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의 숨결/문충공파 종중

김이곤 ( 金 履坤)의 四忠祠 遺墟 (사충사 유허) 하남 사충서원

백촌거사 2013. 2. 7. 2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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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忠祠 遺墟 사충사 유허----

김이곤 ( 金 履坤)

1712년(숙종38임진)11월 9 일-1774년(영조50 갑오)11.28 일 향년 63세

자 (字) 후재(厚哉) 호(號) 봉록(鳳麓) 유집(有集)- 鳳麓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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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 履坤 (김 이곤) 生父 純行 --- 文忠公派

자(字) 후재(厚哉) 호(號) 봉록(鳳麓) 유집(有集)- 鳳麓集

1712년(숙종38임진)11월 9 일-1774년(영조50 갑오)11.28 일 향년 63세

음(蔭)신계(新溪)현령(縣令) 특증(特贈) 사헌부(司憲府)집의(執義)

配 연일 정씨(延日鄭氏) 1711년(숙종37신묘)-1738년(영조14 무오)

1798년(정조22무오 )2.5 일 졸

현감(縣監) 석(錫) 도사(都事)찬광(纘光)

曾祖 현감(縣監) 원징(元徵)

外祖 박 두장(朴斗長) 본(本)반남(潘南) 청송리(靑松里) 선조(先兆)

하곤좌(下坤坐)합폄(合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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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尙容- 16光炫3(水北)-17 壽仁 -18盛遇-19時保2(茅洲)20明行-21履坤 22集淳 23有根24 炳皐

25 仁均-26 萬鎭27 國漢 28蒼東

29載顯1952 임진 9.10일생 배 파평윤씨 을미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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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나무 서쪽 강가 우뚝 서 있고,

지난의 네 충신들 사당문 섰네.

 

지금에야 남은 건 주춧돌 몇 개

어디에서 남은 혼령 물어야 하나.

 

도성 안 해 갰지만 항상 어둡고

해 지자 숲 까마귀 또 시끄러워.

 

봄 속에 슬픈 노래 아득해지니

배 저어 가는 길은 황혼을 접네.

 

老木西江渚 忠臣舊廟門

노목서강저 충신구묘문

秪今餘數礎 何處問遺魂

지금여수초 하처문유혼

城日晴常翳 林鴉晩更喧

성일청상예 임아만경훤

悲歌春漠漠 歸棹近黃昏

비가춘막막 귀도근황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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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이해】

四忠書院 이라하여 지금은 하남시에 있지만 四忠祠라고 하여

노량진 死六臣 묘역 근처에 있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존재하고 있었던

사충사가 허물어진 옛터를 찾아가 화자는 슬픈 심회에 잠기고 있다.

 

< 1.2 행- 두련>: 사충사의 사당문 모습- 회고적. 서경적

시제에 遺墟는 남아 있는 옛날 터를 말함.

그 당시는 四忠祠라 하였고, 그 후에는 四忠書院이라 하였다.

지금의 노량진 死六臣 묘 입구 정문 옆이 四忠祠 터였다.

西江渚- 서원이 서 있던 배경. 서강-- 지금의 노량진 사륙신 묘 근처 . 노목이 서 있고, 한강물 흘러가고. 사당문 도 보임- 훼철(毁撤)<부수어서 걷어치움> 되기 전에 사충서원을 찾아갔음을 현재의 상태에서 회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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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정비의 기록을 보면은 노량에 세웠던 사충사 모습을 다음처럼 표현하였다.

祠在漢水之下露梁之陰去十里而近

門扄檐棟長拱城闕實四公扶衛宗國之誠焉

사당은 한강의 하류 노량의 북쪽으로 서울에서 10리 거리 되는 곳에 있다.

문과 처마와 기둥 모두가 궁궐을 공수하듯 바라보고 있으니,

실로 사신이 국가를 부위하던 충성과 흡사하다.

 

조선 왕조 실록의 기록을 보아도 四忠祠라고 기록이 되어 있음.

