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광장/흰마을 한시 시어 산고

杖屢는 杖屨의 誤記이다.

백촌거사 2021. 3. 1. 21:01

닥밭골 님의 블로그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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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杖屢는 杖屨의 誤記이다.

‣ 사전기록

     국어사전

    장:구杖屨 지팡이와 신. 이름난 사람이 머문 자취

   지팡이와 짚신을 아울러 이르는 말

    일본어 사전 じょうく [杖屨]

   ① 장구 ② 지팡이와 신 ③ 손윗사람의 소지품

   ④ 변하여, 손윗사람의 경칭

    중국어 사전

1.지팡이(手杖)와 신발 (鞋子). 2.노인을 대하거나 존경하는 사람의 경칭 3. 지팡이 짚고 한가롭게 슬슬 걷는 걸음.

 

 

杖屨行樂 장구행악 지팡이 짚고 신발 신고 재미있게 놀고 즐김

祗敬杖屨 지경장구《예기》 〈내칙(內則)〉에 “부모와 구고의 옷과 이불과 대자리와 깔개와 베개와 안석을 옮기지 않고, 지팡이와 신발은 공경하여 감히 가까이하지 말라.〔父母舅姑之衣衾簟席枕几不傳 杖屨祗敬之 勿敢近〕”라고 하였다. 《小學 明倫》

杖屨往還 장구왕환 ”노년(老年)에 친한 벗과 어울리면서 자주 왕래하는 것을 말한다. 소식(蘇軾)의 〈답전제명서(答錢濟明書)〉에 “만약 이 일만 끝나면 공과 함께 지팡이 짚고 나막신을 신고서 서로 왕래하며 나의 여생을 즐기겠다.[若遂此事 與公杖屨往還 樂此餘年]”라고 한 데에서 유래한 것이다. 염흥방은 당시에 유배된 신분으로 천녕(川寧)에 있었기 때문에, 본문의 바로 뒤에서 그렇게 말한 것이다.

<루/누>屢와 구屨 의 착각은 글자 모양에

婁의 글자로 인 한 혼돈인 것 같습니다. 신발 구屨 로 써야 할 것을 잘못해서 屢 창 루로 쓴 것입니다.

유니코드

1.루/누屢 =屡尸 유니코드 U+5C62 획수 11 총획수 14

1.여러. 수효가 많은;2.자주. 여러 번 되풀이하여;3.매양. 언제나;4.빠르다. 빨리;5.번거롭다. 번잡하다;

아래의 글자들은 전부 婁의 글자가 들어가 있는 자입니다.

婁 女 유니코드 U+5A41 획수 8 총획수 11

㜢 㟺 㡞 㥪 㪹 㺏 㻲 䁖 䄛 䅹 䝏 䣚 䫫 䮫 䱾 偻 僂 喽 嘍 塿 娄 婁 寠

屡 屢 嵝 嶁 廔 慺 搂 摟 楼 樓

氀 溇 漊 漏 熡

甊 瘘 瘻 瞜 磥 篓 簍

縷 纍 缕 耧 耬 膢 艛

蒌 蔞 蝼 螻 褛 褸 謱 貗 軁 遱

鏤 镂 鞻 髅 髏 鷜

2.<구> 에도 루와 비슷한 모습이 들어간 글자가 있습니다.

㺏 寠 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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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가 아닌 루에는 신발의 의미는 결코 없습니다. 杖屢는 지팡이와 신발이 아닙니다. 반드시로써야 합니다.

(屡) 尸 유니코드 U+5C62 획수 11 총획수 14

1.여러. 수효가 많은;2.자주. 여러 번 되풀이하여;3.매양. 언제나;4.빠르다. 빨리;5.번거롭다. 번잡하다;

屢는 부사의 기능을 지니고 있다. 신발의 의미는 없다.

