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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宋時烈) 선생님의 梅月堂 畫像 跋 (매월당 화상 발.)

백촌거사 2013. 2. 14.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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梅月堂 畫像

                                                              정리: 문곡 후손: 金彰顯

학습 노트:------------------------------------------------------------------------------------

글쓴이: 송시열(宋時烈1607(선조 40)∼1689(숙종 15)). 본관은 은진(恩津).

아명은 성뢰(聖困).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菴) 또는 우재(尤齋).

쓴 시기: 임자 년(1672, 현종13) 11월

국역: 이 기석 한국 고전 번역원. 또 이 상하 선생님.

이미 번역이 된 글이 있었기에 한문학에 문외한인 필자가 필자 나름대로의 이해과정을 따른 번역은 하지 않았다. 국어학적으로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몇 곳에 있었으나 그런 문제는 학문학자의 전유물이라고만 생각하여 해석은 하지 않았다.

김시습 (金時習:1435~1493)자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梅月堂) 또는 동봉(東峯) 생육신의 한 사람, 승려가 되어 방랑 생활을 하며 절개를 지켰다. 유교와 불교의 정신을 포섭한 사상과 탁월한 문장, 한국 최초의 한문 소설 <금오신화>를 지었고, 저서에 《매월당집》이 있다

화상: 초상화

내용: 매월당(梅月堂)이 스스로 그린 자화상을 모사한 그림을 보고 송시열이 쓴 발문이다. 이 모사한 그림은 곡운 김수증이 그렸다 .그런데 한국 고전 번역원에 계신

이 상하 선생님께서는 <곡운구곡도>를 그린 <화가 조세걸(曺世傑 1635~1705)을 시켜서 모사했을 가능성이 크다. >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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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泰伯과 文王의 지덕至德--------------------

孔子序列先世聖賢多矣。而惟以斷髮文身泰伯

並稱至德於三分天下以服事殷之文王。先儒以爲其指微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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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공자가 선세(先世)의 성현(聖賢)을 서열(序列)한 것이 많으나, 오직 단발 문신(斷髮文身)으로 왕위(王位)를 양보하였던 태백(泰伯 주 태왕(周太王)의 장자(長子))을, 천하를 삼분(三分)으로 나누어서 그 이분(二分)을 가지고도 은(殷) 나라를 끝내 섬긴 문왕(文王)과 아울러 ‘지덕(至德)’으로 일컬었으므로 선유(先儒)들이, 그 뜻이 정미(精微)하다고 하였다.

중심내용: 태백과 문왕은 지덕을 지녔다고 찬양

태백과 문왕은 임금을 배반하지 않음, 천하에 욕심이 없었음-- 신하의 도리를 지킨 그 훌륭한 덕을 후세인들에게 깊이 경계하는 뜻으로 삼기를 바람.

송시열의 내면적인 의도:

단종임금에 대한 절의를 지킨 매월당의 숭고한 덕의 찬양.

글 속에 성삼문, 김상헌 등의 이야기를 담은 것을 보면은 우암은 유학자적인 정신면에 역점을 두신 것은 아닐까.< 필자의 생각>

번역이 된 글의 흐름이 매끄럽지 않아 뜻의 전달이 쉽게 전해오지 않았다.

태백+ 병칭+ 문왕의 구조인데--- <태백과+ 병칭+ 문왕을>의 구조로 하면 어떨까.

태백을+ 지덕+ 병칭으로 되었다.

고전 번역원의 이 상하 선생님의 번역은 다음과 같다.

공자(孔子)가 전대의 성현에 대해 서열을 매겨 서술한 것이 많지만 오직 단발하고 문신한 태백(泰伯)을 천하의 삼분의 일을 차지하고서도 은(殷)나라를 섬긴 문왕(文王)과 아울러 지극한 덕이라 일컬었는데 선유(先儒)는 “그 뜻이 은미하다.” 하였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한문의 구조대로 문법에 맞게 번역이 되었다고 하여도 국어로 옮기었을 때는 우리말의 구조에 따라 가는 것이 어떨까 하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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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世:조상의 세대. 또는 그 시대. 선조 , 조상, 전대.

聖賢: 뛰어난 지혜와 높은 덕을 지닌 사람. /성자(聖者)와 현자(賢者)

序列: 일정한 기준에 따라 순서대로 늘어섬. 또는 그 순서.