이행민(李行敏, 1680∼?) 자 경눌(景訥) 본관 경주(慶州)

영조 5년(1729 기유) 12월 7일(정미)

眷彼 江皐 四忠祠墟, 輿情愍鬱, 行路嗟傷。 噫! 四臣愛戴保護之誠, 神明可質, 而其所抱枉泯沒之狀, 聖明亦或照燭矣。

저 강 언덕의 사충사(四忠祠) 터를 돌아보매, 대중의 심정이 민울(悶鬱)해지고 길 가는 나그네도 슬퍼하여 상심하게 됩니다. 아! 사신(四臣)들이 임금을 친애(親愛)하고 떠받들며 보호한 정성은 신명(神明)에게 질정할 수 있는 것이니, 그들이 억울함을 안고 매몰되어 있는 정상을 성명께서도 또한 통촉하고 계실 것입니다.”<조선 왕조 실록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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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충사. 사충 서원의 작은 역사>❏❏

1725년(영조1을사) 가을에 사충사(四忠祠)를 건립하여 이들을 제향 1726년(영조2 병오)사액(賜額). 1727년(영조3 정미)훼철(毁撤)

창건연도 사액연도가 똑같이 1726년 이라고 기재한 곳도 있다.

1755년(영조31을해) 중건. 각각의 화상이 있었음.

1756년 공사가 끝나고 제사 지냄.

1786년( 정조 10년 병오) 廟庭碑 건립

1927년 (정묘) 노량진 자리가 철도용지로 편입되어

고양시 한지면 보광동 ( 현 용산구 보광동28번지로 이전)

신임사화(辛壬士禍, 1721)의 내력을 새긴 묘정비만 주택가 틈바구니(한강 이삿짐센터 뒤)에 외로이 서 있었다고 한다. 필자가 오래전에 보광동에 서 있었던 사충선원의 사진을 본 일이 있었는데 지금 그 사진을 찾을 수 없어 안타깝다.

1968년 경기도 하남시 상산곡동 100-2 번지로 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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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4행- 함련>: 부서진 사충사의 모습- 서경+ 서정

사충사가 부서지기 전에 한 번 찾아갔었고, 사당이 완전히 부서져 있었던 어느 봄날을 회고한다. 주춧돌 몇 개만 뒹굴고 있는 허전하고 쓸쓸한 모습을 보면서 사당에 모셔졌던 네 분의 혼령들께 내면적인 깊은 슬픔을 토로하고 있다.

秪今: 사충사를 찾아간 시간.-- 사충사가 1725년(영조1을사)< 지은이 나이14세>에 건립되었고, 1727년( 영조3 정미)< 지은이 나이 16세>에 부서졌다가 다시 중건한 해가 1755년 (영조 31 을해)< 지은이 나이44세>이다. 지은이가 돌아가신 해는

1774년(영조50 갑오)<63세> 이라. 부서지기 전의 사충사를 찾은 것은 1725년이나 1726 년 일 것이고, 부서진 후 사당을 찾아가신 해는 1755 년 이전이다. 지은이가 돌아가시고 1927 년까지는 이 곳 노량진 언덕에 세워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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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지식 이해

정미환국 [丁未換局]:1727년(영조 3 정미) 영조가 소론을 정권에 참여시킴으로 노론 4 대신을 罪案에 들게 하고 신임사화(辛壬士禍)를 逆獄으로 규정함

신임사화(辛壬士禍)(辛壬獄事) =임인옥(壬寅獄):

신축(辛丑)<1721경종1 신축>·임인(壬寅)<1722 경종2 임인> 양년에 일어난 사건.

연잉군(延礽君 : 뒤의 영조)의 세자 책봉 건의 관철-- 1721년 연잉군의 세제 책봉 --- 노론의 4 대신

소론의 조태구(趙太耉)·유봉휘(柳鳳輝) - 부당함 상소--

노론의 건의--세제청정(世弟聽政) 건의------ 소론과 노론 대립

소론의 상소- 김일경(金一鏡)의 소(疏)-- 노론의 4 대신 四兇臣= 경종에 대한 불충 + 목호룡(睦虎龍)의 고변(告變)-------노론의 실각 1722년

목호룡(睦虎龍):<1684(숙종 10)~ 1724(영조 즉위)>. 지관. 왕세제 옹호

.김일경(金一鏡)의 사주. 경종 시해 음모에 가담했다고 고변.-- 영조 즉위 후 무고 판명

竹醉의 아들인 金省行의 이름과 함께 목호룡이 누설할 것을 염려한 竹醉등이 李弘述을 사주하여 목호룡을 죽이려 했다는 말이 들어 있었다.

