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의 서언>-----------------------------------
문곡 조상님께서 1622 년 청나라 사신을 영송하러 평북 의주(龍灣) 나가신 길에 아드님이 보낸 편지글의 답신이다. 객지에 나가 계셔도 큰 아들을 염려하고 걱정하는 아버지의 간곡한 사랑이 담긴 서간문이다. 이 당시에 큰 아드님은 15 세의 나이로 장가를 가셨다. 마지막 인사말의 짧은 글귀 하나가 마음에 깊이 와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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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集兒 <답 집아>----------------------------- 壬寅 1662년 현종 3 년---- 김 수항(金壽恒) 1629년(인조 7) -1689년(숙종 15) 자 久之 호 文谷 1662년 대제학 대사헌, 이조참판 예조판서 직으로 11 월 청나라 사신을 의주까지 환송하기 위해 머무실 때의 글이다. --------------------------------------- 큰 아들 창집(昌集)에게 어제와 오늘 파발 편으로 23 일과 24일에 보낸 편지를 잇달아 받아 보았다. 어머님을 모시고 편안히 지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매우 위안이 되는구나.
나는 오늘 선천에 도착하였고, 모레는 용만에 도착할 뿐이란다. 황 교관은 어떠한 사람인지 모르겠다. 인물과 문장은 또 어떻다고 말들을 하느냐.
만약 이 분이 훌륭한 가르침을 주신다면 찾아가서 배우는 것이 무방하겠다. 다만 네가 스스로 먼저 황 교관 댁으로 왕래하도록 하여라.
열심히 글을 읽지 않고 여러 아이들과 같이 떼를 지어 즐기며 놀지는 말아라. 커다란 해로움은 있어도 작은 이로움은 없느니라.
오늘도 또 이와 같이 한다면 집안에서 조용히 앉아 있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비록 찾아가서 배우더라도 이와같이 절대로 하지 말라는 것이 옳으니라.
하물며 지금 너는 관례도 치르고 장가를 갔으니, 더불어 지난날의 어린 시절과는 다른 것이다. 더욱이 무리의 아이들을 따라 쫓아가는 것은 옳지 않으니라. 보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지 말라. 삼가고 조심하여라.
또 글씨를 쓸 때에는 너무 바쁘지 않도록 해서로써 정서를 하고, 초서가 섞이지 않도록 하여라. 그렇게 하는 것이 지극히 옳은 것이다.
새해에는 편안하고 희망이 있기를 바란다. 멀리서 생각하며 위로하노라. ------------------------------------------------------------------------------ 한자 원문 ------------------------------------------- 昨今撥便。連見廿三廿四書。知侍奉穩過。深慰深慰。 余今到宣川。再明當抵龍灣耳。黃敎官不知何許人。 而人物文學。亦如何云耶。 若是善誨之人。則往學何妨但自前汝等往來敎官家。不爲勤讀。但與諸兒輩結黨游戲。有大害而無小益。今又如是。則莫如在家靜坐之爲愈。雖或往學。切勿如是可也。況汝今已加冠娶妻。與前日兒時有異。尤不可追逐群兒。以駭觀瞻。愼之愼之。且作書之時。若不至太忙。則以楷字精書。勿爲雜草。至可至可。 餘望過歲安吉。以慰遠念。 < 文谷集卷之二十八 書牘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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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 이해>--------------------------------------------------------------
문곡 김수항의 영정--------------- 족보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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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昨今撥便。連見廿三廿四書。知侍奉穩過。深慰深慰。
읽기
작금발편。연견입삼입사서。지시봉온과。심위심위。
撥 다스릴 발 穩 평온할 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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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역
1. 어제와 오늘 파발 편으로 23 일과 24에 보낸 편지를 잇달아 받아 보았다. 어머님을 모시고 편안히 지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매우 위안이 되는구나.
내용: 인사말. 자기 안부--- 편지 받음- 深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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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
昨今 ①어제와 오늘 ②요즈음 ③요사이
昨晩-어제저녁 昨夕= 昨暮= 昨月- 지난달 昨秋- 지난 가을
撥便 예전에, 나라의 급한 소식을 알리거나 문서를 전하기 위하여 발군(撥軍)이 가는 인편을 이르던 말. 撥軍-각 역참에 속하여 중요한 공문서를 교대 교대로 변방에 급히 전하던 군졸. 보발(步撥)과 기발(騎撥)이 있었다.