병객이 공연히 번거롭게 자주 부름을 받다니 / 病客空煩見招

<屡次> ① 자주 ② 누차 ③ 여러 번 ④ 여러 차례

<屡屡 屢屢> 1.자주2.누차3.종종

<屡空>누공(屢空) 쌀독이 비어 굶는 생활[屢空]

 

속에 즐겼던 소루가 또 있지 않소 / 空中有邵樓

송(宋)나라 소강절(邵康節)이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생활을 즐겼던 안락와(安樂窩)를 말한다. 그가 처음 낙양(洛陽)에 왔을 적에 비바람도 제대로 막지 못하는 오두막을 하나 지어 놓고는 가끔 쌀독이 비어 굶는 생활[屢空]을 하면서도 유유자적하며 스스로 안락 선생(安樂先生)이라고 일컬었다는 고사가 있다. 《宋史 卷427 邵雍列傳》

자주 끼니를 굶는다는 말로, 안빈낙도(安貧樂道)를 뜻하는 표현이다. ‘공자의 제자 안회(顔回)가 도(道)의 경지를 즐기면서 자주 끼니를 걸렀다.[回也 其庶乎 屢空]’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論語 先進》단표의 생활 속에 끼니 걱정을 해야 하니 / 簞瓢屬屢空단표의 생활 속에 끼니 걱정을 해야 하니 / 簞瓢屬屢空

 

<屡常> 祖宗朝屢常講 조종조(祖宗朝)에 여러 번 이 일을 강구하다

<屡復> 정자(程子)는 ‘자주 회복하는 것이 무슨 허물인가. 과오(過誤)는 잘못에 있고, 회복하는 데에 있지 않다.〔屢復何咎 過在失而不在復〕’라고 하였다.

<屡舞(频频歌舞)>덩실덩실 춤추고 노래 불렀네 / 屢舞雜歌呼

<屡屢遷迁> 여러 차례. 누차. 자주

<屡盟> 자주 맹약하지 말고 자주 돌아옴 경계하라 / 勿屢盟戒頻 復

<屡月> 여러 달 동안 머물러 지냈나니 / 屢月盤旋

<临臨事屢屡断> 일에 처하여 누차 결단한 것은 용기이고 / 臨事屢斷勇也

<星霜屡移> 세월이 여러 번 바뀜

<簞瓢屡罄> 생활이 예사롭지 않게 가난하고 결백한 생활에 비유.簞瓢는 簞食瓢飮의 준말로① 소쿠리 밥과 표주박 물을 말하고 屡罄는 자주 비어 있음.

家人謹守其訓。雖簞瓢屢罄。不敢輒取資焉。初喪가인(家人)들이 그 가르침을 삼가 지켜 비록 집안에 양식이 떨어져도 감히 제수로 쓸 곡식을 갖다 쓰지는 않았다.

 

✽< 조선왕조실록에서 기록>

(屦) <신발 구>를 屢 와 혼돈 합니다. 분명 다른 데. 옛날 에도 오늘날에도.... 어찌 하오리까.

장구(杖屨)/장루(杖屢)로 혼돈하여 읽고 있다.

순조 33년 9월 9일 병자 1833년

瞻彼黃驪, 山高而水長, 忠文公杖屨攸止衣冠之藏也

저 황려(黃驪) 를 바라본즉 산은 드높고 강물이 둘렸으니, 곧 충문공의 장루(杖屢)와 의관(衣冠)을 간직한 곳입니다

杖屨를 장루(杖屢)로 읽고 있다.

