萬東廟重修記
만동묘중수기
글쓴이 :김 영창 金永昌(1884.2.16-1943.10.19)
廟司 본관 光山 자 성연(成淵).
국역: 청음. 문곡 후손 백촌 金彰顯
글자 탐색중----- 해석은 끝을 냈습니다. 글자를 검토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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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첫 판자의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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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淸州 靑川面 華陽洞
2. 萬東廟卽 皇明
3. 神宗 顯皇帝 毅宗烈皇帝 兩位 妥靈之所而 士民 駿奔之誠 亶在於斯矣. 竊惟 藩
4. 邦之 再造人民之更生 莫非 朝家則 肅廟甲 申 設于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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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역≫
청주 청천면 화양동에 세운 만동묘는 곧 중국의 명나라의 황제 신종 현황제(1563-1620 58세 임진왜란)와 의종 열황제(1611-1644 34세. 死 社稷 )의 두 위패를 차려놓고 신주를 섬기는 곳으로 선비들과 백성들이 준마처럼 달려가는 지극한 정성이 진실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황제가 다스리는 국가를 다시 건설해 백성들을 아마도 다시 살게 해준 일일 것이다. 조정에서는 숙종 30년<1704년. 甲申>에 궁원에 대보단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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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촌 노트>>
神宗 顯皇帝: 만력제(萬曆帝):주익균(朱翊鈞)
神宗 範天合道哲肅敦簡光文章武安仁止孝顯皇帝라고 함.
1563년 9월 4일 -1620년 8월 18일
재위 1572년 7월 19일-1620년 8월 18일
毅宗烈皇帝: 숭정제(崇禎帝):주유검(朱由檢)毅宗 莊烈愍皇帝
1611년 2월 6일 -1644년 4월 25일
재위 1627년 10월 2일-1622년 4월 25일(자결)
妥靈: 신주(神主)를 섬겨 모심 士民: 백성/ 인민/ 사민의 하나인 선비 / 선비와 백성 /옛날에, 귀족에게 예속되어 그 통제를 받고 나랏일에 참여하지 못하던 평민 선비와 백성./ 육예(六藝)를 배운 백성. / 양반 계급에 속하는 사람. 四民 사농공상(士農工商), 곧 선비, 농부, 장인, 상인 등 모든 백성 駿奔: 준마처럼 빨리 달리다
竊惟 :혼자 가만히 여러모로 생각함 살펴 보건대, 삼가 생각건대
藩邦: 제후가 다스리는 나라 肅廟 甲申: 1704년 숙종 30년
大報壇: 명나라 황제의 '큰 은혜를 갚는다'는 뜻의 제단
조선 시대, 중국 명나라의 태조, 신종, 의종을 제사지내던 사당.
1704(숙종 30)년에 창덕궁 금원(禁苑) 옆에 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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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두 번 쩨 판자의 내용 -- 전부10줄(가)
5-8줄의 내용
★ 네쩨 줄에 금이 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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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中以爲 崇奉之所. 本朝則 大老 宋先生
以茅屋祭昭王之義 將經營于華陽以
6.寓不忘之意矣 志未及就 逮 楚山 受命之日遺 囑于高弟 權遂菴俾遂其事 夫
7. 臨命而無他辭惟眷眷於建廟之一端 先生之 大義可謂炳若日月永有辭於天
8-(1). 下後世也.
≪국역≫
받들어 모시는 장소가 되었다. 조정에서는 유학자의 대로이신 송시열 선생은 한 칸의 띠 집을 짓고 주(周)나라 소왕(昭王)을 제사지내는 의리로써 잊지 않으려는 뜻을 붙여 앞으로 화양동에 서원을 경영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 뜻이 미처 나아가지 못하였고, 초산 (정읍)에서 붙잡히자 임금의 하명을 받는 날 죽은 뒤의 일을 뛰어난 제자인 수암 권상하(遂菴 權尙夏)<(1641~1721)자 치도(致道), 호는 수암(遂菴)·한수재(寒水齋).본관은 안동(安東)> 사문지적전(師門之嫡傳)으로 불림> 로 하여금 그 일을 이루게 하였다.
참으로 죽음에 임해서도 딴말은 없이 서원의 한 부분을 세우는 일에만 오직 돌보고 돌볼 뿐이셨다. 선생의 대의는 해와 달같이 밝아서 천하 후세에 영원토록 칭송이 있으리라 이를 만하다.
<<백촌 노트>>
崇奉: 숭배하여 받들다 우러러 받들다. 大老: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어진 노인./ 지체 높고 나이 많은 사람.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 선생을 말함.
한유(韓愈768-824)의 제초소왕묘(題楚昭王廟)라는 시
[丘墳滿目衣冠盡,城闕連雲草樹荒。
猶有國人懷舊德 一間茅屋祭昭王]
눈에 가득 무덤은 의관을 차렸는데
구름 덮인 궁궐엔 풀나무 황량하다.