斷髮文身: 머리를 짧게 자르고 몸에 문신을 새김

 

泰伯:[주(周) 태왕(太王)의 장자(長子). 춘추(春秋) 오(吳)의 시조(始祖)]

오태백[吳泰伯]. 오태백은 주[周]나라 태왕[太王](고공단보(古公亶父)의 장자[長子]. 태왕이 왕위를 셋째 동생인 계력[季歷]에게 넘기자 그는 둘째동생인 중옹[仲雍]과 함께 머리를 짧게 자르고 몸에 문신을 새겼는데, 이것은 모두 형만[荊蠻]의 풍속으로 더 이상 세상에 등용되지 않기 위해 그렇게 한 것임. 훗날 공자(孔子)가 태백은 지덕이라고 칭송하였다,

문왕(文王):기원전 12세기 중국 주나라(周)의 창건자인 무왕(武王)의 아버지이다. 성은 희(姬). 이름은 창(昌). 직위 서백(西伯)

先儒: 선대의 유학자 . 옛 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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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 泰伯에서< 번역 글은 성백효 선생님글 인용>

태백8-1:子曰 泰伯은 其可謂至德也已矣로다 三以天下讓하되 民無得而稱焉이온여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셨다. “태백(泰伯)은 지극한 덕(德)이 있다고 이를 만하다. 세 번 천하(天下)를 <굳이> 사양하였으나 백성들이 그 덕(德)을 칭송할 수 없게 하였구나!”』칭송할 수가 없게 하였다 함은 은미하여 자취를 볼 수 없는 것이다.

태백8-20:三分天下에 有其二하사 以服事殷하시니 周之德은 其可謂至德也已矣로다』

문왕(文王)은 천하(天下)를 삼분(三分)하여 그 둘을 소유하시고도 복종하여 은(殷)나라를 섬기셨으니, 주(周)나라 <문왕(文王)의> 덕(德)은 지극한 덕(德)이라 말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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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매월공(梅月公)의 진영(眞影) 모사(摸寫)-----------

東俗好古。其藏古聖賢遺像者亦多矣。

而今延之獨摹梅月公之眞。

將結茅於公所遊春川之山谷而掛置之。

2.

우리나라의 풍속도 옛것을 좋아하여 옛 성현의 유상(遺像)을 간직한 이가 많은데,

이제 김연지(金延之)가 유독 매월공(梅月公)의 진영(眞影)을 모사(摸寫), 공이 놀았던 춘천(春川)의 산골짜기에 띳집을 짓고 걸어 두었다.

중심내용: 연지공- 곡운공 김수증이

매월공의 진영을 모사하여 춘천 농수 정사에 걸어 두었다.

♣ 이곳에서도 해석이 잘 된 것인지 한문학의 전문이 아니라 이해가 잘 안 간다.

아마도 將의 해석이 문제가 되는 것 같다. 한 분은 [將…] <장차 …하려고 한다. 머지않아 …되려 한다.> 다른 분은[將…] <-수단·방법 …을 써서. …로써. …에 의하여> 로 해석을 하신 것 같다.

 

아래의 글은 역시 번역원 이상하 선생님의 해석이다.

우리 동방의 습속은 옛것을 좋아하여 옛 성현의 유상(遺像)을 소장하고 있는 이들은 많다. 그런데 지금 연지(延之)는 유독 매월당(梅月堂)의 진영을 모사하고 장차 공이 자주 가는 춘천(春川)의 산골에 집을 짓고 안치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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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운께서는 1670년 ( 현종11. 경술)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에 복거할 籠水精舍를 지었으며, 1675년 겨울에는 아예 서울의 가족들까지 이주시켜, 띠집을 짓고 곡운정사 현판을 달았다. 9 계곡마다 이름을 붙여 조세걸로 하여금 그림< 곡운구곡도>을 그리게 하였다.

곡운 만의 은둔처이고, 삶의 보금자리이며, 이상향이었다.

계곡마다 이름을 부치셨다.

제1곡 방화계(傍花溪) 제2곡 청옥협(靑玉峽) 제3곡 신녀협(神女峽)<매월당이 머물던 곳>제4곡 백운담(白雲潭)# 제5곡 명옥뢰(鳴玉瀨)제6곡 와룡담(臥龍潭) 제7곡 명월계(明月溪) 제8곡 융의연(隆義淵)제9곡 첩석대(疊石臺)

그만두고 이미 1670년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에 마련한 농수정사(籠水精舍)로 내려가 주자(朱子)의 행적을 모방하여 곡운(谷雲)이라 하였다. 이후 잠시 회양부사로 나아갔다가 1689년 기사환국으로 김수항과 송시열이 죽자 화음동정사(華蔭洞精舍)를 짓고 화악산에 은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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遺像:죽은 사람의 초상(肖像).생전의 사진 또는 초상, 유상, 유영

結茅: 결모 (띠로 이엉을 엮다),

春川之山谷: 춘천시 사북면과 화천군 사내면의 경계를 지나 춘천호로 유입되는 북한강 상류의 한 가닥인 사내천의 계곡이다.