 

 

1. 1450년 문종 즉위년 7월 5일 丁未 。

王聞書之言, 惕若恐懼而爲戒, 書於几席、觴豆、杖屨、鑑槃、戶牖、弓劍, 莫不銘焉。 장구(杖屨)

 

2. 1603년 선조 36년 8월 9일 壬辰

杖屨警欬, 宛然尙存, 신발을 둔 흔적이며 기침소리의 여운이 완연히 아직 남아 있는데,

3. 1701년 숙종 27년 8월 27일 壬午 至於百官服制之宜用衰絰、杖屨, 自有先聖之定論。

백관(百官)의 복제(服制)에 의당 최질(衰絰)·장구(杖屨)를 사용해야 한다는 것에 이르러서도 선성(先聖)께서 정론(定論)이 있습니다

4. , 1702년 숙종 28년 6월 3일 癸丑 ○永平幼學尹明漢等上疏曰: 臣等所居之鄕, 有先輩杖屨所及之處。 영평(永平)의 유학(幼學) 윤명한(尹明漢) 등이 상소하기를,

"신(臣)들이 사는 시골에 선배(先輩)들의 발자취가 미친 곳이 있습니다

 

 

5. 1703년숙종 29년 9월 1일 甲辰 , 一區桑柘, 故居猶存, 卽其絃歌杖屨之所。 而立祠竝享, 한 구역 상자(桑柘) 속에는 옛집이 그대로 남았으니, 바로 학문에 힘쓰시고 거니시던 처소(處所)입니다.

 

6. 1724년 경종 4년 2월 5일 己酉 諫院啓言: "尹拯道學, 爲今日儒宗, 杖屨所經, 爭享俎豆, 그의 장구(杖屨)가 거쳐간 곳마다 앞다투어 서원(書院)을 세워 제향(祭享)을 받드는 것은 학문을

 

 

7. 영조실록 127권, 부록 / 영조 대왕 빈전 친제문

餐焉而命之供匙箸, 動焉而命之奉杖屨。 .

진지를 드실 적에는 숟가락과 젓가락을 집어 주도록 명하시고 기동하실 적에는 지팡이와 신을 내어 놓도록 명하셨습니다

 

8. 1776년 청 정조 즉위년 5월 11일 辛巳

餐焉而命之供匙箸, 動焉而命之奉杖屨

진지를 드실 적에는 숟가락과 젓가락을 집어 주도록 명하시고 기동하실 적에는 지팡이와 신을 내어 놓도록 명하셨습니다

 

9. 1777년 정조 1년 4월 15일 庚戌西薇之洞, 三龜之亭, 杖屨殆遍, 서미동(西薇洞)과 삼귀정(三龜亭)은 그의 거닐던 발자취가 두루 거쳤던 데이어서

10. 1777년 정조 1년 4월 15일 庚戌 蓋此華陽卽時烈晩年講道之所, 而尙夏從遊杖屨,

이 화양동은 곧 송시열이 만년(晩年)에 도(道)를 강론하던 곳이고 권상하가 그 문하에 종유(從遊)하여 발자취가 그 곁을 떠난 적이 없었습니다

11. 1778년 정조 2년 12월 18일 甲戌 聖敎至此, 臣不勝欽仰矣。 臣先祖杖屨之所嘗遊處,

. 신의 선조(先祖)가 머물러 일찍이 유식(遊息)하던 곳

 

12. 1779년 정조 3년 8월 6일 丁巳 此邑, 乃孝廟陵寢之地, 又先正杖屨之所, 則建俎豆之享,

고을은 효묘(孝廟)의 능침(陵寢)이 있는 곳이고 또 선정이 소요한 곳이니, 제향(祭享)할 곳을 세워서

13. 1781년 정조 5년 7월 5일 乙巳

紹賢書院致祭, 不但已有成命, 此地卽先正杖屨之所,

소현 서원의 치제는 이미 성명(成命)이 있었을 뿐만이 아니라, 이곳은 곧 선정(先正)의 장구(杖屨)가 머물렀던 곳인데

14. 1782년 정조 6년 12월 28일 庚寅 至若湖西、海西, 皆是先正俎豆之鄕也, 杖屨之所也그렇지만 호서와 해서에 있어서는 모두 선정을 제사지내는 고장이며 선정이 노닐던 곳이다.