아직도 초인들은 옛 덕을 기리면서
한 칸의 초가집에 소왕을 제사하네.< 백촌 졸역>
소왕(昭王)은 초(楚) 나라 평왕(平王)의 태자로, 오자서(伍子胥)의 공격을 받아 나라가 거의 망할 상황에서 신포서(申包胥)의 노력으로 망하지 않고 중흥한 임금이다. 소왕의 사당이 선성(宣城)에 있는데, 한유(韓愈) 때에 한 칸 모옥(茅屋)이 남아 있어 그곳 사람들이 그때까지 매년 10월에 모여서 제사를 지내고 있었다.
一間茅屋祭昭王라는 구절이 있는데, 여기에서는 이미 멸망한 명(明) 나라 황제의 제사를 황단에서 지내기 때문에 인용한 것이다. 《史記 卷40 楚世家》 《韓昌黎集 卷9》
遺囑:죽은 뒤의 일을 부탁함 . 자신이 죽은 뒤 어떻게 하라고 부탁하다. 유 언장. 高弟: 제자들 가운데서 학식과 품행이 특히 뛰어난 제자 權 遂菴:1641(인조 19)~ 1721(경종 1).權 尙夏의 아호
송시열(宋時烈)의 학통을 이은 노론 계열 본관은 안동. 자는 치도(致道), 호는 수암(遂菴)·한수재(寒水齋). 1689년 기사환국에 송시열이 정읍에서 사사(賜死)되자 유품(遺品)을 받고, 그 유언에 따라 괴산 화양동에 만동묘(萬東廟:명나라 신종과 의종을 제향)를 세웠으며, 숙종의 뜻을 받들어 대보단(大報壇)을 세움.
俾 : 더할 비, 시킬 비, 하여금 비.
臨命: 죽음에 다다름 無他辭:다른 말이 없음.眷眷:가엾게 여겨 항상 돌보아 주는 모양을 나타내는 말 炳若日月: 해와 달같이 매우 밝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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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은 갑인년이라 계축은 오기 1913년이 癸丑
그리고 安靈은 妥靈으로 英非는 莫非로 大報思는 大報壇으로 高茅는 高弟로 수정이 되어야 함.
★불원천리 먼 길을 찾았는데 이런 오류가 있었다니. 이제 전시회는 끝났으니 어찌하랴.
전시회를 마련하여 안복을 고맙게 해주신 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리지만.....
디카로 찍어 온 것을 필자도 아주 조심스럽게 읽고 있다. 이름은 거의 다 확실히 읽었지만 한 분의 이름이 읽어내기가 조금은 어렵다.
6 개의 조각판이 환히 보인다.
현판의 좌상
현판의 우상
현판의 우하
현판의 아래 가운데
현판의 좌하.
다음 자료는 국립청주박물관 자료인용 ---------------------
국립 청주박물관 http://cheongju.museum.go.kr
≪만동묘 중수기 현판 (萬東廟重修記懸板)≫ 특별 공개
-1914년 제작한 현판, 100년 만의 귀향-
국립청주박물관(관장 윤성용)은 조선시대의 거유巨儒 우암 송시열(1607~1689)의 탄신일(12월 14일/음력 11월 12일)을 맞아 올해 새로 입수한 ≪만동묘 중수기 현판≫을 12월 12일부터 12월 22일까지 특별 공개합니다. 천안에 거주하는 개인이 소장하고 있던 것을 2013년 8월 입수하여 그 동안 기초 조사 및 보존처리 과정을 거쳤습니다.
≪만동묘 중수기 현판≫는 일제 강점기인 1914년부터 1918년까지 만동묘를 중수한 내용을 담고 있는데, 약 100년 만에 사림士林의 본향本鄕으로 돌아 온 귀중한 문화재입니다. 이 현판은 가로 123cm, 세로 80cm로 상당히 크며, 6개의 판자를 연결하고 그 안에 글씨를 새겨 넣었습니다. 또 테두리에는 틀을 대어 현판의 위엄을 더하고, 테두리 안쪽 면에 꽃무늬를 그렸지만, 현재는 흔적만 남아 있습니다.
만동묘, 조선 성리학의 중심
만동묘萬東廟는 1689년(숙종 15) 우암 송시열이 사사賜死(임금으로부터 사약을 받아 죽음에 이름)될 때 제자 권상하에게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도와 준 명明의 신종神宗과 병자호란 때 의를 지킨 의종毅宗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낼 것을 당부하여 건립된 사당입니다. 대의명분과 심성心性을 중요시 하는 우암의 사상이 깃든 곳으로, 우암을 제향祭香하는 화양서원華陽書院과 함께 기호학파畿湖學派의 중심이었습니다. 1776년 정조가 즉위하면서 어필로 사액하기도 하였고,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철폐되기도 하였으나 1874년 고종의 왕명에 의해 다시 부활되어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일제 항거의 구심점 역할을 하였습니다.
