石室書院 (석실 서원)--------
김 창흡(金昌翕)
1653년(효종 4) - 1722년(경종 2)
자 子益 호 洛誦子, 三淵 시호 文康
雲雪渾江漲。孤淸石室峰。
눈보라에 뒤섞여 강물 넘치고
석실의 산봉우리 홀로 맑구나.
庭留碑突兀。席有講從容。
뜨락에 남은 비각 우뚝 솟았고,
말없이 강의 듣던 자리만 있네.
夜氣存山木。風襟會澗松。
밤기운 산목에 깃들어 있고,
마음은 간송에 모이어 있네.
言歸五柳宅。更欲護先蹤。
오류선생 댁으로 꼭 돌아가서
선대의 남긴 자취 다시 지키리.
<三淵集卷之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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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정리
1. 2 행( 두련)- 석실서원의 마을 정경
3 .4 행( 함련)--- 묘정비의 모습. 공부하던 학생들 모습
5. 6 행( 경련)-- 연약한 자신의 모습(山木.澗松- 자신의 비유)
7. 8 행 ( 미련)-- 자신의 결의와 맹세 (오류- 도연명- 청음 비유)
✤ 43 세에 석실서원을 찾아 학문의 뜻을 다짐하는 모습이다. 청음의 정신을 이어 가겠다는 굳은 의지이다.
석실서원 묘정비가 이 곳 석실 서원 터에 분명히 있었다.
庭留碑突兀- 송시열 선생이 쓰시고 김수증이 글씨를 쓴 석실서원 묘정비를 말함.
지금은 이곳에 없고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 산 5 번지 석실 마을에 있다.
반드시 이곳으로 옮겨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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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대 이전까지는 경기도 남양주시 수석동 45 번지 미음 1 통 고산로 126번지 길을 따라 올라가면 양주 조씨의 사당인 永慕齋 입구 서쪽 끝 담장 아래에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다가 1930 년 이후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 산 5 번지 석실마을 안동김씨의 세장지지(世葬之地) 로 옮겨왔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석실서원묘정비는 1672년 현종13 년에 건립하였다.
지금 현재는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 산 5 번지 김번 조상님 묘역으로 들어가기 전에 송백당유허비(松栢堂遺墟碑), 취석비(醉石碑),
석실서원묘정비(石室書院廟庭碑), 도산석실려(陶山石室閭)·고송오류문(孤松五柳門)등의 비석과 함께 碑群을 이루고 서 있다.
석실서원묘정비(石室書院廟庭碑)는 원래 있었던 자리에 다시 세워져야 한다.
지금은 1987년9월 17일 경기도에서 세웠다는 화강암 비석 하나만이 趙末生(1370~1447) 묘역을 올라가는 계단 오른 쪽에 멀리 앞쪽 미호강을 바라보며 쓸쓸히 서 있다.
작년 가을 쯤 갔을 때는 오랜 노송들이 몇 그루가 있었는데 베어졌고, 그 자리에 새로 어린 소나무를 심어 놓았다. 오른 쪽으로는 그래도 오랜 세월을 지켜온 노송 하나가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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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재(寒水齋)권 상하(權尙夏)<(1641년(인조 19) 1721년(경종 1) 자 致道 호 遂庵, 寒水齋, 黃江居士 본관 安東> 어르신의 石室書院 祝文에서 다음처럼 노래하였다.
脫屣榮途。 영화의 길 신짝처럼 팽개치고
專心聖門。 오로지 마음은 성인의 도 닦으니
高風正學。 높은 풍도 바른 학문 널리 펴서
儒林所尊。 유림들 모두가 높이 숭상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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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대 이전까지는 경기도 남양주시 수석동 45 번지 미음 1 통 고산로 126번지 길을 따라 올라가면 양주 조씨의 사당인 永慕齋 입구 서쪽 끝 담장 아래에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다가 1930 년 이후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 산 5 번지 석실마을 안동김씨의 세장지지(世葬之地)로 옮겨왔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석실서원묘정비는 1672년 현종13 년에 건립하였다.
지금 현재 석실서원묘정비(石室書院廟庭碑)는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 산 5 번지 김 번(金璠, 1479년 ~ 1544년) 조상님 묘역으로 들어가기 전에 송백당유허비(松栢堂遺墟碑), 취석비(醉石碑), 도산석실려(陶山石室閭)·고송오류문(孤松五柳門)등의 비석과 함께 碑群을 이루고 서 있다.
석실서원묘정비(石室書院廟庭碑)는 원래 있었던 자리에 다시 세워져야 한다.
지금은 1987년 9월 17일 경기도에서 세웠다는 화강암 비석 하나만이 趙末生(1370~1447) 어르신의 묘역을 올라가는 계단 오른 쪽에 멀리 앞쪽 渼湖강을 바라보며 쓸쓸히 서 있다.