侍奉 모시어 받듦.
시봉체후(侍奉體候) 주로 편지 글에서, 어버이를 모시는 몸이라는 뜻으로 부모를 모시고 있는 사람에게 쓰는 말. 侍奉趨承- 웃어른을 모시고 마음에 들도록 섬기는 일
侍養- 시중들며 봉양함 侍湯- 부모의 봉양에 약을 시중함 侍見- 옆에 가까이 모 시거나 알현하는 일
深慰 심히 위로가 됩니다. 매우 위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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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余今到宣川。再明當抵龍灣耳。
黃敎官不知何許人。而人物文學。亦如何云耶。
읽기
여금도선천。재명당저용만이。
황교관불지하허인。이인물문학。역여하운야。
抵 다다를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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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역
2. 나는 오늘은 선천에 도착하였고, 모레는 용만에 도착할 뿐이란다.
황 교관은 어떠한 사람인지 모르겠다. 인물과 문장은 또 어떻다고 말들을 하 느냐.
내용: 나의 소식. 황 교관에 대한 궁금증.- 내면에는 자식들의 공부를 걱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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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
宣川 평안북도에 있는 읍. 그리스도교 포교(布敎)의 중심지(中心地)
再明 다시 밝는 날. 再明日- 모레 再明年 -후년
當抵 당연히 다다르다. 도착하다. 마땅히 처하다.
龍灣 평북 義州의 별칭이다. 의주는 고려시대의 용만현(龍灣縣)으로서 또는 화의(和義)라고도 하였다.
敎官 학술을 가르치는 관리. 童蒙敎官= 조선 시대에, 어린이를 교육하기 위하여 각 군현에 둔 벼슬. 童蒙訓導를 고친 것이다.
何許人 어떠한 사람 어떠한 사람. 또는 그 누구
부지하허인(不知何許人) 알지 못할 어떠한 사람.
文學 문자로 기록된 모든 것이 문학이라는 뜻이지만
이 글에서는 모든 문장을 뜻하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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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벼슬 이름 1 고려 시대에, 동궁에서 세자에게 글을 가르치는 일을 맡아보던 정육품 벼슬.2 고려 시대에, 방어진에서 강학(講學)을 맡아보던 벼슬.3 조선 시대에, 세자시강원 에 속하여 세자에게 글을 가르치던 정오품 벼슬.
文學 문학의 어원은 문자로 기록된 모든 것이 문학이라는 뜻이 포함되었다.
‘무(武)’에 상응하는 ‘문(文)’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문(文)’은 도(道)나 형상(形象), 질서(秩序),현시(顯示) 등의 뜻으로 쓰이며, 천지의 질서이며 사람의 도(道)이며 자연의 형상이라 생각하였다. 문학이란 개념은 학예(學藝), 경사(經史), 시문(詩文) 등을 모두 말하는 것이며 뒷날 어학(語學), 수사학(修辭學), 논리학(論理學), 사학(史學) 등의 학문과 문장을 일컫는 말로 사용되었다.
주자(朱子)는 시(時) ․서(書)․예(禮)․악(樂)에 대한 학식이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을 언어로 능히 표현할 수 있는 것을 문학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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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若是善誨之人。則往學何妨 但自前 汝等 往來 敎官家。
不爲勤讀。但與諸兒輩結黨游戲。有大害而無小益。
今又如是。則莫如 在家 靜坐之爲愈。
雖或往學。切勿如是可也。
읽기
약시선회지인。칙왕학하방 단자전 여등 왕래 교관가。
불위근독。단여제아배결당유희。유대해이무소익。
금우여시。칙막여 재가 정좌지위유。
수혹왕학。절물여시가야。
誨 가르칠 회 妨 방해할 방 勤 부지런할 근 游 놀 유 愈 나을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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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역
3. 만약 이 분이 훌륭한 가르침을 주신다면 찾아가서 배우는 것이 무방하겠다. 다만 너희들이 스스로 먼저 황 교관 댁으로 왕래하도록 하여라.
열심히 글을 읽지 않고 여러 아이들과 같이 떼를 지어 즐기며 놀지는 말아라. 커다란 해로움은 있어도 작은 이로움은 없느니라.