만동묘, 역사의 수난을 이겨내다
일제는 항일의 정신적 버팀목이었던 만동묘를 1908년 헐고, 1937년에는 1747년(영조 23)에 세운 만동묘정비萬東廟庭碑(만동묘 건립 내용 명기)를 쪼아대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나아가 1942년에는 중수한 건물과 위패, 제구 등을 모두 불태워 완전히 철거하였습니다. 이러한 수난을 겪으면서도 충청도 일대의 유림들은 존화계尊華稧를 조직하여 일제에 항거하기 위한 발판을 마련하였습니다.
이번에 처음 공개되는 ≪만동묘중수기현판≫은 존화계에 참여했던 충청도 지역 유림들이 만동묘를 중수하며 그 뜻을 기리기 위해 제작한 것입니다. 일제의 억압 속에서도 항일의 구심점으로 만동묘를 중수하고 일제에 타협하지 않았던 충청도 일대 유림들의 올곧은 춘추대의春秋大義 정신을 이해할 수 있는 자료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이 현판을 안전하게 보존하기 위하여 미생물 방제 처리를 마쳤고, 향후 정밀한 보존처리와 분석 작업을 거쳐 지역문화의 자긍심을 알리기 위해 상설 전시할 예정입니다. 국립청주박물관은 지역문화의 중심기관으로 역할을 다하고자 충북지역의 전통 사상과 문화를 널리 알릴 수 있는 다양한 문화재를 확보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노력할 계획입니다.
국립청주박물관 새소식 입니다.
이 현판을 안전하게 보존하기 위하여 미생물 방제 처리를 마쳤고, 향후 정밀한 보존처리와 분석 작업을 거쳐 지역문화의 자긍심을 알리기 위해 상설 전시할 예정입니다. 국립청주박물관은 지역문화의 중심기관으로 역할을 다하고자 충북지역의 전통 사상과 문화를 널리 알릴 수 있는 다양한 문화재를 확보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노력할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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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의 횡설수설------------------------
청주 박물관을 찾아가던 날 2013.12.21 일--------
大儒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 선생님, 그리고 필자의 선조이신 문곡 (文谷) 김수항(金壽恒, 1629년- 1689년) , 미호(渼湖) 김원행 (金元行(1702-1772) 밀흡(密菴) 김지행(金砥行 1716-1774) 조상님들과 깊은 관련이 있는 萬東廟에 관련이 되는 자료 전시가 청주 국립박물관에 전시 되고 있다고 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고 청주를 찾았다. 몇 년 전부터 한번 가 보려고 마음먹었던 화양동 만동묘이기도 하여 현판의 내용을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고 싶었다.
그 사이 이재 李縡<1680-1746 陶菴> 선생님의 <萬東墓碑>, 문곡 조상님의 <爲尤齋寄題煥章菴> 미호공 조상님의< 萬東廟銘 >지행 砥行 선조님의 <萬東廟碑文附籤> 등을 번역하며 읽어 보기도 하였다. 전문인도 아니기에 늘 국문으로 옮기는 일에 어려움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내 조상을 생각하고 있는 오롯한 마음뿐으로 글을 대하고 있을 뿐이다.
15 일부터 가려고 계획하였지만 시간이 여의치 못하였다. 19 일에 가려고 했더니 청주 시내에 눈이 5cm 나 내렸다고 하여 또 날을 미루었다. 나이 들고 나니 이제는 젊은 시절처럼 꼭 실행하겠다는 의지가 약해 졌다.
전시가 일요일이면 끝나는 고로 못 보았다는 후회를 안 남기려고 실행을 하기로 결심하고 청주를 가기로 한 것이다. 이 나이에 차를 가지고 내려가는 일에는 자신이 없었다.
새벽밥을 먹고 전철타고 강변역으로 나가
8시 10 분발 청주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다. 바람은 싸늘했지만 날씨는 맑았다.
상아탑 시절에 찾아갔던 청주 無心川의 향수,
campus에서 맺었던 청주고 출신의 故 吳文燮의 고향,
일찍 세상을 떠나간 후에 무덤조차 알 수 없고 사는 곳도 몰라 지금껏 깊은 안타까움으로 그리움에만 젖고 있는 文燮 이라는 친구,
그리고 그 친구의 소개로 알게 된 첫사랑 이었던 청주 북문로에 살았던 成 義煥,
그리고 청주여고를 졸업한 남자라는 이름을 지닌 金 昌基에 대한 그리움.....
여러 가지의 만감이 교차되는 심정을 안고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다.
내가 태어난 곳은 아니지만 청주라는 이름의 도시는 제 2의 고향처럼 느껴지는 곳이다.
