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안동 가문 시 모음/퇴우당 김수흥의 글 모음

김수흥의 因臺啓謫長鬐。渼湖江邊。留別諸人 미호강(渼湖江)의 이별.

백촌거사 2013. 2. 23. 0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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因臺啓謫長鬐

渼湖江邊。留別諸人

<인 대계 적 장기 미호 강변 유별 제인>

 

                     미호강(渼湖江)의 이별

                                                                                                                 김 수흥(金壽興)

1626년(인조 4) - 1690년(숙종 16)

자: 起之 호: 退憂堂, 止堂 시호: 文翼

생부는 光燦이시며, 文正公派이시지만 府使公派 尙寬宅의 光爀의

양자로 가시다.

저자는 淸陰 金尙憲의 손자로 기사환국 때 영의정으로서

長鬐로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謫所에서 졸한 인물이시다

 

親知相送簇沙頭。친지상송족사두

친지와 헤어지며 강가에 모였는데,

鴻雁聲中水急流。홍안성중수급류

기러기 울음 속에 물소리 빠르구나.

寵辱悲歡本如此。총욕비환본여차

영예 모욕 슬픔 기쁨 본래는 이 같은데

臨岐不必浪生愁。임기불필랑생수

갈림길에 구태여 근심 할 것 없다오.

                                                                     <退憂堂集卷之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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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 이해】

대계(臺啓):사헌부ㆍ사간원에서 유죄로 인정하여 올리는 계사(啓辭).

啓辭 논죄에 관하여 임금에게 올리는 글

사헌부(司憲府)=헌부·백부(柏府)·상대(霜臺)·오대(烏臺)

시정·풍속·관원에 대한 감찰, 인사 행정을 맡아봄.

사간원(司諫院):임금께 옳지 못하거나 잘못된 일을 고치도록

말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아.

長鬐: 고려시대 영일군의 지명 신라시대에는 只踏縣이었다가

鬐立縣으로 고침.1914년 장기군은 폐지 내서 양남은 경주로 그 이외 에는 迎日郡으로 편입. 1995년 연일군은 포항시에 통합.

渼湖: 미수(渼水),미음(渼陰)이라고도 불리는 넓은 호수처럼 잔잔하고 아름다운 옛 석실 서원 앞을 흐르는 한강을 말함. 북한강, 남한강이 합수하여 두미강(斗迷江)이 되니 이곳에서부터 미호의 시작이 된다. 정 다산의 고향이었던 마현마을- 봉안마을-덕소- 평구 마을( 양정역 부근)-수석리로 이어지는 한강이다.

 

http://blog.naver.com/gojhan/10034642599 미호강

 

留別 :떠나는 사람이 남아 있는 사람에게 작별을 전함= 작별.

詩題: 因臺啓謫長鬐渼湖江邊。留別諸人

한자읽기:인대계적장기。미호강변。유별제인

시제의 뜻: 대간(臺諫)에서 장기로 귀양을 보낸다는 계사가 있었다. 남양주 미호강가에서 마중을 나온 여러 사람들과 헤어지다.

 

남쪽 땅 長鬐----------------------

숙종 14 1688 무진 63 세 ○ 7월, 영의정이 되다.

숙종 15 1689 기사 64 ○ 2월, 引對에서 불손한 언사가 있었다는 이유로 파직되다. ○ 대간의 논박을 받아 삭탈 관작되고 문외 출송되어

長鬐에 安置되다.

숙종 16 1690 경오 65 10월 12일, 長鬐 謫所에서 졸하시다.

 

♣ 조선왕조실록의 기록.---------------------------

1.肅宗 15年(1689 己巳 ) 2月 2日(庚子) :長鬐 謫所의 근거

○上命罷領議政金壽興職曰: “頃當引對, 辭氣勃慢, 人臣事君, 豈容如是。” 前一日, 上謂筵臣曰: “向者金壽興奏事, 有曰: ‘自古人君輩’ 輩之爲言, 非所以敬之也。 人臣對其君而言乃如此, 豈不慢甚乎? 予旣聞之詳, 故今猶不忘也。”

임금이 명하여 영의정(領議政) 김수흥(金壽興)을 파직하게 하고, 말하기를,

“지난번 인대(引對)하였을 때 말하는 기색에 발끈 성내며 삼가하는 태도가 없었으니, 인심(人心)이 임금을 섬기는 데 어찌 이와 같을 수 있겠느냐?”

