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의 숨결/문정공파 종중

김 영한(金甯漢)의 六臣墓 (여섯 분의 충신 묘)-------

백촌거사 2013. 2. 21. 14:32

 

----------------------------------------------------------------------------------------

六臣墓--------

                 여섯 분의 충신 묘

                                                         김 영한(金甯漢)

1878(고종 15무인)-1950 (경인) 향년: 73세

자: 기오(箕五) 호: 급우재(及愚齋) 호 동강(東江)

25세 道均 26세 奭鎭 27세 甯漢 28세 潤東 29세 忠彰膺政顯

 

荒墳寂寂對江 황분적적대강문

거친 무덤 쓸쓸히 한강 가에 누웠고,

古木寒烟日又 고목한연일우혼

오랜 나무 찬 안개에 해 또한 저물었네.

半夜潮聲如白馬 반야조성여백마

한밤중 물결소리 백마처럼 세찬데,

千秋不死六臣 천추불사육신혼

천추에 죽지 않을 여섯 충신 넋이여.

================================================

 

 

< 백촌 노트>-------------------------------------

문곡 조상님의 막내아들이신 澤齋 諱 昌立 선조님의 후손이신 東江公

영한(甯漢)선조님의 작품이다. 及愚齋 라는 문집 권1에 실린 작품으로 20 대 후반기에 쓰신 작품이다.< 권1은 1892 년- 1905년 (고종42)까지의 작품>

字가 箕五이시고 서예가로 명성을 드날린 一中 忠顯(1921.4.2-2006.11.19)

如初 膺顯(1927년 1. 22 ~ 2007. 2. 1 )의 친조부님이시며, 2012년 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이 되신 梧泉公 김석진(金奭鎭)<1843년 1월 21일 ~ 1910년 9월 8일)> 선조님이 부친님이시다. 그 애국적 정신이 많은 작품 속에 깃들어 있다. 위의 작품도 그 내면에는 그런 충의의 정신이 바탕을 이루고 있으리라. 청렴과 근면으로 유명하셨던 華棲 金學淳(1767-1845: 자 而習 호 華棲) 선조님의 정신도 이어 받으셨으며, 증조가 되시는 분은 23대 순조( 1790-1834)의 둘째 따님인 福溫公主( 1818-1832)의 駙馬이시던 孝貞公 昌寧尉 金炳疇 (1819-1853)이시다. 왕가와의 인연을 이으신 집안이시다.

-----------------------------------------------------

宗 2年(1909 己酉 ) 1月 7日(陽曆) --- <조선왕조실록인용>

又詔曰: “六臣之危忠卓節, 上下千載, 罕有倫比。 駕過遺墓, 尤庸興感。

忠正公朴彭年、忠文公成三問、忠簡公李塏、

忠景公柳誠源、忠烈公河緯地、忠穆公兪應孚墓,

遣地方官致祭。

----------------------------------------------------------------------------------

또 조령을 내리기를,

“여섯 신하〔死六臣〕의 뛰어난 충성과 절개는 위아래로 천년 동안 대비할 만한 사람이 드물다. 행차가 그들의 무덤을 지나게 되니 더욱 감회가 크다. 고 충정공(忠正公) 박팽년(朴彭年), 충문공(忠文公) 성삼문(成三問), 충간공(忠簡公) 이개(李塏), 충경공(忠景公) 유성원(柳誠源), 충렬공(忠烈公) 하위지(河緯地), 충목공(忠穆公) 유응부(兪應孚)의 무덤에 지방관을 보내어 치제하게 하라.”

-----------------------------------------------------------------------------

< 시어의 이해>

荒墳: 거칠고 황폐해진 무덤. 황폐한 무덤. 寂寂:홀로 떨어져 있어 심심하고 외롭다. 쓸쓸하고 고요한 모양. 江門: 강 어귀

寒烟:쓸쓸히 보이는 연기. 차가운 안개 찬 연무

白馬: 물결 소리의 보조관념. 기세가 세차게 흐름.

밤중이라 더욱 세차게 들려왔음. 白馬翰如 : 翰如는 나는 듯이 달리는 모양

半夜: 한밤중. 하룻밤의 절반.千秋:길고 오랜 세월. 한량없이 긴 세월.

: 사람의 정신. 영혼의 양에 속함. 음에 속하는 것은 魄이다

日又昏 의 표현: 날이 어두워지다/ 날이 저물다/ 해가 저물다 의 의미

이런 표현이 참 많았다. 한시 표현의 공식 같은 느낌이다.