50 년이 흘러간 청주는 지금 얼마나 변해 있을까,
중부고속도로에는 햇살이 비치기도 하였고, 깊은 운무가 덮여 있기도 하였다. 창문을 통해 스쳐가는 산천은 백설의 정경이었다.
1 시간 40 여분 지나서 버스터미널에 도착하였다. 박물관 홈페이지에 나와 있는 버스 번호를 기다렸으나 이런 번호의 버스는 30 여분을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홈페이지 안내---------------------
<시외버스 터미널- 박물관 앞 40분 청주시내 방면 버스(821, 822-1, 826) 도청(환승) ->박물관(862) >
차갑게 부는 바람이 몸을 얼게 하는 듯하였다. 터미널 옆 안내센터에 들어가니 아주 친절히 박물관 안내를 해주며 청주관광지도도 주었다.832 번의 버스를 알려주며 < 용두사지 철당간 >정류장에서 내려 862 번이나 864 번 버스로 환승하라고 적은 쪽지를 건네주었다. 안내소에는 괴산, 음성, 진천, 청원 ,제천 등을 소개하는 책자들이 질서 있게 정리되어 있었다. 832 번 버스를 타니 외지인은 내릴 곳을 미리 말하라고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버스 기사에게 박물관 가는 곳을 물으니 이곳에서 내려 버스를 환승해도 된다고 하기에 청주체육관 앞에서 내리어 862 번 버스를 기다렸다.
이곳에서는 10 여분을 기다렸다. 정류장 바닥에는 청주라는 도시임을 알리는 直指 라는 쇠판이 여러 개 늘어져 있었다. 서울에서 사용하고 있는 버스카드가 여기 청주에서도 통용이 되어 무척이나 편리하였고, 정류장마다 아주 자세한 컴퓨터 안내판이 보였다, 서울보다는 오히려 청주의 버스 정류장 안내가 더 나아 보였다.
기다리고 있는 동안 862 번 번호를 누르니 자세히 정류장이 소개되어 있었다. 햇살이 잘 비치지 않아서인지 보도에는 눈이 얼어 있어 조심스러웠다. 청주시내에 많은 눈이 내렸음을 청주 박물관 앞에서도 느낄 수가 있었다. 박물관 앞 정류장에서 내리니 앞의 산에는 희끗희끗 눈이 햇볕에 반짝이고 있었고 박물관 마당에도 눈들이 아직은 쌓여 있었다. 성벽처럼 돌로 꾸민 건물들이 많았다. 거의 전시회 일정이 거의 끝나고 있어서인지 관람객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
전시장 입구에는100 년만의 귀향
만동묘중수기현판 <萬東墓 重修記 懸板> 이라는 플래카드가 벽에 붙어 있었다. 전시장이 아주 어두워 현판에 새겨진 글씨를
알아보기에는 너무나 어려움과 힘이 들었다. 청주까지 먼 길을
찾아간 것은 그 현판의 외형적인 면 보다는 그 내용의 글자와 그리고 혹시 번역이 된 자료라도 있을까 하였는데 조금은 실망하였다. 안내해 주시는 분에게 물으니 만동묘 중수기 현판에 대한 준비한 자료는 오직 현판 아래에 소개되어 있는 안내문뿐이라고 하였다. 국립청주박물관 발행의 < 화양동 만동묘> 라는 책자에도 구체적인 소개는 없었다. 라이트 없이는 포토를 찍을 수가 있다고 하기에
집에 와서 글자를 확인해 볼 수 있도록 한 50 여장의 사진을 여러 각도에서 찍었다. 형광등의 불빛이 전시장 유리에 반사되어 사진을 찍기도 참으로 어려웠다. 전부 6 개의 나무 판이 이어져 있었다. 글은 金永昌 글씨는 安 敎喆이라는 이름은 확실히 알 수가 있어 그래도 보람을 얻었다. 그 밑에 박물관에서 설명한 자료 밑에는 일부의 한자들을 옮겨 놓아 큰 도움이 되었다. 디카로 찍은 사진을 집에 가지고 와서 완전히 읽을 수 있겠지 하는 뿌듯한 희망을 안고 오후 12 시 반쯤 박물관을 나왔다.
전시장에는 또 다른 관심이 있는 유물 자료들이 있어 찍어 가지고 왔다. 우암 송시열 선생님의 영정 사진 하나는 필자의 선조가 되시는 金昌協 /金昌業 과 관련이 되는 자료이라 퍽이나 가득한 희열이 넘쳐왔다. 시장기가 감돌아 전시실 안에서 딸이 마련해준 몽쉘(Mon Cher)<=초코파이>로 점심을 대신하였다.
물을 마시려고 하니 찬물만이 나왔다. 절전을 하고 있는 듯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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