하였다. 그런데 하루 전에 임금이 연신(筵臣)에게 이르기를,

“저번에 김수흥(金壽興)이 일을 주청하면서 ‘예로부터 임금의 무리들은……’이라고 하였는데, 무리라고 말한 것은 공경하는 것이 아니다. 인신(人臣)이 되어 그 임금에 대해서 이와 같이 말하는 것은 어찌 심히 교만한 것이 아니겠느냐? 내 이를 자세히 들었으므로,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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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肅宗 16年(1690 庚午 ) 10月 12日(己巳) 長鬐에서 세상을 마침.

 

己巳/前領議政金壽興, 卒於長鬐謫所, 年六十五

壽興字起之。 文正公尙憲之孫也。 與弟壽恒,

鱗次登朝, 文詞雖遜於壽恒。 而亦贍雅足用, 幹局絶人, 濟以果敏, 度支之政, 人稱近世罕有。

顯廟特拜爲相, 仍陟首揆, 距擢第纔十餘年而人不以爲驟。 壽興早承賢祖訓, 留心經術, 前後居相職不久, 而一以扶護儒賢, 輔導君德爲主, 雖至顚沛而不顧, 世以是多之。 値時之艱, 不免餘干之厄, 經年瘴海, 卒以柩歸, 善類莫不傷痛焉。 後謚文翼

전 영의정(領議政) 김수흥(金壽興)이 장기(長鬐)의 적소(謫所)에서 졸(卒)하였는데, 65세였다. 김수흥의 자(字)는 기지(起之)이며, 문정공(文正公) 김상헌(金尙憲)의 손자이다.

아우 김수항(金壽恒)과 차례로 조정에 등용되었는데, 문사(文詞)는 김수항보다 못하였으나 또한 아량이 있어 쓸 만하였다. 간사(幹事)하는 기량이 남보다 뛰어나서 과단(果斷)하고 민첩하게 처리하였으므로, 탁지(度支)의 정사(政事)는 사람들이 근세에 드문 것으로 일컬었다. 현종(顯宗) 때에 특별히 정승으로 제배(除拜)되고 이어서 수상(首相)에 올랐는데, 급제한 지 겨우 10여 년이었으나 남들이 갑자기 올랐다고 하지 않았다. 김수흥은 일찍부터 어진 할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아 경술(經術)에 마음을 두었었다. 전후 정승의 벼슬에 있던 것은 오래지 않으나 한결같이 유현(儒賢)을 부호(扶護)하고 군덕(君德)을 보도(輔導)하는 것을 주장삼고, 낭패스러운 형세가 되더라도 돌아보지 않았으므로, 세상에서 이 때문에 칭찬하였다. 어려운 때를 당하여 횡액을 면하지 못하여 장해(瘴海)에서 해를 겪고 마침내 널[柩]로 돌아오니, 선류(善類)가 누구나 다 상심하고 통탄하였다. 뒤에 문익(文翼)이라 증시(贈諡)하였다.

<조선왕조 실록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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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용 이해 노트 】

1 행 두련: 강가에서의 슬픈 이별.

親知-사전에는 親友라고 설명되었으나. 친척들과 친우들

相送-배웅하다 / 전송하다 / 서로 보냄.

沙頭:모래사장, 모래 언덕, 모래톱, 물가 ,모랫가 등으로 번역

계절적인 배경은 보이지 않음. 미호 강변이라는 공간적 배경.

簇은 동사로 모이다.

남쪽 장수 북쪽 손님 모래톱에 모여 들어 / 南商北客簇沙頭

유배지로 떠나보내는 슬픈 전송객들이 미호강에 가득하였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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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행 함련: 강가의 정경.--- 슬픈 배경

강가에 날아가는 기러기들의 모습과 물결의 흐름이 빠른 강의 모습.