散步淸陰日又昏 不覺西山日又昏 踏雪歸來日又昏 風雨凄迷日又昏

愁倚欄干日又昏 斷靄濛濛日又昏 樓壓黃沙日又昏

--------------------------------------------------------

 

死六臣 公園------------------------

기념공원 개원일 : 1978년 5월 19일

사륙신 묘: 서울특별시유형문화재 제8호(1972년 5월 25일 지정)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1동 185-2

 

조선의 6대 단종 임금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목숨을 바친

사륙신의 충절과 의기를 추모한 공원이다.

사실 공원 안 묘지에는 일곱 분의 봉분이 솟아 있다.

서쪽에는 하위지(河緯地), 성삼문(成三問), 유성원(柳誠源)의 묘

동쪽에는 이개(李塏), 유응부(兪應孚), 박팽년(朴彭年), 김문기(金文起)의 묘

묘소 앞에는 작은 비석을 세우고 <○ 氏之墓>의 식으로 기록이 되어 있다.

처음 이곳에는 성삼문, 박팽년, 이개, 유응부와 성삼문의 부친인 성승(成勝) 등 다섯 분의 묘가 있었는데 성승의 묘만 임진왜란 중에 실전이 되어 4기의 봉문만 있었는데, 1977 년 성역화하면서 하위지, 유성원, 김문기 세분의 가묘(假墓)를 추가 봉안하였다고 한다.

지금 현재로는 7개의 봉분이 되어 있으니 死七臣 공원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1691년(숙종 17) 이곳에 민절서원(愍節書院)을 세우고, 1782년(정조 6)에는 신도비(神道碑)를 세웠다.

이 민절서원 숙종 8년(1682년)에 동재기 나루(銅雀津)에 육대사(六臺飼)로 세워졌다가 1691년 오늘의 사육신묘가 있는 곳으로 옮겨지면서 숙종이 친필 사액을 내린 곳이다. 이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건재했으나 건물은 허물어지고, 지금은 육각비 옆에 주춧돌만이 남아 그 흔적을 전한다.

 

서울시는 1955년 그 자리에 육각(六角)의 사육신 묘비를 세우고 묘역을 수축하였다. 1978년에는 이 의로운 충혼들을 위로하고 불굴의 충의 정신을 널리 현창하고자 묘역을 확장하고 의절사, 불이문, 홍살문, 비각 등을 새로 지어 충효사상 실천도장으로 정화하였다

1977年 국사 편찬위원회에서 후손들의 청원을 심사한 결과 ‘김문기(金文起)를 死六臣(사육신)의 한 사람으로 현창(顯彰) 하는 것이 마땅하다’. 고 결의를 하였고, 이 결의를 근거로 그의 가묘를 만들었다고 한다.

1982,11,11일 국사 편찬 위원회에서는 합의 사항에서 사육신구성을 변경한 바가 없다고 하는 이야기와 사육신의 일원으로 인정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어찌 되었거나 묘역 안에는 일곱 분의 봉분들이 적적하게 말없이 흘러가는 강물을 내려다보고 있다.

-------------------------------------------------------------

 

 

 

                              사칠신(死七臣)

필자가 이 용어를 쓴 것은 묘역 안의 봉분 숫자에 따른 것이다.

성삼문

(成三問),

시호

충문(忠文).

1418(태종 18)~ 1456(세조 2)

본관은 창녕. 자는 근보(謹甫)·눌옹(訥翁), 호는 매죽헌(梅竹軒).

처형 직후 전국을 돌면서 사육신의 시신을 전시할 때, 그의 일지(一肢)를 묻었다는 묘가 충청남도 은진에 있다. 장릉(莊陵 : 단종의 능) 충신단(忠臣壇)에 배향. 강원도 영월의 창절사(彰節祠), 노량진의 의절사(義節祠), 충남 공주 동학사(東鶴寺)의 숙모전(肅慕殿)에 제향

저서:〈매죽헌집〉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고 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 하리라.

食人之食衣人衣 식인지식의인의

素志平生莫有違 소지평생막유위

一死固知忠義在 일사고지충의재

顯陵松栢夢依依 현릉송백몽의의

임의 밥 임의 옷을 먹고 입으며

일평생 먹은 마음 변할 줄이 있으랴

이 죽음이 충과 의를 위함이기에

현릉(문종의 능) 푸른 송백 꿈속에서도 못 잊어라.