오늘도 또 이와 같이 한다면 집안에서 조용히 앉아 있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비록 찾아가서 배우더라도 이와같이 절대로 하지 말라는 것이 옳으니라.
내용: 배움에 대한 당부-- 열심히 글을 읽어라.- 구체적인 부분까지 신경을 쓰시는 아버님의 자세함이 깃들어 있다.
그 당시 큰 아드님의 나이는 15세였다.< 金昌集- 1648-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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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
善誨 훌륭하게 가르쳐 잘못을 뉘우치게 함. 또는 그렇게 하도록 충분히 가르침.
勤讀 글을 부지런히 읽음
結黨 徒黨을 결합함. 당파를 맺음 정당을 조직함. 여기서는 아이들이 떼거리로 몰 려 다니는 일.
游戲 장난하며 놂. 장난. 놀이.
游款-사귀어 친함 游舊- 사귀어 오랜 친구 游禽-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새
游冬-씀바귀 游樂-즐겁게 놂 遊覽- 구경하며 돌아다님 游歷- 유람하며 여러 곳을 돌아다님 游盤-즐거이 놂 游放-멋대로 놂 游步-놀러 돌아다님 游絲- 아지랑이
游食之民- 하는 일 없이 놀 고 먹는 사람 游衍- 멋대로 놂 游虞- 놀며 즐김
游子- 나그네 여객 빈들빈들 노는 사람 遊蕩- 방탕하게 놂 游學- 타향에 가서 공부함 游閑- 한가롭게 놂 游宦- 먼 지방의 관리가 됨. 타향에서 벼슬살이를 함
如是 이렇게 하면 如此와 같음 위문장을 대신하는 어떤 상황을 나타냄
莫如 부사. 앞에서 말한 일이 뒤에서 말하는 일에 미치지 못함을 나타냄.
- 만 못하다. - 만 같은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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莫如 최상급 비교형
{ A+莫如(莫若)+B : A는 B만 같은 것이 없다.} { A+莫+서술어+於+B : A는 B보다 -한 것이 없다}
✱ 黃金萬籝 不如敎子一經
賜子千金 不如敎子一藝
至樂莫如讀書 至要莫如敎子
황금이 바구니에 가득하다 해도
자식에게 하나의 경서(經書)를 가르침만 못하고
자식에게 천금을 준다고 해도
자식에게 하나의 기예(技藝)를 가르쳐줌만 못하니라
지극한 즐거움은 독서만 한 것이 없고
지극히 중요한 것은 자식을 가르치는 것만 한 것이 없느니라
☞ ≪명심보감(明心寶鑑)≫ <훈자(訓子)>
✱ 아마도 나만큼 알지는 못할걸세 / 莫如我最
✱당쟁보다 더 혹독한 것이 없었지/莫如黨比酷
✱사람에게 해독을 끼치는 것 술보다 더한 것이 없다오 / 毒人莫如酒
✱ “아가위 꽃송이 활짝 피어 울긋불긋, 지금 어떤 사람들도 형제만 한 이는 없지.〔常棣之華 鄂不韡韡 凡今之人 莫如兄弟〕”〈소아(小雅) 상체(常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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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況汝今已加冠娶妻。與前日兒時有異。
尤不可追逐群兒。以駭觀瞻。愼之愼之。
且作書之時。若不至太忙。則以楷字精書。勿爲雜草。至可至可。
읽기
황여금이가관취처。여전일아시유이。
우불가추축군아。이해관첨。신지신지。
차작서지시。약불지태망。칙이해자정서。물위잡초。지가지가。
娶 장가들 취駭 놀랄 해 瞻 볼 첨 愼 삼갈 신 忙 바쁠 망 楷 해서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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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역
4. 하물며 지금 너는 관례도 치르고 장가를 갔으니, 더불어 지난날의 어린 시절과는 다른 것이다. 더욱이 무리의 아이들을 따라 쫓아가는 것은 옳지 않으니라. 보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지 말라. 삼가고 조심하여라.
또 글씨를 쓸 때에는 너무 바쁘지 않도록 해서로써 정서를 하고, 초서가 섞이지 않도록 하여라. 그렇게 하는 것이 지극히 옳은 것이다.