掛置: 걸어 두다.

延之: 인명의 字. 김수증(金壽增:1624~1701.자 연지(延之). 호 곡운(谷雲). 청음 김상헌(尙憲)의 손자로 장손>

 

 

                           안동 가문의 칠수(七壽)

                                                                                              문정공파: 백촌 창현

흔히 삼수 육창하면서 삼수만을 특히 내세우지만, 청주 한씨의 소생도 공통적으로 자를 之자 돌림으로 삼으셨다. 국문으로의 이름은 전부 받침이<ㅇ>자로 끝을 맺었다.

七壽의 부친: 광찬(光燦)1597.12.19- 1668.2.24 생부: 尙寬 양부: 尙憲.

부인: 연안김씨 1596 -1633.10.13 청주한씨 1613.10.12-1699.3.1

넷째 아드님부터는 청주한씨 소생.

옛글의 표현에서는 서자 서제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 현실에서도 소생이 다른 자식들에게도 똑같이 자를 공통적으로 통일하여 쓰신 것이 깊게 마음에 들었다.

 

본명

자. 아호

생몰

부인 관향

비고

 

1

 

 

수증(壽增)

延之

1624

창녕 조씨

春川 籠水精舍. <곡운구곡도>. 문집 곡운집.

< 종손>

谷雲

1701

 

2

수흥(壽興)

起之

1626

남원윤씨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제(服制) 문제 대공설, 장기유배.

退憂堂

1690

 

3

수항(壽恒)

久之

1629

안정나씨

1689년 기사환국. 사사.

文谷

1689

 

4

수징(壽徵)

懲之

1636

인동장씨

적성 현감.

碧梧堂

1706

5

 

수응(壽應)

應之

1640

전주이씨

진사. 증 이참.

 

1695

6

 

수칭(壽稱)

稱之

1642

파평윤씨

학관

 

1704

 

7

수능(壽能)

能之

1644

전주이씨

강동현령

 

1704

 

 

谷雲: 어려서부터 항상 祖父 金尙憲을 곁에서 모시며 가르침을 받다 현종 11 1670년 春川에 卜居할 땅을 마련하고 籠水精舍를 짓다. 南人이 집권하자 동생인 文谷 金壽恒과 宋時烈이 유배되자 벼슬을 그만두고 春川 谷雲에 들어가 살다.淸風 郡守. 숙종 19 1693 諸葛亮, 宋時烈과 金時習의 초상을 모셔놓고 有知堂이라 이름짓다. 黨論에 관여하지 않고 山水에 은거해 살았다.

 

: 본뜸.본뜰 모 뜻 본뜨다. 모방함. 베끼다.

摹倣-본뜸 摹寫:베낌.

 

http://blog.naver.com/1882yh/30143711149 김영한의 블로그

화천 곡운구곡은 나의 이상향, 곡운 김수증 인물기행

혹시 <漢>자 돌림의 안동 가문이 아니신지 모르겠다.

 

 

 

곡운 조상님의 성품은---------------------------------------------------------------

두 동생이신 퇴우당, 문곡과는 다르게 정치적인 현실과는 먼 자연 속의 삶을 구가하셨다. 삶의 휴식처, 안식처가 무릉도원 같은 선경의 자연이셨다. 문곡의 셋째 아드님이 쓰신 묘갈의 기록에는 다음처럼 성품을 묘사하셨다.