擊鼓催人命 (격고최인명) : 북소리는 목숨을 재촉하는데

回首日欲斜(회수일욕사) : 돌아보니 저녁 해 서산에 지네.

黃泉無一店(황천무일점) : 황천엔 주막 하나 없을 것이니

今夜宿誰家(금야숙수가) : 오늘 밤 뉘 집에서 자야 하는가.

북소리 바야흐로 촉급한데 / 鼉鼓聲正急

서산의 해도 기울어가네 / 西山日又斜

저승에는 여관이 없다하니 / 黃泉無客店

오늘 밤엔 누구네 집에서 잘까 / 今夜宿誰家< 고전번역원 인용>

 

 

 

 

 

박팽년

(朴彭年)

시호

충정(忠正)

1417(태종 17)~ 1456(세조 2).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인수(仁叟), 호는 취금헌(醉琴軒). 시호는 충정(忠正)

장릉(莊陵) 충신단(忠臣壇)에 배향,과천 민절서원(愍節書院),홍주 노운서원(魯雲書院), 영월 창절서원(彰節書院) 등에 제향.

눈비 맞아 희는 듯 검노매라.

야광명월이 밤일들 어두우랴.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고칠 줄이 있으랴.

 

 

 

 

이개

(李塏)

시호

충간(忠簡)

1417(태종 17)~ 1456(세조 2).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청보(淸甫), 백고(伯高) 호는 백옥헌(白玉軒)

시호는 의열(義烈)이었다가 충간(忠簡)으로 고쳐졌다

1758년(영조 34)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대구 낙빈서원(洛濱書院), 과천 민절서원(愍節書院), 한산 문헌서원(文獻書院), 의성 충렬사(忠烈祠) 등에 제향.

방안에 켜 있는 촛불, 누구와 이별하였기에

겉으로 눈물지고 속 타는 줄 모르는가

저 촛불 나와 같아 속 타는 줄 모른다

 

 

 

 

 

하위지

(河緯地)

시호

충렬(忠烈)

1412(태종 12)~ 1456(세조 2).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천장(天章)·중장(仲章), 호는 단계(丹溪)·연풍(延風

1691년(숙종 17) 신원되었으며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車裂刑을 당함.

 

노량진 민절서원(愍節書院), 선산 월암서원(月巖書院), 홍주 노운서원(魯雲書院), 연산 충곡서원(忠谷書院), 의성 충렬사(忠烈祠) 등에 제향.

男兒得失古猶今 남아득실고유금

頭上分明白日臨 두상분명백일임

持贈蓑衣鷹有意 지증사의응유의

江湖烟雨好相尋 강호연우호상심

사나이의 득실을 고금이 다를 게 없고

머리위엔 분명이 해가 비치고 있는데

도통이를 보내준 뜻 어찌 모르겠는가.

강호에 묻혀 조용히 살라는 그 참뜻을

사인증사의(謝人贈蓑衣) [도통이를 보낸 준 것에 감사함]의 시

 

유성원

(柳誠源)

시호

충경(忠景)

?~ 1456(세조 2).

본관은 문화. 자는 태초(太初), 호는 낭간(瑯玕).

1691년(숙종 17) 관작이 회복. 이조판서 추증.

노량진 민절서원(愍節書院), 홍주 노운서원(魯雲書院), 영월 창절사(彰節祠) 등에 제향.

白山拱海 摩天嶺 백산공해 마천령

黑水橫坤 豆滿江 흑수횡곤 두만강

此地李侯 飛騎處 차지이후 비기처

剩看胡盧 自來降 잉간호로 자래강

바다를 끌어들인 마천령 산맥에

땅을 가로지른 두만강 물줄기어라

이곳에서 이후는 힘찬 말 달려 놓고

오랑캐 항복 받던 그 모습 눈에 선하네

 

 

 

유응부

(兪應孚)

시호

충목(忠穆)

?~ 1456(세조 2).

본관은 기계(杞溪). 자는 신지(信之)·선장(善長), 호는 벽량(碧梁).

시호는 충목(忠穆)

노량진 민절서원(愍節書院), 홍주 노운서원(魯雲書院),

연산 충곡서원(忠谷書院), 영월 창절사(彰節祠), 대구 낙빈서원(洛濱書院) 등에 제향. 병조판서에 추증.

