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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윤종일 교수(서일대 민족문화과) 석실서원은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의 도덕과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서원으로, 이후 김상용(金尙容), 김수항(金壽恒), 민정중(閔鼎重), 이단상(李端相), 김창집(金昌集), 김창협(金昌協), 김창흡(金昌翕), 김원행(金元行), 김이안(金履安), 김조순(金祖淳)이 배향되었다. 이경석(李暻奭)을 위시한 당대 조정의 명사들과 사림(士林)의 발의로 1656년(효종 7) 창건된 석실서원은 사림의 강학(講學)과 장수(藏修)라는 서원 본래의 기능만이 아니라 사림정치 이래 붕당정국이 변전하는 속에서 정치적․사회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서원으로 발전하였다. 처음에는 서인계 서원으로, 이어 노․소론 분당 후에는 노론계, 그리고 노론 내에서 인물성(人物性) 논쟁으로 호론(湖論)․낙론(洛論)이 갈릴 때는 낙론의 진원지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조선 후기 사대부문화의 큰 특색인 진경문화(眞景文化)의 산실로서 그 역할을 수행하였다. 또한 영․정조 연간의 탕평정국에서는 한때 조제(調劑) 탕평에 반대하는 의리론(義理論)의 본거지였으며, 국구(國舅) 김한구(金漢耈)와 결탁한 호론게의 정치세력에 대항하는 척신 홍봉한의 정치적 지지세력이 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김상헌의 직계 후손이 주축이 된 안동김씨 세도정권하에서는 집권명분을 정당화하는 정치도구가 되기도 하였다. 즉, 석실서원은 조선 후기 많은 서원 가운데서도 정치적․사상적․학문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던 서원 중 하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석실서원은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철폐된 후 유적․유물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 정확한 위치나 건물규모 및 배치 등에 관한 기본적인 것마져 없어지고 세인의 관심에서 멀어진 상태로 방치되고 있다. 이 방치된 석실서원을 고증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자료중의 하나가 겸재 정선(鄭敾; 1676-1759)의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 중의 「석실서원도」이다. 「석실서원도」는 강 위에서 바라본 경치를 부감법(俯瞰法)으로 그린 것으로 석실서원 주변의 풍광이 묘사되어 있다. 겸재는 진경산수(眞景山水)의 대가로 사실적 기법을 사용하였으므로 이 그림을 정확히 분석하면 석실서원의 위치, 건물양식, 규모를 밝히는 데 크게 참고가 될 것으로 생각된다. 경교명승첩은 정선이 64세 때인 1740년 겨울부터 1741년 초여름까지 그린 그림들을 하나의 화첩에 묶은 것이다. 상하 두 책으로 전해왔으며 현재 간송미술관에 보관되어 있다.
정선이 석실서원과 삼주삼산각을 그리게 된 것은 안동 김씨 일문과의 깊은 교분에서 연유한다. 그는 김창집의 도움으로 관로(官路)에 진출하였으며, 김수항의 여섯 아들인 ‘육창(六昌)’ 그 중에서도 특히 김창흡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창흡은 그 형인 김창협과 함께 진경문화의 배양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진경시문학의 이병연(李秉淵), 진경산수화의 정선(鄭敾), 인물풍속화의 조영석(趙榮祏) 같은 대가들이 모두 김창흡 형제들에게서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으면서 자신들의 기예(技藝)를 성숙시켜 나갔던 것이다. 석실서원은 이들의 근거지의 하나이자 진경문화의 산실이었던 셈이다. 「석실서원도」는 석실서원을 추정 복원할 경우 가장 구체적인 자료가 될 것으로 평가된다. 그림 왼쪽의 미호(渼湖)는 화제이다. 미호는 석실서원 및 삼주삼산각과 미사리 사이의 호수처럼 보이는 한강을 지칭하는 것으로 동호(東湖)와 서호(西湖)와 함께 도성 부근의 경승으로 유명하다. 석실서원에 추배된 김원행의 아호인 ‘미호’도 추측컨대 여기에서 따온 것이 아닌가 한다. 「석실서원도」에 나타난 좌측의 건물들이 석실서원이다. 