先生自幼恬靖與物無竸 其在文正公側進退惟謹 凡承一言片辭靡不默識而廣記

終身佩服與誨錫子孫皆是道也 好讀書工篆隷文詞沛然不規規於程式

文正公嘗稱其醇雅

선생은 어려서부터 고요함을 좋아하여 남과 겨루지 않았다. 문정공의 곁에 있을 때는 진퇴를 조심스럽게 하고 말 한마디라도 들으면 가만히 새겨 널리 기억하였다. 종신토록 실천하고 자손에게 가르쳐 준 것은 모두 이렇게 얻은 도리였다. 글 읽기를 좋아하고 전서(篆書)와 예서(隷書)에 조예가 깊었으며 문장이 풍부하여 격식에 억매이지 아니하였다. 문정공은 일찍이 순일하고 우아하다고 칭찬하였다. <한국 금석문인용>

先生自幼恬靖與物無竸 其在文正公側進退惟謹 凡承一言片辭靡不默識而廣記

終身佩服與誨錫子孫皆是道也 好讀書工篆隷文詞沛然不規規於程式

文正公嘗稱其醇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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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壽增에 대한 조선 왕조 실록의 기록----------------------------

肅宗 27年(1701 辛巳 ) 3月 4日(辛卯)

○辛卯/前參判金壽增卒。 年七十八。 壽增字延之, 文正公 尙憲長孫也。 爲人淸修, 無一點塵態。 師友宋時烈, 識趣淵懿,

詩文, 澹雅如其人。 尤工於篆、籀、八分, 多書公私金石。 早抛擧子業, 間出爲守宰, 亦無留戀意。 晩歲卜居春川之谷雲山中,

愛其山水幽深, 遂終老於斯, 一時咸高之。

전 참판(參判) 김수증(金壽增)이 졸(卒)하였으니, 나이 78세였다. 김수증의 자는 연지(延之)인데, 문정공(文正公) 김상헌(金尙憲)의 장손(長孫)이다. 사람됨이 청수(淸秀)하여 한 점의 진태(塵態)가 없었다. 송시열(宋時烈)을 스승처럼 벗하여 학식과 취향이 깊고 아름다워 시문(詩文)을 하는 데 담박하고 우아함이 그 사람과 같았다. 더욱이 전서(篆書)·주서(籒書)·팔분(八分)을 잘하여 공사간(公私間)의 금석문을 많이 썼다. 일찍이 과거를 포기하고 간간이 나와서 수령(守令)을 지냈으나, 또한 얽매여 있을 생각은 없었다. 만년에 춘천(春川)의 곡운산(谷雲山) 속에 자리잡고 살았으니, 그 산수가 깊속하고 그윽함을 사랑하여 마침내 여기에서 늙었으니, 당시 사람들이 모두 그를 고상하게 여기었다.< 조선 왕조 실록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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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모사한 매월당 眞影의 모습--------------------------------------------

竊諦審之。其髭鬚雖在。

而冠服則正緇流所著也。

내가 가만히 살펴보니, 그 콧수염과 턱수염은 있었으나

관복(冠服)은 곧 승려(僧侶)가 착용하는 것이었다.

중심 내용: 곡운이 모사한 매월당 진영을 보신

우암(尤庵) 선생님의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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竊諦審之: 가만히 살펴보다.

竊 절:훔치다/도둑/몰래/명백하다.-사사로이, 곰곰이, 그윽이, , 깊이, 가만히

諦審 제(諦)에는 자세히 살피다(諦審). 확실하고 진실하다(諦實) 살피다. 자세히 조사함. 자세히 알다. 명확함. <불교> 진리. 오도(悟道)의 뜻

諦는 본음이 살필 제.

髭鬚 자수: 입술 위의 수염과 턱 아래의 수염을 아울러 이르는 말.

코밑수염, 콧수염.鬚 수염. 남자의 턱수염.

髟의 부수에 관련이 되는 글자<터럭 발 밑 부>

髥구레나루 염/髫늘어뜨린 머리 초, 다박머리 초/髮머리 발/髱수염많을 포/

髻 상투계/ 髮터럭발/鬅머리 흐트러질 붕/ 鬆 헝클어질 송/ 鬖 헝클어질 삼/

鬋 살쩍 늘어질 전/ 鬟쪽진 머리 환/ 鬢 살쩍 빈/ 鬑머리가 드리워질 렴.

冠服: 갓과 의복을 아울러 이르는 말

緇流치류: 검을 치. 검다. 검은 옷. 승복(僧服). 검은 승복.

함께 모여서 수행하는 출가승의 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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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daum.net/kieury/11295572 매월당 영정.

부여에 있는 무량사에 있는 영정.

http://blog.daum.net/damotoli/7281558 매월당 영정

경북 경주시 기림사에 있는 영정.

http://blog.daum.net/skgus9011/7089893

만수산 무량사

半輪新月 上林梢 <새로 돋은 반달이 나뭇가지 위에 뜨니>- 매월당의 한 시 한편 이 있음-- 과연 해석은 바르게 되었을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