화자에게는 자연의 모습들도 슬픈 정서로 받아들이고 있다.

두미협을 지나 석실서원 앞 수석리를 지나는 물결은 커다란 바위 앞에 부딪치며 거대한 호수처럼 넓어지고 물결이 세차게 흐르던 자연의 모습을 표현한 듯하다. 자연의 청각적인 이미지가 이별의 정서를 심화시키고 있지 않을까.

鴻雁- 큰 기러기와 작은 기러기

鴻:기러기/크다/ 굳세다

鴻鵠之志: 큰 뜻. 위대한 뜻. 鴻圖: 큰 계획. 광대한 영토. 鴻洞: 깊고 먼 모양. 잇닿은 모양. 鴻毛: 기러기 털. 사물의 가벼움을 비유. 鴻飛: 세속에서 초연함. 鴻儒: 대학자. 鴻爪: 과거의 사적이 흔적 없이 사라짐의 비유. 돌아가는 기러기가 다시 올 때의 목표로 눈 위에 남겨둔 발자국이 다시 돌아올 때는 형적이 없어 찾을 길이 없다는 뜻. 鴻藻: 대문장

 

3 행 함련: 인생사를 깊이 깨달음.-- 인생관의 반영.

寵辱: 영예와 모욕 영광과 치욕.

悲歡: 슬픔과 기쁨

如此:이와 같이. 이러함. 果然如此 아니나 다를까 역시 그렇구나.

인생을 살다가 보면은 언제나 기쁜 일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귀양을 가야하는 슬픈 경지도 있는 것이라는 삶의 진리를 깊이 깨닫고 계시다.

삶의 양면성을 느끼고 계시다. 임금의 총애를 받아 영의정 이라는 지위에 오르기도 했으나 , 임금께 불손한 언사를 함으로써 저 먼 남쪽 땅으로 귀양을 가야 하는 마음 아픔을 당해야 하는 인생을 깊이 깨닫고 계시다.

귀양가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 드리고 계시다. 그 내면 속에는 임금을 향한

변함없는 충성의 의지이다.

 

4 행 미련: 자신에 대한 위로--- 운명의 수용. 주제의 반영.

자신을 송별하려고 나온 슬픔에 잠긴 친지들에게

위로하는 심정도 담겨 있다. 서로가 헤어지는 인생길을 살아가는 것인데

깊은 근심과 수심에 빠지지 말고 운명에 순응하자는 내면적 결심의 다짐이다.

臨岐: 갈림길에 임함.

不必:…할 필요가 없다 / …하지 마라 / …할 것까지는 없다.

"不必" - 반드시가 아니다. { 반드시가 아니라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의미. 곧 부분부정 }

부분 부정 - { 부정사 + 必(필: 반드시), 常(상: 항상), 甚(심: 심히) + 서술어 }의 구조 : [ -한 것만은 아니다.]

예) * 勇者 不必有仁(용자 불필유인) : 용감한 사람이 반드시 인이 있는 것만은 아니다.

                                      < http://www.hanja.pe.kr/ 인용>

浪: 함부로 랑. 마구 랑.

• 헛되이 눈물 흘리지 않겠습니다 / 不必浪沾巾

• 오늘날 헤어짐 굳이 슬퍼할 것이 없다오 / 今分不必浪爲悲

生愁: 시름을 낳다. 근심이 일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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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불충의 죄를 지었으나 내면에는 임금 향한 일편단심의 忠誠이 있었음을 다음의 시를 통해서 볼 수가 있다.

己巳二月。被嚴旨特罷出城。路中口占。

기사이월。피엄지특파출성。노중구점

1689년<숙종 15 기사 64세> 이 월 이 일에 임금의 파직 엄명을 받고

궁궐을 나와서 길에서 입으로 읊고 받아쓰게 하다.

十年鐘漏未歸 십년 간 궁정 생활 못 떠나는 마음인데

匹馬今朝愧此 오늘 아침 말을 탄 이 행동 부끄럽네.