이를 분석해 볼 때 석실서원은 전형적인 서원 형식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안쪽에는 사우(祠宇)가 보이고 서재(西齋) 건물과 누정(樓亭)의 모습이 확연하다. 「석실서원도」를 구체적으로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다. 중앙의 동산은 모장끝산으로 생각되며, 우측면에는 북두천이 흐르고 있다. 이 북두천은 원래 바위가 7개가 있어 칠성바위라고 호칭된 데서 붙여진 이름인데 현재는 홍유천이라고 불린다. 모장끝산의 능선 상단에 누정이 자리잡고 있다. 건물 주변은 숲으로 둘러쌓여 있고 한강을 주망하기 좋은 장소이다. 전망이 대단히 아름다웠을 것으로 집작된다. 건물 규모는 정면이 2칸이고 측면은 불확실하지만 1칸 또는 1칸 반으로 추정된다. 건물 형태는 팔작지붕에 방 1칸과 누마루가 달린 복합누정이다. 서원의 별채로서 휴식공간으로 활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서원의 중심건물들은 좌측면 토미재 산 기슭에 위치하고 있으며 3채의 건물이 보이는데 숲으로 가려져서 정확한 건물 수는 알 수 없다. 가장 위쪽의 건물은 사우(祠宇)이다. 규모는 짐작하기 어려우나 지붕의 형태는 맞배 양식을 취하였음이 확인된다. 이 건물의 장축은 동서선상으로 되어 있다. 사우로 추정되는 건물과 직각에 놓여 있는 건물은 장축이 남북선상으로 되어 있으며 재실로 생각된다. 그림상으로는 서재(西齎)만이 확인 가능하나 숲에 가려진 부분에 동재(東齋)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재실은 팔작지붕 양식을 취하고 있다. 맨 아래 선물은 3칸으로 되어 있으며 벽이 없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어 누정으로 추측된다. 누정은 출입처로 사용되기도 하고 강당으로도 활용되나 이 경우 성격을 명확하게 규정할 수는 없다. 서원의 아래로는 10여호의 초가들이 그러져 있다. 이 건물들은 독립된 가호(家戶)라기 보다는 서원에 부속된 민가(民家)로 파악된다. 그것은 모든 가옥이 서원을 중심으로 설치된 장리(長籬) 속에 위치하고 있는 것에서도 추정이 가능하다. 서원 소속의 노비 또는 전호들의 거주지일 가능성을 상정해 볼 수 있다. 「석실서원도」와 함께 서원의 규모를 추정할 수 있는 근거는 김원행의 문인 황윤석(黃胤錫)이 남긴 일기 『이재난고(頤齋亂藁)』와 주민의 증언이다. 각종의 문헌 사료에서 사우(祠宇), 재실(齋室), 강당(講堂), 누정(樓亭) 건물과 연못, 영당(影堂)이 확인된다.
위 자료 및 주민 제보와 석실서원도의 분석을 종합하여 보면 석실서원 경내와 주변에는 다수의 건물과 시설이 영조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서원은 사우(祠宇)와 재실(齋室), 강당(講堂). 누정(樓亭), 고직사(庫直舍)를 온전히 갖춘 전형적인 구조를 갖추고 있었으며, 전정(前庭)에는 연당(淵塘)이 배치되고 있다. 서원 부근에는 영당이 있어 문충공(文忠公) 김상용(金尙容) ․ 문충공(文忠公) 김수항(金壽恒) ․ 문강공(文康公) 김창흡(金昌翕)의 영정(影幀)을 모셨으며, 모장끝산에는 별도의 누정이 있어 별채 기능을 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밖에 『양주읍지』석실서원조의 기가를 보면 서원 소속의 원생(院生)이 20인이고 재직(齋直) 10인, 모군(募軍) 40인으로 나타나고 있다. 서원의 규모를 짐작하게 해주는 사료로 평가된다. 『양주읍지』의 간행시기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이 내린 1868년(고종 5년) 이후인 1871년 이어서 현실을 정확히 반영하였는지 의문이 있지만 인원에 비례하여 다수의 건물군이 존재하였을 것으로 상정해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자료분석에 의거한 석실서원의 배치구조, 건물양식, 건물구조의 추정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서원유지가 완전히 교란된 현 상활에서는 간접적인 자료들이 서원의 형태와 규모를 근사하게나마 추정할 수 있는 유력한 근거가 된다는 점에서 새롭게 평가되어야 한다고 사료된다. 석실서원은 현재 터만 남아 방치된 상태이다. 당시 사용되었던 주춧돌은 사방에 흩어져 있거나 정원석으로 사용되고 있다. 특히 이 지역은 경관이 좋아 카페가 들어서는 등 석실서원의 원형을 찾을 수 없어 아쉬움이 있다. 빠른 시일 내에 석실서원을 복원하여 지역의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면 하는 바램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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