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음의 여음/사찰여정

김 수항(金壽恒) 의 金藏寺 開心寺 金剛窟 兜率菴------

백촌거사 2013. 1. 27.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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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夜宿金藏寺<야숙금장사>---

금장사에 묵다.

김 수항(金壽恒)

1629년(인조 7) -1689년(숙종 15)

자 久之 호 文谷 시호 文忠公

청음의 셋째 손자이시고, 昌集, 昌協, 昌翕, 昌業, 昌緝, 昌立의 부친.

 

문곡 선조님이 거치신 벼슬관직.< 1664년까지>---------------

通津縣衙 .謁聖 文科 장원. 전적, 병조 좌랑, 시강원 사서, 京畿 都事. 文學, 지평, 지제교, 정언, 冬至使 書狀官, 부수찬, 교리 이조 좌랑, 이조 정랑, 中學敎授, 漢學敎授, 문학. 舍人, 응교, 집의, 사간, 사복시정. 重試 乙科 장원. 이조 참의 , 우승지, 대사간. 平壤 延慰使. 예조 참의. 좌승지, 부제학, 좌부승지, 도승지, 예문관 제학, 대사성, 예조 참판, 이조 참판. 寧陵의 祭官 同知經筵義禁府事兩館 大提學,대사헌, 도승지, 예조 판서, 형조 판서,

寧陵의 祭官, 咸鏡北道 試官 차임, 우참찬, 이조 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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仙山踏盡萬重雲선산답진만중운 깊디깊은 구름 속 칠보산 밟아가서

古寺懸燈到夜分고사현등도야분 등 불 걸린 옛 가람 한밤중에 이르니

落木風泉渾不辨낙목풍천혼불변 잎 진 나무 바람과 샘물소리 섞였는데.

枕邊還作雨聲聞침변환작우성문 베개 가엔 도리어 빗소리가 들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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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開心寺<개심사>------- --------

古寺僧何去。荒庭日欲西。木魚風自響。山鳥暮還棲。

고사승하거。황정일욕서。목어풍자향。산조모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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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절의 스님께선 어디 가셨는가

황폐해진 뜨락엔 해 저무는데

목어는 바람 불어 저절로 울고

산새는 날 저물어 둥지로 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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佛殿苔侵座。巖扉葉沒蹊。時看遊客至。破壁姓名題。

불전태침좌。암비엽몰혜。시간유객지。파벽성명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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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당의 자리에는 이끼 끼었고.

산문엔 나뭇잎이 길을 덮었네.

이따금 여행객들 절에 보이고

깨진 벽엔 이름자 씌어져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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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촌 노트

♣ ☛ 두 편의 사찰 탐방의 시는 30 대 후반에 쓰신 시다.

1664년 < 갑진 현종 5년 36세>윤6월, 咸鏡北道 試官에 차임되시고,

7월에 우참찬이 되어 北行하여 吉州에서 開場하셨으며, 9 월에는 이조 판서가 되셨고, 이때에 북한에 있는 七寶山을 유람하셨다. 칠보산에 있는 두 개의 사찰 金藏寺와 開心寺를 찾아가신 것이다. 甲辰北征錄의 시문집은 이 당시 북행길에서 담은 시집으로 문곡집에는 실리지 않은 삼분의 일이 실려 있다. 甲辰北征錄 은 <대전 문화재 자료 40호로 지정>되었다.

 

 

☛ 갑진 년 함경도 시관(試官)으로 머무셨을 때의 조선 왕조 실록 기록이다.

< 조선왕조 실록인용>

1.顯宗 5年(1664 甲辰 ) 閏 6月 13日(癸酉)

대제학 김수항(金壽恒)을 북도의 시관(試官)으로 삼았다:

大提學金壽恒爲北道試官

 

2.顯宗 5年(1664 甲辰 ) 10月 19日(丁丑)

이조 판서 김수항(金壽恒)이 북관(北關)으로부터 돌아오다.

丁丑/吏曹判書金壽恒自北關還

3.顯宗 5年(1664 甲辰 ) 7月 21日(庚戌)

무과는 남북도를 합쳐 3백 인을 취하되, 문과는 시험 답안지와 성적 순위를 올려 보낸 후, 김수항(金壽恒)은 그대로 머물러 무재(武才)를 시취하고, 상이 따랐다

武科則南北道合取三百人, 而文科試券科次上送之後, 壽恒仍留試武才

上從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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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시에 나오는 두 개의 사찰이 남한에는 없고 북한에 있다는 사실은 다음의 기록에서 그 증거를 찾을 수 있다.

남구만(南九萬) 이 쓴 "북관 십경도기(北關十景圖記) 병서(幷序) 七寶山"에 나오는 글에 보면 개심사와 금장사가 나온다.

