 부임하니 백성들 울며 사모하였고
安吾澹泊返冥漠나의 담박함 편안히 여기며 아득한 지하로 돌아갔네
孝子翼翼樹穹石효자가 공경하여 큰 비석을 세우니
令名長流過者式훌륭한 명성 길이 흘러 지나가는 사람들 공경하리 .
< 한국고전 번역원 자료 인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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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聽溪堂集>에 실린 연보 기록
1. 부친은 사헌부장령인 형(逈)의 소생으로 7 남중 막내로 출생, 모친은 경주 이씨 현령 경하( 擎廈)의 따님이시다.
2. 20대에 우암(尤庵)宋時烈( 1607년 -1689년),
동춘(同春) 宋浚吉 (1606~1672)선생에게서 성리학과 소학을 배우다. 벼슬에 뜻이 없어 광주 선형아래에 집 한 칸의 聽溪堂을 짓고 20 여 년 간을 유유자적하며 학문을 연구하다
3.1689 년 42세에 송시열 선생의 賜死 되었을 때 동문들에 앞장을 서서 장례준비를 하였고, 다섯 달을 복상한 후로는 시골에 은둔하여 생활하였다.
4. 1694 년 47 세 때 經明行修의 선비로 추천되었다.
5.1696 년 49세에 처음으로 司圃署 別檢. 義禁府 金吾郞, 四學의 童蒙敎官으로 임명.
6. 1699 년 52 세에 황해도 新溪 縣令으로 나아감. 어머니의 상으로 삼년 간 복상
7.1704 년 57 세에 전라도 南平縣監을 제수 하였으나 부임 전에 右水運判官 자리를 맡았다가 漢城府判官으로 전임
8.1705 년 58 세에 漢城府 庶尹으로 승진. 전라도 淳昌郡守로 전임
9.1707 년 60세에 천식병으로 고생하다가 영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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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遇輝의 묘소<1648.7.8-1707. 1.27>-- 광평대군 10세손
권상하가 쓴 묘갈 비
봉분 앞에 놓인 주준석
오른쪽 망주석과 묘갈비
상석 앞의 무늬. 산소는 대모산 동북쪽에, 광평대군 묘역 건너편 산에 있음.
▶<< 필자의 변>>--------------------------
어느 날 종로구에 있는 정독 도서관 족보실을 찾아간 날 우연히 족보실에서
청계당 문집을 보게 되었고, 그 속에서 반갑게 내 조상님이신 몽와 金昌集님의 시문 하나를 만나게 되었고, 이 만사의 주인공이신 李遇輝라는 분이 전주이씨 廣平大君의 10대 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광평대군의 묘역에 마련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일원역에서 내려 광평대군 묘역을 찾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그 묘역에는 이우휘라는 분의 묘역이 없음을 알게 되었고, 광평대군의 후손이신 어떤 분을 만나 산소가 대모산 쪽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마침 광평대군 묘역의 안내소에서 경비 업무를 맡으신 구안동 김씨이신 金文會 라는 분의 안내를 받아 그 분의 자가용을 타고 산소를 찾게 된 것이다.
무슨 이유인지를 모르겠으나 산소 앞에는 철조망으로 막혀 있었다. 김문회라는 분이 가지고 가신 열쇠가 맞지 않아 닫혀진 문을 열수가 없어 할 수 없이 나만이 철조망 뒤쪽으로 해서 비탈진 자리에 마련된 묘역 앞에 섰다. 배례를 드리고 이우휘 묘역을 사진을 촬영하고 내려왔다.
나의 느낌으로는 원래의 산소 자리가 아닌 것 같았다. 좌우 양쪽으로 망주석이 서 있었으며 봉분 앞에는 床石과 聽溪 李公 墓酒樽石 이라는 글씨가 쓰여진 또 하나의 상석이 오른쪽에 마련되어 있었다. 오래된 것 같지 않은 느낌을 받았다. 아마 술병과 술잔을 두는 자리 같았다. 봉분 오른쪽 망주석 뒤쪽에는 한수재 권상하 님의 묘갈비가 서 있었다.
산소 자리 맡으로는 파평 윤씨의 묘소 하나가 있었는데 혹시 부인이 되시는 묘역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였다.
어찌 내 조상만이 조상이랴. 선대를 살아오신 우리들 선조의 영혼이 아닌가.
내 조상을 흠모하는 심정으로 배례를 드렸고, 몽와님의 시 속에 장례식에 참석을 못하셨다는 부끄러운 참회를 오늘 이 후손의 한 사람이 갚아드린다는 그런 기분으로 이우휘 묘역을 찾아간 것이었다.李遇輝의 묘역은 광평대군 묘역이 있는 곳에서 대로 건너편 대모산 북쪽에 있었다. 수서역이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몸소 안내를 해 주신 金文會 라는 분에게는
구안동김씨의 족보를 찾아 그 분의 계통을 알려드리기로 약속을 하였다. 그 분의 집에 족보가 마련되어 있지 않아 궁금해 하시는 그 분의 안타까움을 풀어드리기로 하였다.
※ 이 시의 풀이에 도움을 주신 포상님과 청계당 문집을 옮긴 분에게도 고마움을 전하면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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