金信謙<1693-1738>은 壬寅 獄事로 함경도 安邊에 유배 가서 家人 및 師友 등을 그리면서 쓴 百六哀吟 이라는 눈물의 시 106 편이 있다. 그 중에는 사충신의 가족이야기를 읊은 시들이 있어 그 당시의 비극적 아픔이 가슴에 저리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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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론 4 대신: 경종(景宗:1720~24 재위) 때 노론세력을 이끌던 4대신.

김창집(金昌集)·이이명(李頤命)·이건명(李健命)·조태채(趙泰采)

<네 분의 충신들>----- 춘추 순서

몽와(夢窩), 시호(諡號) 충헌(忠獻) 김창집(金昌集), (1648∼1722) 영의정. 安東

소재(疎齋) 시호(諡號) 충문(忠文)公 이이명(李頤命) (1658~1722). 좌의정 全州

이우당(二憂堂). 시호(諡號) 충익(忠翼)公 조태채(趙泰采)(1660~1722) 우의정 楊州

한포재(寒圃齋 시호(諡號)충민(忠愍)公 이건명(李健命)(1663~1722) 좌의정 全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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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6행- 경련>: 사충사 遺墟의 주위의 배경- 서경

앞의 3,4 행을 더 구체적으로 주위 분위기를 묘사하여 부서져 버린 사충사의 옛터를 그리고 있다. 도성 안에는 해가 밝게 비쳐 있어도 이곳은 늘 그늘이 져있는 어둡고 침울한 분위기요, 저녁이 되면 숲속으로 날아드는 갈가마귀들의 시끄러운 울음 소리가 더욱 마음을 우울하게 하였다는 배경의 서술이다.

常翳: 늘 그늘이 진 상태 林鴉: 저녁이 되어 숲속으로 보금자리 찾아 날아드는 까마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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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8행- 미련>: 황폐해진 사충사를 떠나는 슬픈 서정- 서정

비가(悲歌)란 완전히 부서져 버린 사충사에 모시었던 네 충신을 생각하는 마음 속의 슬픈 노래라는 뜻으로 읊고 있는 시를 말함. 네 충신들을 생각하는 그리움의 서정은 현장을 떠남으로 점점 더 멀어지는 듯한 느낌을 가지고 강가에서 배를 타고 가면서 사충사 옛터를 두고 황혼을 맞이하고 있다.

사충사가 있던 노량진 언덕 위를 아마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서 사당을 찾아갔는가 보다. 의를 지킨 흔들림 없는 정신, 죽음에 이르러서도 지극한 충성을 지니셨던

우리 안동 가문의 조상님이시다.

한양대 정 민 교수님이 번역하신 몽와 조상님의 시 한 편을 담는다.

愛君如愛父。 아비를 사랑하듯 임금 사랑했으니

天日照丹衷하늘 해가 내 붉은 맘 비춰 주리라.

先賢此句語。 선현이 남기신 이 두 구절이

悲絶古今同。 슬프기가 고금에 한가지로다.

서쪽 한강 변에 선조님들의 영혼을 모시던 사당이 없어진 것에서 오는

슬픈 감정을 남기고 사당의 옛 터를 떠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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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마을 노트】-------------------------------------------------------------------

♠ 현재 하남시 상산곡동에 세워진

사충서원 묘정비(四忠書院 廟庭碑)

조선 정조 10년(1786) 건립:

크 기 : 전체높이 257㎝, 비신 156㎝, 폭 64㎝, 두께 27㎝

비문문장: 오재순(吳載純):<1727(영조 3)∼ 1792(정조 16)>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문경(文卿), 호는 순암(醇庵) 또는 우불급재(愚不及齋). 대제학 원(瑗)의 아들이다.홍문관과 예문관 대제학명안공주(明安公主:현종의 딸)의 손자.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글씨: 홍낙성(洪樂性):<1718(숙종 44) ∼1798(정조 22)>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자안(子安), 호는 항재(恒齋). 좌의정영의정년 영중추부사시호는 효안(孝安)이다

전액(篆額): 김익(金熤)<1723(경종 3)∼1790(정조 14)>.

자는 광중(光仲),호는 죽하(竹下)·약현(藥峴), 시호는 문정(文貞), 본관은 연안(延安).