 

15.1790년 정조 14년 2월 13일 甲子

文成則世墳山, 在於紫雲山下, 文簡則一生棲息, 卽是坡山村中。 故各就杖屨之地,

문성공은 여러 선대(先代)의 묘소가 자운산(紫雲山) 자락에 있고, 문간공은 일생동안 은거(隱居)하던 곳이 곧 파산촌(坡山村) 안이었습니다. 이에 각기 그들이 살았던 곳에다가 높여 제사하는 도리를 다하고 있었는데

16. 1790년 정조 14년 2월 13일 甲子 , 乃以贈領議政忠正公 洪翼漢追配焉, 蓋以文貞公杖屨之所憩也,

충정공(忠正公) 홍익한(洪翼漢)을 추배(追配)하였습니다. 대개 문정공이 생전에 머물러 살았던 곳이고

17. 1790년 정조 14년 2월 17일 戊辰 , 乃是稠貫鄕, 而爲平生杖屨之所, 則士林虔奉之所以必於此,

바로 허조의 관향(貫鄕)이며 그가 한평생 살던 곳으로서, 선비들이 꼭 이곳에다 모시려고 하고 있습니다

18. 1796년 정조 20년 11월 8일 己酉 。 瞻鰲山杖屨之所, 非無妥 靈之祠; 지팡이를 짚고 돌아다녔던 오산(鰲山) 을 바라보면 영혼을 봉안한 사당이 없지는 않지만

19. 1800년 정조 24년 4월 30일 壬子

海州自是先正文成公杖屨之鄕,

해주(海州)는 본디 선정 문성공(文成公) 이 살았던 고을이지만

20. 1833년순조 33년 9월 9일 丙子 瞻彼黃驪, 山高而水長, 忠文公杖屨攸止衣冠之藏也。

저 황려(黃驪) 를 바라본즉 산은 드높고 강물이 둘렸으니, 곧 충문공의 장루(杖屢)와 의관(衣冠)을 간직한 곳입니다

장루(杖屢)- 杖屨(장구)로 고쳐져야 할 것.

21., 1871년 고종 8년 3월 9일 己亥 一人一院外疊設者, 禮判稟定于大院君前, 可以杖屨妥靈之外, 竝爲撤之。

예조 판서가 대원군(大院君)에게 품정(稟定)하여 신주를 모신 서원을 제외하고는 모두 철폐하라

22. 1878년 고종 15년 3월 11일 辛酉。

"先賢杖屨之所、桑梓之鄕, 建置院宇、

"선현(先賢)이 사시던 곳이나 선현의 고향에 서원(書院)을 건립하여

 

 

 

 

1. 문종 즉위년 7월 5일 정미 1450년

" 王聞書之言, 惕若恐懼而爲戒, 書於几席、觴豆、杖屨、鑑槃、戶牖、弓劍, 莫不銘焉。 方武王踐阼之初

왕이 《단서》의 말을 듣고 척연(惕然)히 두려워하여 이것을 계명(戒銘)으로 삼고, 궤석(几席) ·상두(觴豆) ·장구(杖屨) ·감반(鑑槃) ·호유(戶牖) ·궁검(弓劍)에 새기지 아니한 데가 없었습니다

 

2. 숙종 27년 8월 27일 임오 1701년

至於百官服制之宜用衰絰、杖屨, 自有先聖之定論

임금의 복제에 대한 대사성 김진규의 상소문백관(百官)의 복제(服制)에 의당 최질(衰絰)·장구(杖屨)를 사용해야 한다는 것에 이르러서도 선성(先聖)께서 정론(定論)이 있습니다

3. 경종 4년 2월 5일 기유 1724년

尹拯道學, 爲今日儒宗, 杖屨所經, 爭享俎豆, 所以有補於右文之化者不淺, 而朝家因疊設之禁, 至議請毁已建之院

윤증(尹拯)의 도학(道學)은 오늘날 유학(儒學)의 종사(宗師)가 되는지라, 그의 장구(杖屨)가 거쳐 간 곳마다 앞 다투어 서원(書院)을 세워 제향(祭享)을 받드는 것은 학문을 숭상하는 교화에 보탬을 준 것이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4. 정조 5년 7월 5일 을사 1781년

此地卽先正杖屨之所,

이곳은 곧 선정(先正)의 장구(杖屨)가 머물렀던 곳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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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杖屢를 쓴 곳 번역원

원본의 이미지도 杖屢를 썼기에 고쳐야 할 곳들인데 고칠 수 없어 그대로 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杖屢는 절대로 杖屨로 써야 한다.