내용: 아들에게 당부-- 무리의 아이들과 어울리지 말라.- 관례를 치른 나이이니 더 욱 몸가짐에 조심하라.
글씨는 해서로 단정하게 써라.-- 마음가짐에 대한 바른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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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
加冠 성년식인 관례를 치르며 갓을 처음 쓰는 일
冠禮 예전에, 남자가 성년에 이르면 어른이 된다는 의미로 상투를 틀고 갓을 쓰게 하던 예식. 유교에서는 원래 스무 살에 관례를 하고 그 후에 혼례를 하였으나 조혼이 성행하자 관례와 혼례를 겸하여 하였다.
觀瞻 여러 사람이 다 같이 봄. 여러 사람이 우러러봄.
太忙 너무 바쁨. 너무 급함.
楷字 해서(楷書)로 쓴 글자. 楷書 예서에서 변한 것으로,
똑똑히 정자(正字)로 쓰는 것
精書 정신(精神)을 들이어 글씨를 씀 . 정성을 다하여 글씨를 씀
雜草 잡풀. 여기서는 글씨에 초서가 섞이는 것.
草書 넓은 의미로는 자체(字體)를 간략하고 빠르게 쓴 초체(草體)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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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餘望過歲安吉。以慰遠念。
읽기
여망과세안길。이위원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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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역
5 새해에는 편안하고 희망이 있기를 바란다.
멀리서 생각하며 위로하노라.
내용-- 서간문의 결말.--- 인사말.-- 멀리서 생각하며 위로함.
멀리 떨어져 계시면서도 큰 아들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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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
餘望 ①한 번 실패(失敗)하였으나 아직 남아 있는 희망(希望)
②앞으로의 희망(希望)
安吉 편안하고 운이 좋아지는 것.
過歲 설을 쇰. 해를 보냄
遠念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의 신상을 생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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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아래의 시 두 편은 용만(= 평북 의주의 다른 이름)에 머무실 때에 돌아가신 할아버님(= 청음 상헌)의 아픈 기억을 회상하며 쓴 시이다.
♣ 청음의 심양瀋陽의 質館 생활 < 1640년 11월 瀋陽 1645년 2월> 質館 -심양에 있는 볼모로 잡혀 있는 집
1639년 瀋陽에 助兵하지 말기를 청함 - 심양 구류 생활의 발단이 된 차자,
인조 18 1640 경진 71세 11월 瀋陽으로 압송되다.
인조 19 1641 신사 72세 北館에 구류되다 ○ 12월, 병이 심해져 義州로 보내지다.
인조 20 1642 임오 73세 1월, 의주에 도착하여 구류되다
인조 21 1643 계미 74세 1월, 다시 瀋陽으로 잡혀가다.
東館에서 北館으로 옮겨지다.
1644년에 瀋陽 質館에 4월, 質館에 우거하게 되다.
인조 23 1645 을유 76세 2월, 世子와 함께 瀋陽에서 西郊로 돌아옴
상소하고 石室로 나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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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술보 제작에 참여하신 종가댁의 故 金儀東 아저씨의 글씨.------------------
<노트>--------------------------------------------------------
1662년 (현종 3 임인 년) 34세에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기 위해
의주에 머물러 계실 때의 작품이다. 조부님을 그리워하며 아픈 마음을 담 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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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龍灣感舊 <용만 감구>---------------
餘生忍訪壽星村。每到龍灣便斷魂。
남은 생애 어찌 차마 수성마을 찾아가나
용만 땅 갈 적마다 혼이 문득 끊어지네.
往事流傳悲父老。家聲忝辱愧兒孫。
지난일 흘러가니 가신 어른 슬퍼지고
집안 명성 굴욕 더해 손자들 부끄럽네.
山連雪窖曾留地。水接星槎舊泝源。
산 겹겹 눈 움집은 일찍이 머무신 곳.
물가 곁에 배를 타고 옛 자취 거스르니.