시호는 문정(文貞), 제남(悌男)의 5대손으로, 아버지는 판돈녕부사 상석(相奭)

추기(追記) 기록: 1927년(丁卯) 8월 <立碑後一百四十二年丁卯八月 日 >

輔國崇祿大夫行議政府左贊成原任 奎章閣提學 侍講院貳師閔泳徽 追記

민영휘(閔泳徽)<1852(철종3)~ 1935> 한말의 문신. 본관은 여흥. 초명은 영준(泳駿). 자는 군팔(君八), 호는 하정(荷汀). 휘문학교(徽文學校) 설립

재추기 기록:1968년

丁卯後四十一年八月 日 後學李完珪謹識 忠獻公從十世孫金舜東謹書

이 완규(李完珪), --밀성군파 전주이씨 손이신 것 같다.

김 순동(金舜東)<1898-? >-- 서예가 응현, 충현의 숙부

昌立-厚謙-簡行-履錫-學淳-淵根-炳疇-道均-奭鎭-甯漢-舜東2<자 華重1898.26 고종 무술)

1950년 6.25 사변< 한국 전쟁>으로 廟庭碑에는 많은 포탄을 맞은 상처로 늘 쓸쓸히 서 있다. 충신인가 흉신인가 하는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른 판단을 내릴 수도 있는 역사적 인물들이시다. 하남시에 존재하는 유일한 서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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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공의 시호, 관직. 아호

公 官 領議政 號夢窩 公 官 左議政 號踈齋

公 官 右議政 號二憂堂 公 官 左議政 號寒圃齋

충헌공의 벼슬자리는 영의정에 호는 몽와(夢窩)요,

충문공의 벼슬자리는 좌의정에 호는 소재(疎齋)이며

충익공의 벼슬자리는 우의정에 호는 이우당(二憂堂)이오,

충민공의 벼슬자리는 좌의정에 호는 한포재(寒圃齋)이다.

관향: 안동/ 전주/ 양주/ 전주

문집:몽와(夢窩)집.소재(疎齋)집. 이우당(二憂堂)집. 한포재(寒圃齋)집

김창집(金昌集) 1648년(인조 26) -1722년(경종 2) 자 汝成 호 夢窩 시호 忠獻

이이명(李頤命) 1658년(효종 9)-1722년 자 養叔 호 疎齋 시호 忠文

조태채(趙泰采) 1660년(현종 1)- 1722년 자 幼亮 호 牛坡, 二憂堂 시호 忠翼

이건명(李健命) 1663년(현종 4) 1722년 자 仲剛 호 寒圃齋, 霽月齋 시호 忠愍

두 분 모두 다 전주 이씨 밀성군파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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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공(四公)의 정신

四公 俱以先朝大臣 知遇最深 矢心圖報 及其臨 大事秉義

不貳至死無悔 苟非所存乎忠者確然 有不可奪其孰能之

사공(四公)은 모두 선조의 대신으로 지우(知遇)가 가장 깊었기에 마음속의 맹세로 있는 힘을 다해 은혜 갚기<= 보효 (報效)>를 꾀하다가 큰일을 당하게 되자 의(義)를 지켜 흔들림이 없었고 죽음에 이르러서도 후회함이 없었으니 참으로 충성을 간직한 바가 확연하여 아무도 굽힐 수 없는 경지에 이르지 않았다면 누가 능히 그럴 수가 있었겠는가.

知遇:다른 사람이 자기의 인격이나 학식을 인정해서 잘 대우함

矢心: 마음 속의 맹세 圖報: 보답하기를 꾀함

보효(報效): 은혜를 갚기 위해 힘을 다함.

번역이 된 작품에 집효라는 단어의 뜻을 필자는 이해할 수가 없어 수정을 하였다.

가장 깊었기에 일심으로 집효(報效)를 꾀하다가 큰일을 당하게 되자 -어느 분의 해석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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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사당의 처음 위치와 모습 四忠祠

祠在漢水之下露梁之陰去十里而近

門扄檐棟長拱城闕四公扶衛宗國之誠

사당은 한강의 하류 노량의 북쪽으로 서울에서 10리 거리되는 곳에 있다.

문과 처마와 기둥 모두가 궁궐을 공수하듯 바라보고 있으니,

실로 사신이 국가를 부위하던 충성과 흡사하다.