1 척약재학음집(惕若齋學吟集)

共步蟾宮廿六春。衣錦兩郞隨杖屢。一時歆艶屬吾人。

杖屨로 수정 원본에도 수정이 되어야 함 憶昔追隨杖屢移次杜陵秋興八首西齋集卷之二

2 삼탄집(三灘集) 三灘先生集卷之二

玉署今朝寄短章。對此依然陪杖屢。朗吟高韻轉琅琅。

모시던 때 그 모습이 의연한데 / 對此依然陪杖屢

杖屨로 표현된 곳이 585군데나 되어 있어 반드시 고쳐야 할 단어인데도 원본을 고칠 수 없어 그대로 둔 것 같다.

• 옛날엔 곁에서 모시며 시주를 나눴는데 / 詩酒昔曾陪杖屨

• 한스러운 것은 어르신 모시지 못하고서 / 恨我未能陪杖屨

 

3 일송집(一松集) 一松先生文集卷之四 詩宜。耽經玩史門多閉。問柳尋花杖屢移。裁得葛衣從短短。

爲是憑高杖屢移。存齋集 涵碧園亭

 

4 간송집(澗松集) 澗松先生續集卷之四 祝文○祭文 祭裵汝明文 조임도(趙任道) 1744

追陪杖屢。逍遙觴詠。

5 백호집(白湖集) 白湖先生文集卷之十四 書 答許眉叟 윤휴(尹鑴) 1927

東事伊始。恨不得陪杖屢執耒耜於田野之間也。

 

6 삼연집(三淵集) 三淵集卷之十 詩 春興雜詠 김창흡(金昌翕) 1732

其四十二 換面峰來杖屢停

7 지수재집(知守齋集) 知守齋集卷之十三 行狀 先府君行狀 유척기(兪拓基) 1878

愉爭來謝府君。公餘多暇日。杖屢嘯咏於白雲小白之間。

8 풍서집(豐墅集) 豊墅集卷之八 祭文 祭尹誠仲 顯東 文 이민보(李敏輔) 미상

同社少長。偕君杖屢。山齋湖閣。樽俎飣鋀。

9 쌍계유고(雙溪遺稿) 雙溪遺稿卷之六 墓碣銘 贈判書李公墓碣銘 이복원(李福源) 미상

日與諸昆季。杖屢來往。韶顔鶴髮。輝暎門巷。

10 존재집(存齋集) 存齋集卷之四 密城朴允默士執著 詩 涵碧園亭 박윤묵(朴允默)

林端斷麓平如榻。爲是憑高杖屢移。

11 존재집(存齋集) 存齋集卷之十五 密城朴允默士執著 詩 辛丑三月二十二日山下。

植杖屢興喟。若要傍枝長。又以百年冀。寄語爲後者。

12 면우집(俛宇集) 俛宇先生文集卷之十 書 上寒洲先生 곽종석(郭鍾錫) 1925

仲夏上書。適際杖屢以道儒叫閽之擧。

13 면우집(俛宇集) 俛宇先生文集卷之十四 書 答郭丈君玉 辛丑 곽종석(郭鍾錫) 1925

可一煩杖屢。重辱于嵒寓。做數旬從頌。

14 면우집(俛宇集) 俛宇先生文集卷之百三十七 記 三峯書堂記 丁酉 곽종석(郭鍾錫) 1925

杖屢之所甞及。咳唾輝光之所甞被焉。

別廳于先生 杖屢之所 <陶溪先生遺稿卷之三龍頭別廳立議序>

 