淚盡統軍亭下路。百年懷抱向誰論
눈물 다한 통군정 아래 길로 내려오니
긴 세월 품은 회포 뉘와 함께 말할까. <文谷集卷之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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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
1670년 <현종 11경술년> 42세에 6월 예조 판서 자격으로
청 나라 사신을 義州까지 전송하며 머무셨을 때에 두 번째로 지으신 龍灣에 대한 감회를 읊으신 작품이다. 내면적으로는 조부님을 그리워하는 손자의 아픔이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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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龍灣感懷 용만 감회 ----------------------
行窮絶域暫停轅。 가는 길 궁벽하여 잠시 수레 멈춰 서서
却算歸程更斷魂。 돌아갈 길 헤아리니 더욱 정신 아찔하네.
江到九龍秋水闊。 구룡강 도달하니 가을 물 확 트였고
山橫白馬朔雲屯。 백마산 가로질러 북방구름 모여드네.
邊城暮雨遙連海。 변방의 저녁 비는 바닷가로 이어졌고.
客舍寒燈早閉門。 객사엔 차운 등불 일찍이 문 닫았네.
何處感懷偏掩淚。 오로지 눈물 가려 느끼던 곳 어디인가
統軍亭下壽星村。 통군정 아래로 수성 마을 생각나네.
<文谷集卷之三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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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작품에 등장하는 龍灣 壽星村 마을에 대한 淸陰 金尙憲의 기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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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의 기록들은 모두가 한국 고전 번역원 자료 인용.
1.청음 유적비(淸陰遺蹟碑)
統軍西南岸。閣碑而庇之。刻曰淸陰先生遺蹟碑。昔在己卯。淸陰之被拘瀋陽也。留灣上之壽星村。與徐相國景雨,李尙書顯英相追遊。其後蘇侯斗山尹玆土。因其地豎碑。逮至李裕民之下車。改石而新之。閔監司鎭遠作陰記。
北塞南冠客。留連弄楚音。壽星千載後。村老誦淸陰。
통군정 서남쪽 강 언덕에 비각을 세워 보호하고 있는데, 청음선생유적비(淸陰先生遺蹟碑)라고 새겨져 있다. 옛날 기묘년(1639, 인조 17)에 청음(淸陰)이 심양(瀋陽)에 잡혀가게 되었을 때 의주의 수성촌(壽星村)에 머물러서 정승 서경우(徐景雨) 및 판서 이현영(李顯英)과 서로 왕래하며 놀았다. 그 후에 관찰사 소두산(蘇斗山)이 이 고장을 다스렸을 때 그 땅에다가 비석을 세웠고, 이유민(李裕民)이 목사로 내려왔을 때 돌을 바꿔서 새로 만들었다. 감사 민진원(閔鎭遠)이 비음기(碑陰記)를 지었다.
북녘 변경에 남관 쓴 나그네 / 北塞南冠客
오래 머물러 초땅 말을 하였네 / 留連弄楚音
수성촌 천 년 후에 / 壽星千載後
촌로들이 청음을 칭송하누나 / 村老誦淸陰
<지은이 미상.계산기정(薊山紀程)제1권 계해년(1803, 순조 3) 11월[1일-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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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金景善의 燕轅直指
統軍亭下。有壽星村故墟。仁祖辛巳。淸陰自瀋陽還。留此一年。與徐相國景雨,李尙書顯英。適同住一村。相與酬唱。仍命其村曰壽星。蓋三公年皆耆艾也。淸陰詩曰 天涯邂逅接柴門。歡會依然似故園。他日龍灣與地誌。定知編入壽星村。 其後村爲廢邱。立一碑。識其處。刻淸陰先生碑五字。作屋而庇之。卽蘇侯斗山爲灣尹時所爲云。
통군정 아래 수성촌(壽星村)이란 옛터가 있는데, 신사년(1641, 인조 19)에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이 심양(瀋陽)에서 돌아오다가 여기에서 1년을 머물렀다. 그때 마침 상국(相國) 서경우(徐景雨), 상서(尙書) 이현영(李顯英)과 같이 한 마을에 살게 되어 서로 수창(酬唱)하면서 그 마을을 수성(壽星)이라 이름 지었으니, 그것은 세 사람의 나이가 모두 많았기 때문이다. 청음 김상헌의 시에,
천애에 우연히 사립문을 접하니 / 天涯邂逅接柴門
즐거운 모임 의연히 고향과 같네 / 歡會依然似故園
뒷날 용만 지리지에는 / 他日龍灣輿地誌
반드시 수성 마을이 편입되리라 / 定知編入壽星村
라고 하였다.