남 구만(南九萬) 1629년(인조 7) - 1711년(숙종 37)

자 雲路 호 藥泉, 美齋 본관 宜寧 시호 文忠

宋浚吉의 門人. 少論의 領首

 

七寶山 (함경북도 명천군에 있는 산. 높이 659m 함경북도의 금강이라고 불림)

 

 

 門巖 行十里。有金藏寺。自寺 又行二十里 有開心寺

寺後有臺。坐此則 可以領略一山之面目。自寺稍東有望海臺。自臺踰石峯有金剛窟。自窟行十里有兜率菴。

菴在寺巖之下。地勢最高絶。俗傳古有七山並峙。故山名七寶。而中古以後。六山沈海。今此存者只其一山云。

문암으로부터 10리를 가면 금장사(金藏寺)가 있고 금장사로부터 또다시 20리를 가면 개심사(開心寺)가 있다.

개심사 뒤에 누대가 있는데 이곳에 앉으면 온 산의 면목을 대강 관망할 수 있다. 개심사에서 약간 동쪽으로 가면 망해대(望海臺)가 있고 망해대로부터 석봉(石峰)을 넘으면

금강굴(金剛窟)이 있으며 금강굴로부터 10리를 가면 도솔암(兜率菴)이 있다.

도솔암은 사암의 아래에 있는데 지형이 가장 높다. 세속에 전해 오기를 옛날에 일곱 산이 나란히 솟아 있었기 때문에 칠보산이라고 이름 지었는데, 중고(中古) 이후로 여섯 산이 바다 속에 잠겨서 이제 남아 있는 것은 다만 하나의 산뿐이라고 한다.< 고전 번역원 자료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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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도(忠淸道) 서산군(瑞山郡) 신증동국여지승람> 에 보면은

남한의 개심사(開心寺)불우가 소개되어 있다.

 

http://blog.daum.net/kangdante/15604441 행복나눔터 충남의 개심사

 

金剛窟 (금강굴)----------------

 

絶壁開幽竇。孤菴架數

절벽에는 깊숙한 구멍 열렸고,

두어 칸 외딴 암자 놓여 있는데,

林風吹送葉。巖溜滴成

숲속에 바람 불어 잎을 흔들고

바위에 낙숫물은 샘을 이루네.

破榻雲依宿。虛窓鳥啄穿

깨진 평상 구름에 머물러 있고

빈 창문 새가 쪼아 구멍을 내네.

寂寥金像坐。山鬼解參

고요한 금빛 불상 혼자 앉았고,

산귀신 참선하며 해탈을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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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 시를 바탕으로 아드님이 화운하시다.

 

金剛窟。敬次家君韻。

김 창협(金昌協)

1651(효종 2)~ 1708(숙종 34). 문곡의 둘째 아드님

자는 중화(仲和), 호는 농암(農巖).

創此自何年。巖蘿垂戶

苔深僧面壁。石湧虎跑

雲氣晝常在。日光時細穿

便思投檄筆。趺坐學安<農巖集卷之二에서>

 

금강굴(金剛窟)에서 삼가 부친의 시에 차운하다.

한국고전번역원 ┃ 송기채 교수님 (역) ┃ 2002

어느 해에 이 굴을 창건했을까 / 創此自何年

바위에 뻗은 넝쿨 서까래 덮어 / 巖蘿垂戶

이끼 자란 벽에는 참선하는 승 / 苔深僧面壁

바위 틈 샘구멍은 범 발톱 흔적 / 石湧虎跑

구름 기운 한낮에도 늘상 감돌고 / 雲氣晝常在

햇살 가끔 가늘게 뚫고 들어와 / 日光時細穿

아하 당장 격문 쓰는 붓을 던지고 / 便思投檄筆

가부좌에 참선을 배우고파라 / 趺坐學安< 한국 고전 번역원 인용>

5 자 율시: 3 음보의 리듬이 마음에 와 닿는다.

우리 가문의 시를 번역해 주신 송 기채 교수님께 깊은 고마움 전해드린다.

한 번 만나 뵙고 인사를 드린 분이시라 더욱 정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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兜率菴 (도솔암)----------------

咫尺諸天不可登。가까이 절을 두고 오르지를 못하고,

寺巖千佛自層層。절 바위 천의 부처 저절로 층층이네.

依然石室雲霞裏。예전같이 돌 굴엔 구름놀이 퍼졌는데

想見當時入定僧。 그 때를 상상하니 선정 든 스님이네.

菴有絶粒僧入棲。今不在云。

<암자에는 단식하는 스님이 들어가 사셨는데, 지금은 없다고 이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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