猶有戀君心一寸。 오히려 임금 향한 일편단심 있으나

不堪回首望神 머리 돌려 도성을 바라보기 어렵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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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의 시에서도 지극한 충성심을 볼 수가 있다.

유배지인 남쪽 장기 땅으로 가는 도중 조령고개를 넘으면서도 임금향한 간절한 충성심이 담겨 있으시다.

 

踰鳥嶺 (조령고개 넘으며)--------------

微臣罪大聖恩寬。 죄가 큰 미천한 신 임금 은혜 너그러워

禦魅南州分所安。 남쪽 땅에 유배는 내 분수에 편안하네.

只是戀君心自切。 임금을 사랑하는 마음은 간절할 뿐

獨憑高處望雲端 높은 곳에 기대어 구름 끝 바라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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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장기에 세운 <퇴우당 김수흥선생>유적비

 

지난 시간 장기에서의 있었던 사진을 보내주신 전태열 박사님께 고마움을 전해 드립니다.

옛 석실 서원 터 앞의 미호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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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적비 비문 전문>>

 

조선 중기 노론의 실세였던 김수흥金壽興선생은 1626년(仁祖 4)에 출생 자는 기지起之, 호는 퇴우당退憂堂, 시호는 문익文翼이며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의 손자로, 생부는 동지중추부사 광찬光燦이고, 양부는 동부승지 광혁光爀이며, 영의정 문곡文谷 수항壽恒의 형이다. 아우인 수항과 함께 문과에 급제한 뒤, 부교리·대사간·도승지·호조판서 등을 거쳐, 1673년(顯宗 14)에 판의금부사에 이어 우의정이 되고, 1674년 4월에 영의정에 승진했지만, 양사兩司의 탄핵으로 춘천에 유배되었다가 얼마 후 양주에 은거했다. 1680년(肅宗 6) 경신출척庚申黜陟으로 서인西人이 재집권하자 영중추부사를 거쳐 1688년(숙종 14) 다시 영의정에 올랐다. 1689년(숙종 15) 64세 때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남인南人이 정권을 장악한 뒤, 대간의 논박을 받아 삭탈관작을 당하여 문외에 출송되어 우리 고장 장기長鬐에 유배와서 1690년(숙종 16) 10월 12일(음) 향년 65세로, 아들 창열昌說이 의원을 구하러 한양으로 간 사이, 부인과 동생이 지켜보는 가운데 현성縣城 촌사村舍에서 영면했다. 1689년 4월과 6월에 문곡과 우암이 진도와 정읍에서 사사당한지 1년여가 지난 뒤이다. 당시 경주영장慶州營將이 편오군編伍軍 2초哨를 징발 운구했다 하여 물의를 빚기도 했다. 과거를 돌이켜 이를 거울삼아 현재와 미래를 생각하는 것이 우리들의 몫이라 인식하여, 이 고장 장기 유배 중에 읊은 약간의 시편 가운데 한 수를 번역하여 유적비에 함께 새겨서, 고인의 명복을 삼가 기원하는 바이다.

 

                                                                                             2008년 11월 9일(음 10월 12일)

 

                                                                           經營學博士 全泰烈 謹撰

                                                                           文 學 博 士 宋河璟 謹書

                                                                            長鬐發展硏究會 謹竪

 

蓬山卽事 봉산(장기)에서 보고 느낀 일

 

京洛十年成底事 한양에서 십년 동안 이룬 것이 고작

海山千里寄殘生 천리 밖 바닷가에 여생을 부치는 일인가

春宵旅榻仍無寐 짧은 봄밤에 잠 못 이루고 뒤척이며

臥聽長鯨鼓浪聲 자리에 누워 거센 파도소리만 듣고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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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우당 김수흥 선조님의 장기에서의 사진을 얻기위해 오갔던 메일.---------

1. 안동 김씨 대종중의 홈페이지 인연

2008-11-27 15:01 더 많은 사진이 게시되지 않습니다. 멜 연락주시면 보내드리겠습니다. -전태열-

2009-02-28 11:50 제 가문의 포토를 마련해 주신 것에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후손의 한 사람으로 깊이 부끄럽기도 합니다. 염치없는 마음으로 몇 장의 포토를 부탁 드립니다. 유적비만이 찍혀진 포토도 있는지요. 제 개인 블로그에 넣어도 되는지요.