그 뒤 마을은 폐허가 되었으나 비석 하나를 세워 그 자리를 표시하여 ‘청음선생비(淸陰先生碑)’ 다섯 자를 새기고 집을 지어 덮었으니, 곧 소두산(蘇斗山)이 의주 부윤(義州府尹) 때 한 것이라고 한다. < 金景善의燕轅直指卷之一임진년(1832, 순조 32) 11월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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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老稼齋 金昌業의 燕行日記 <임진년(1712, 숙종 38) 11월>
自書院轉往壽星村舊墟。曾祖庚辰年被拘瀋館凡六年。辛巳冬。有病還此留一年。與徐相國景雨,李尙書顯英。適同住一村。相與酬唱。仍命其村曰壽星。蓋曾祖與徐,李兩公年耆艾也。曾王考詩曰。天涯邂逅接紫門。歡會依然似故園。他日龍灣輿地誌。定知編入壽星村。村在統軍亭下。而今爲廢墟。立一碑識其處。刻淸陰先生碑五字。作屋而庇之。卽蘇侯斗山爲府尹時所爲也。伯氏歸凝香堂。余向統軍亭。濟侄亦隨來。俗以赴燕人登此亭爲忌。人或勸止。而竟登焉。鴨綠江自東北來。至亭下分爲兩峯
서원을 떠나 수성촌(壽星村) 옛터에 갔다. 증조부(김상헌)가 경진년(1640)에 심양에 잡혀가서 6년동안 억류되었는데, 신사년(1641) 겨울에 병 때문에 이곳에 돌아와 1년을 머물렀다. 상국 서경우(徐景雨), 상서 이현영(李顯英)과 마침 한 마을에 있으면서 서로 시를 수창(酬唱)하였다. 그래서 마을의 이름을 ‘수성(壽星)’이라 하였다. 아마도, 증조와 서 상국, 이 상서 양공은 연세가 5, 60이었던 모양이다. 증조의 시에,
천애의 해후가 자문에 접하니 / 天涯邂逅接紫門
반가운 만남은 고향과 흡사하네 / 歡會依然似故園
뒷 날 용만 여지지에는 / 他日龍灣輿地誌
정녕코 수성촌이 편입되리라 / 定知編入壽星村
고 하였다. 이 수성촌은 통군정(統軍亭) 밑에 있는데 지금은 폐허가 되고 비석 하나가 그 자리를 알렸다. 그리고 청음선생비(淸陰先生碑)란 5자를 새겨 비각(碑閣)으로 덮었다. 이는 소후 두산(蘇侯斗山 1627~1693)이 이곳의 부윤으로 있을 적에 세운 것이다. 백씨는 응향당(凝香堂)으로 돌아가고 나는 통군정으로 향했는데
김제겸(金濟謙)이 따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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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淸陰 金尙憲의 문집 淸陰先生集 雪窖集 에서
紀事。奉呈重卿,施伯二老兄。
吾三人俱老。俱離憂患。俱寄一村。豈偶然哉。遂以壽星名村。庶幾後人因名思憶。然未知果能使之思憶也。
天涯邂逅接柴門。歡會依然似故園。他日龍灣輿地志。定知編入壽星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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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을 기록하여 중경(重卿)과 시백(施伯) 두 노형께 바치다
우리 세 사람이 모두 똑같이 늙었고 똑같이 우환에 걸렸으며 똑같이 같은 마을에 살고 있으니, 이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이에 드디어 마을의 이름을 수성촌(壽星村)이라고 하였는바 후세 사람들이 마을 이름을 인하여 이 일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능히 그들로 하여금 생각하게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천애 밖서 서로 만나 삽짝 접해 살거니와 / 天涯邂逅接柴門
기쁜 모임 전과 같아 고향 사는 것만 같네 / 歡會依然似故園
이 뒷날에 용만 땅의 여지지를 지을 적에 / 他日龍灣輿地志
수성촌을 편집하여 넣을 거를 잘 알겠네 / 定知編入壽星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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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긴 글 읽어 주셔서 아주 고맙습니다. 큰 오역이 있으면 지적 바랍니다.
청음. 문곡의 후손 중 한 사람입니다.
'산문의 향기 > 안동가문의 산문 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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