 

將軍持節 鎭伐邊 장군지절 진벌변

沙塞塵晴 士卒眠 사색진청 사졸면

駿馬五千 嘶柳下 준마오천 시유하

豪鷹三百 佐樓前 호응삼백 좌루전

장군의 지휘로 변방의 오랑캐를 무찌르고

세상이 조용하니 병졸들도 잠이 들었네.

준마 오천 필이 버들 아래서 울고

사냥매 삼백은 루 앞에 앉아 있네.

 

김문기

(金文起)

시호

충의(忠毅)

1399(정종1)∼1456(세조2)

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여공(汝恭).호는 백촌(白村)·마암(馬巖).

처음 이름은 김효기(金孝起)였으나 장인의 이름이 효정(孝貞)이어서 문기로 고쳤다.

모진 고문에도 뜻을 굽히지 않다가 군기감 앞에서 능지처사(陵遲處死)를 당함. 저서에 <백촌유사(白村遺事)>

1977年 국사편찬위워회에서 후손들의 청원을 심사하여 ‘김문기(金文起)를 사육신(死六臣)의 한 사람으로 현창(顯彰)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결의하였고 이를 근거로 노량진 사육신 묘역(死六臣墓域)에 그의 가묘(假墓)가 설치되었다.

 

 

 

 

 

 

 

 

--------------------------------------------------------------

 

 

 

 

 

 

 

 

 

 

 

 

 

 

♣ 諱 김 영한(金甯漢) 선조님의 가계

15세 尙憲-16세 光燦-17세 壽恒-18세 昌立(6자)-

19세 厚謙( 생부 3 자 昌翕)

20세 簡行- 21 세 履錫-22세 學淳-23세 淵根-24세 炳疇

25세 道均( 생부炳敎문충공파)-26세 奭鎭(생부樂均 문충공파)

28세 潤東(樊溪)-29세 忠彰膺政顯-30세 通富-載-虎豹-慶敞年-31세 成鎰-庠庸鎰 台鎰

27세 文正公派

김 영한(金甯漢)

생부: 김홍진(金鴻鎭) 휴암공파(休菴公派)

字 기오(箕五) 號 동강(東江) 문집: 급우재집(及愚齋集)

1878년(고종무인) 6.13-1950(경인) 6.28 향년 73세

1894년(고종31갑오) 進士 秘書院丞

叔夫人 潘南朴氏1876년(고종13 병자)- 1960년(경자) 7.30 향년 85세

左副承旨 喜陽 判書 齋寅 증조 判書 周壽 외조 判官 李承靖 韓山

梧峴先塋 孝貞公墓右岡庚坐 合窆 誌男潤東撰 表男春東撰 孫男 忠顯書夫人誌男潤東撰

--------------------------------------------------------------------------------

 

 

생부: 金鴻鎭⟶생부 左均-------두 분 모두 休庵公派 尙寯派

자 聖達 호 春北

1848년 (헌종14무신)10.7- 1911년(신해) 4.6 . 향년 64세

蔭 通政 沔川郡守

榛谷生庭親山左岡午坐

숙부인 大邱 徐氏 1846년 (헌종12 병오)生

敏淳 麟載 증조 有愼 외조 沈樂浩 청송

자녀: 3남 1 녀

甯漢 仲漢 定漢 李求 (韓山人)

甯漢---出爲 族叔 奭鎭 后- 文正公派

--------------------------------------------------------

생부 金左均--- 생부 炳泰

字 公準 號 松澗 有貳錄

1810년(순조10 경오)11.26- 1880(고종17경진)6.15 향년:71세

1828(무자) 生員 敦寧都正 증 이조참판

贈 貞夫人 全州李氏 1808년(순조8무진)- 1853년(철종4계축) 4.16 향년 46세

元善 聖極 증조 夏燮 외조 贈敎官 金德成 慶州

慶州 長岐面下鳳里 榛谷庚坐雙墳誌出后男大提學鶴鎭撰

자녀: 龜 夔鶴承鴻鎭-- 장남만 남겨두고 모두다 양자로 나가심.