퇴우당 조상님의 시문과 함께 전 태열 선생님의 사진과 같이 실으려고 합니다. - 김창현

2011-09-01 12:51 《Re》김창현 님 ,

ㅇ예전에 글만 올리고 이 사이트에 와보지 않았습니다.

지금보니 포토 부탁글이 있었네요.

따로 연락주시면 자세한 내용과 사진을 보내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전태열

2. 메일을 주고 받음

전태열 선생님께

저는 문곡 김수항 조상님의 12 대 후손중의 한 사람입니다. 퇴우당 조상님의 막내가 되시는 분이 문곡이시지요.

벌써 5 년의 세월이 흐른 것 같습니다. 장기에서 퇴우당 김수홍 조상님의 유적비 행사가 거행이 된 포토를 안동김씨 홈페이지에서 보고는 제가 선생님께 부탁을 드린다고 말씀을 드렸는데도 아무런 연락이 없으시고 해서 그냥 끝난 것이라고만 알고 섭섭했지만 몹시 안타까워했었지요. 한 번 내려간다는 일도 쉽지 않고 해서 지금까지 지내다가 오늘 퇴우당 조상님과 관련이 되는 시 한 편을 번역하고 제 개인 블로그에 올리려니 이 장기의 사진이 생각이 나서 홈페이지에 들어오니 재작년의 날짜로 선생님의 메일 주소가 있어 무척이나 반가운 마음으로 긴 시간은 지났으나 제게는 무척이나 필요한 사진이라 이렇게 뒤늦게 메일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제막식의 사진도 필요하지만 퇴우당 조상님의 장기에 관련이 되는 사진을 보내어 주시면 좋은 자료 소중히 쓰겠습니다.

뒤늦은 부탁이라 선생님께 무리한 요구가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하시는 일에 늘 가득한 기쁨이 넘치시며, 늘 건강한 나날을 보내시기를 두 손 모아 빌겠습니다. 좋은 소식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2013.2.15

 전태열 박사님께서 보내오신 답신.

 사진, 그리고 장기의 소식과 함께 메일을 보내오셨다.

네..감사합니다.

 

저도 잊고지낸지 오래되었습니다만 선생님의 메일을 받고 안동김씨홈페이지에 오랫만에 들어가봤습니다.

 

가문이든 집안이든 요즘은 개인사생활과 거리두고 사는 세상이라 참 안타까울 따름인데 선생님의 가문에 대한 관심이 참으로 반가우십니다.

 

저의 고향은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장기면인데 지금은 면단위로서도 작은행정구역처지가 되었지만

 

신라의 서라벌을 지키기위한 당시의 큰 역할과 행정구역으로 남쪽으로는 현재의 경남북도 경계선부터

 

북으로는 지도상의 토끼꼬리(?)라고 하는 호미곳까지 동해안전역의 왜구침입을 막는 중요요충지였습니다.

 

조선말기까지 이어져오다가 일제강점기에 감포.양남.구룡포.동해.대보.오천 등으로 다 찟기어져 이제는 조그만 소도읍에 불과합니다.

 

조선시대 한양에서 천리길이고 무신의 관할구역이어서인지 퇴우당어른뿐만 아니라 우암, 다산어른도 고향땅 장기에 유배생활을 하신 적 있습니다.

 

그 외에도 유명하신 당대의 정치가나 사상가들의 유배가 이어졌기에 이들의 고향문화와 사상발전에 기여한 공로도 대단하였습니다.

 

그래서 우암, 다산어른의 기념비를 제막하고 그 뜻을 기리고자 하였으며 세번째로 퇴우당 어른의 제막식을 제가 일체 맡아서 진행하였습니다.

 

당시의 간략한 자료와 행사 사진 몇 장을 보내오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늘 행복한 시간되십시요.

 

참고로 저도 고향떠나서 현재는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보낸사람 : Tyler Jeon 13.02.18 12: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