작년 가을쯤 갔을 때는 오랜 노송들이 몇 그루가 있었는데 베어졌고, 그 자리에 새로 어린 소나무를 심어 놓았다. 오른 쪽으로는 그래도 오랜 세월을 지켜온 노송 하나가 반갑게 서 있었다. 오른쪽에 새로운 주택 한 채가 있었고, 화강암 비석 앞 빈 땅에는 누가 밭농사를 지었던 흔적이 묻어 있었다. 검은 비닐과 쓰다가 남은 비료 포장지가 버려져 있었다. 과거 강학과 수양의 도량이었던 장소였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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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년 3 월 석실 서원 터의 모습들
조말생 어르신 산소로 오르는 계단
석실서원지 표석
오랜 세월을 석실을 지켜온 소나무
새로 심은 소나무 모습들
밭으로 쓰인 흔적이 보인다. 비닐이 늘어져 있다.
석실 표석에서 내려다 본 미호강
수석동에 있는 석실 마을 회관
고개 넘어 가면 미음 나루터의 표석이 보인다.
석실이라는 마을이 두 곳이라 혼돈하기가. 쉽다.
1. 석실마을---- 경기도 남양주시 덕소 5 리-- 안동 가문의 世葬地로 묘소와 석실서원 묘정비가 있다. 원래는 남양주시 수석동에 있었던 비이다.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니다. 다시 수석동으로 옮겨져야 한다. 그리고 다시 석실서원을 재건하여야 한다.
2. 석실 마을- 경기도 남양주시 수석동 산 2-1 서원말. 미호강이 앞쪽에 흐름. 서 쪽으로 고개 하나를 넘어가면 渼陰 나루터가 있다. 1864 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인하여 건물들이 사라지고 지금은 1987년9월 17일 경기도에서 세웠다는 화강암 비석만이 쓸쓸히 서 있다. 석실서원 묘정비는 남양주시 덕소 마을에 있다.
석실 서원 터 표석을 보려면은 미호강 줄기 따라 가다가 남양주시 수석동 석실마을로
석실서원 묘정비를 보려면 경기도 남양주시 덕소 5 리 석실마을로 가시기를.
남양주시 덕소리에 있는 석실마을
안동가문 세장지가 있는 산소 가기 전에 있는 碑群 맨 앞쪽에 석실서원 묘정비가 서 있다. 남양주 수석리 석실마을에서 이전.
石室書院 배향자 명단 | |||||
1656 년 효종 7 년 건립- 1663 년 현종 4 년 石室祠로 편액 사액 서원-1672년 현종 13 년 묘정비 건립. 송시열 지음. 김수증 글씨 1868 년 고종 5 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1930년대 묘정비 이전 | |||||
이름 |
생몰 연대 |
아호 |
본관 |
배향 시일 |
비고 |
金尙憲 김상헌 |
1570-1652 |
청음(淸陰), 시호는 문정(文正). |
안동 |
1656년 |
西磵老人.·석실산인(石室山人). 청서파. 주전론. |
金尙容 김상용 |
1561-1637 |
호는 仙源. 楓溪 |
안동 |
1656년 |
순절(殉節)斥和派 金尙憲의 형이다 |
金壽恒 김수항 |
1629-1689 |
문곡(文谷) |
안동 |
1697년 |
1886년(고종23)에는 현종 묘정에 배향되었고, 진도의 봉암사, 영암의 녹동서원, 영평의 옥병서원 등에 제향, 전주의 호산사에 추가 제향 |
閔鼎重 민정중 |
1628-1692 |
노봉(老峯) |
여흥 |
1697년 |
김창협의 사돈. 송시열 문인 |
李端相 이단상 |
1628-1669 |
정관재(靜觀齋)·서호(西湖) |
연안 |
1697년 |
김창협 장인 |
金昌協 김창협 |
1651-1708 |
洞陰居士, 三洲, 農巖 |
안동 |
1710년 1713 년 설. |
李端相, 趙聖期의 門人. 老論 洛論의 종장 |
金昌翕 김창흡 |
1653-1722 |
洛誦子, 三淵 |
안동 |
1857년 5 월 10일 |
李端相의 문인 |
金元行 김원행 |
1702-1772 |
渼湖, 雲樓 |
안동 |
1857년 5 월 10일 |
老論 洛論을 대표하는 山林學者. 석실서원의 강학활동 |
金履安 김이안 |
1722-1791 |
三山齋 |
안동 |
1857년 5 월 10일 |
正祖代의 老論 山林學者 . 미호의 아들 |
金昌集 김창집 |
1648-1722 |
夢窩 |
안동 |
1857 5월 23일 |
壬寅獄事로 죽은 老論 四大臣의 한 사람 |
金祖淳 김조순 |
1765-1832 |
풍고(楓皐) |
안동 |
1857년11 월 |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 순원왕후(純元王后)의 아버지. 김려(金鑢), 이만수(李晩秀), 심상규(沈象奎) 등과 교유 |
석실서원 의 위상. |
충절과 학덕을 기림. 강학 수양의 도량. 노론학자들의 정신적인 요람. 재경 안동 가문의 정신적인 구심점, 정치 문화 학술의 재충전지. 조선 후기 철종의 장인이었던 김문근이 무려 5 명이나 석실 서원에 배향하였다는 것은 세도정치라는 진흙탕에 끌어들이는 처사였다라고 보는 학자도 있다. 주자학적인 공부의 도량이기도 하지만 서양과학에 대한 학문을 받아들여 선진적인 학문의 경향을 보인 학자들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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