-------------------------------------------------

생부 金炳泰-道根2-大淳-履遠-夏行2-時佐-盛最-壽一-光煜- 尙寯

4 형제 중에 둘째이시다( 炳恒- 炳泰- 炳坤- 炳謙)

字 亨汝

1792년(정조16 임자) 6.5-1846(헌종12 병오) 12.15 향년:55세

忠州周柳面 鶴城里 坤坐

晉州柳氏 1790(정조14경술)-1854년(철종5 갑인)10..13 향년:65세

叅判 畊 贈 叅判 晉原君師喆 증조 贈 承旨 應瑞 외조 進士 李垿 咸平

忠州 東乷味面渴馬嶺巳坐

 

---------------------------------------------------------

 

오천실기 [梧泉實記] 조선 고종 때의 문신 ·

의열사(義烈士)인 김석진(金奭鎭:1843.1.21~1910.9.8)의 사적을 모은 책.

 

자 경소(景召), 호 오천(梧泉)이다. 경기도 고양(高陽)에서 태어났다. 1860년(철종 11)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弘文館)의 관직을 지내고 장령(掌令)을 거쳐 사성(司成)·사간(司諫) 등 청요직(淸要職)에 있었다. 한성부(漢城府)의 좌윤 ·우윤을 지냈으며, 형조판서(刑曹判書)·광주부유수(廣州府留守) ·통어사(統禦使) 등을 지냈다.

1896년(고종 33) 특진관(特進官)이 되었으며, 1901년(광무 5) 돈령부판사(敦寧府判事)에 이르렀다.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항의 상소를 하여 조약에 찬성 날인한 5적신(五賊臣)의 처형을 주장하였으며 1910년 국권이 피탈되자 음독 자결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국가유공자의 희생으로 지킨 대한민국”

 

보도자료

(2쪽)

자료배포일 : 2012. 1. 31(화) 배포부서 : 대변인실(☏ 2020-5062)

생산부서:공훈심사과(☏ 2020-5232) 과장 : 정관회 사무관: 채순희

2월의 독립운동가 김석진(金奭鎭)선생

(1843. 1. 21 ~ 1910. 9. 8.)

국가보훈처는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을사늑약 파기와 을사5적 처형을 요구하는 강경한 상소를 올리고, 경술국치 당시 일제작위 수여를 거절하고 병탄에 항거하여 음독 자결한 김석진 선생을 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선생의 호는 오천(梧泉)이며,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났다. 1860년 정시문과에 급제한 후 사간원, 사헌부 등의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거쳤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 등 일제의 침략에 통분하여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으로 낙향하여「사안당(思安堂)」을 짓고 와신상담하며 은거하였다.

일제는 러일전쟁 승리와 제2차 영일동맹, 가쓰라-태프트 밀약, 포츠머스조약 등을 통해 서양 열강으로부터 대한제국에 대한 우월적 지위를 용인 받고, 1905년 11월 소위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였다. 이에 비분강개한 민영환, 조병세, 홍만식, 송병선 등의 지사들이 자결․순국하였다. 이 가운데 특히 홍만식은 김석진과 함께 시류를 논하였었고, 민영환과 조병세 등은 국정을 함께하였던 관료였다.

선생도 즉각 서울로 올라와 박제순, 이완용, 이근택, 이지용, 권중현 등 5적을 처단할 것과 각 공관에 성명을 내어 을사조약의 무효를 선언할 것을 상소하는 등 강경한 반대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투쟁에도 불구하고 일제는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군대를 해산하는 등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만들기 위한 기반을 강화하고 1910년 8월 29일 강제로 병탄하였다. 나아가 식민지 정책을 강화하기 위해 ‘조선귀족령’을 만들어 선생 등 고위 관료와 명망 있는 지도자 76명에게 작위를 수여하고 금(金)을 주어 회유하고자 하였다.

선생은 이러한 일제에 대항하기 위해 작위수여 등 일체를 거절하고 1910년 9월 8일 서울 오현(현, 서울특별시 강북구 번동 북서울 꿈의 숲 공원 내)에 있는 조부모 묘소의 재실인 창녕위궁재사(昌寧尉宮齋舍)에서 음독 자결하였다.

 

한말의병장 유인석은 당시 일제침략에 저항하기 위한 방법론으로 ‘의병봉기’와 ‘은둔 또는 망명’, ‘자정수지(自靖遂志:자결)’ 세 가지를 제시하였는데 선생은 ‘은둔과 자결’을 택한 것이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국가보훈처 http://www.mpva.go.kr/ 자료인용. 이달의 독립운동가

                                                                               2012년 2 월 金奭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