京師: 한 나라의 중앙 정부가 있는 곳. 곧 서울.

경 빗장 경 =扃 扄 客散 門扄 손님이 돌아가고 문을 닫음.

外閉之關也。——《說文》扶衛: 돕고 지킴

宗國之誠 나라를 위하는 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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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사당의 추기(追記) 기록: 1927년(丁卯) 8월 閔泳徽 기록

<立碑後一百四十二年丁卯八月 日 >---- 보광동 28 번지 이전

院在露梁歲久而易致傾圮 且爲鐵道所偪不可以遠圖乃卜地於漢上之普光里仍舊○○○○規制則無改焉

廟庭碑醇庵吳太史 所撰而全述 健陵恩綸百世可俟也 亦仍移竪而附識于其左方 立碑後一百四十二年丁卯八月 日

輔國崇祿大夫 行議政府 左贊成 原任 奎章閣提學

侍講院貳師閔泳徽 追記

원은 노량에 있었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무너질 염려가 있었고 또 철도가 매우 가까이 닥치여 오래 유지할 수도 없었기에 한강 상류인 보광리에 터를 잡아 옛 모습 그대로 옮기고 규제를 바꾸는 일은 없었다.

묘정비는 순암 오태사가 지었는데 건릉(정조의 능)은 은륜을 그대로 기술한 것으로 백세토록 변함이 없는 정론이다.

이 또한 그대로 옮겨 세우고 그 좌측면에 이 사실을 부기한다.

비를 세운지 142년만인 정묘 8월 일 보국숭록대부 행 의정부 좌찬성 원임 규장각 제학 시강원 이사(世子傅) 민영휘는 추기한다.

傾圮: 무너짐 <무너질 비> 偪: 다가올 핍 핍근逼近:매우 가까이 닥침

恩綸: 은혜를 내리는 왕명 綸旨:임금이 신하나 백성에게 내리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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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사당의 이전---- 하남시 성산동으로--- 사충서원

粵在丁卯鷺梁移建本院于普光之里庚寅事變祠宇爲炮彈之所破兆域爲亂民之所據位牌眞影無所於尊奉矣承學之痛嘆愈往愈深僉議重建售舊址而卜新基乃龜食于廣州之上山谷里始役於戊申之莫春竣工於同年八月士林齊會奉安如儀至若庭碑雖有刓缺不易而新之者爲存舊貌也遂書顚末于 下方以備院中故事之一端云

丁卯後四十一年八月 日 後學李完珪謹識

忠獻公 從十世孫金舜東謹書

지난 정묘년에 본원을 노량에서 보광리로 옮겼는데 경인사변(한국전쟁)을 당하여 사우는 포탄으로 파괴되고 역내는 난민들에게 점거 당하여 위패와 진영을 봉안할 곳이 없었으니,

후학들의 통탄이 갈수록 더 심하여져 여러 사람의 의논으로 중건을 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옛터는 팔고 새터를 잡는데 광주의 상산곡리로 정하게 되었다.

무신년 모춘에 일을 시작하여 동년 8월에 준공하였다. 사림들이 모두 모여 의식에 따라 봉안을 마쳤는데 정비에 있어서는 비록 글자가 닳아 없어진 것이 있었으나 새로운 것으로 바꾸지 않기로 하였으니, 그것은 옛 모습을 보존키 위해서이다. 이에 처음부터 끝까지의 경과를 비의 끝부분에 기록하여 원중 고사의 일단으로 삼노라.

 

정묘후 41년 8월 일에 후학 이완규는 삼가 기록하고

충헌공 종 10세손 김순동은 삼가 쓰다.

從孫: 형이나 아우의 손자. 서예가 일중 김 충현의 작은 아버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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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은 <사충사 터>나 <사충사 유허>로 써야 하지 않았을까.

 

 하남 사충서원을 오르다가 만난 방울꽃송이

 

 

 필자 조사로는 건립 연대가 1725 영조 1 년인데-------- 처음에는 사충사 였다. 앞쪽의 안내판에는 1725로 표기.

 보광동에서 만난 6.25 전쟁의 상흔

 영조 병오는 1726 년 이다.

 

 

 

 

 

 

 

   사충서원 들어가는 입구 왼쪽에 있는 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