15 면우집(俛宇集) 俛宇先生文集續卷之二 書 答鄭孔厚 癸丑 곽종석(郭鍾錫) 1925

待花喣溫暖。杖屢扶携。相羊於雲烟魚鳥之壑。

 

 

16 소호당집(韶濩堂集) 韶濩堂文集定本卷十一 詩文集總名曰合刊韶濩堂集○花開金澤榮于霖著 行狀 崇祿大夫判敦寧府事徐公行狀 甲辰 김택영(金澤榮) 1927

幅巾杖屢。徜徉溪山間。

17 폐추유고(敝帚遺稿) 敝帚遺稿卷之一 詩 松石十咏 임홍량(任弘亮) 1868

時有山僧杖屢從。半夜燒香淸坐處。

18 명암집(明庵集) 明庵集卷之四 書 答曺台老 元齡 정식(鄭栻) 1901

棲息杖屢之地。依然在玆。

 

19 서재집(西齋集) 西齋集卷之二 詩○柑山錄 次杜陵秋興八首 임징하(任徵夏) 1844

隨杖屢移。知道弟兄對酒處。

20 지암유고(止庵遺稿) 止庵遺稿冊二 詩○丁卯燕行錄 蒙宥後三日。與玄度及兒輩泛舟遊於八峰之下。次澤堂韵。 이철보(李喆輔) 미상

杖屢依俙傍薜蘿。從古八峰靑不墜。

21 지암유고(止庵遺稿) 止庵遺稿冊三 [祭文] 祭季父文 이철보(李喆輔) 미상

亦安得以追陪杖屢。以成阮巷之樂也耶

22 운계만고(雲溪漫稿) 雲溪漫稿卷之九 祭文 祭柳奉事 應爀 文 김종정(金鍾正) 미상

終慚鑿枘。拄杖屢下。滯根猶粘。

 

23 도계유고(陶溪遺稿) 陶溪先生遺稿卷之三 序 龍頭別廳立議序 윤홍규(尹弘圭) 미상

爲設別廳于先生杖屢之所。又馳書徵序文於某。

24 성암집(誠菴集) 誠菴集卷之二 書 與郭承旨 박문오(朴文五) 1904

有足可觀。惟恨一日不得侍杖屢于此。與有作成之尤爲神速也。

25 용재총화(慵齋叢話) 慵齋叢話卷之三 慵齋叢話卷之三 성현(成俔) 1525

相距纔五里許。或杖屢相從。或以詩相酬唱。

26 간송집(澗松集) 澗松集 續集 卷四 祝文ㆍ祭文 祭裵汝明文 조임도(趙任道) 1744

余亦感知己之厚恩,追陪杖屢,逍遙觴詠,

 

27 낙재선생문집 01(樂齋先生文集) 서사원 강민구 達城徐氏 縣監公派 宗中 2008

幷讀之, 怳然如陪侍杖屢, 徘徊於臺上也. 仰冀大斤之揮敎也-217 감사(監司) 송영구(宋英耈)와 이별하며

杖屨 고전번역서 전체 (441)杖屨"에 대해 총6,008건의 자료가 검색되었습니다.6,008건의 고전번역서 전체 (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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杖屢 장 루 <窓 루>

杖屨 장 구 < 신 발 구>

 

1衣錦兩郞隨杖屢1. 척약재학음집(惕若齋學吟集)김구용(金九容) 원본틀림

2對此依然陪杖屢삼탄집(三灘集)이승소(李承召)원본도 틀림

3.東阡杖屢今何往대곡집(大谷集) 원본과 다름

4.杖屢誰來往 용문집(龍門集)박계현(朴啓賢) 원본과 다름

 

5.唯以杖屢書帙自隨옥계집(玉溪集) 이정귀(李廷龜) 원본과 다름

6.杖屢從之。문봉집(文峯集) 원본과 다름

7.柳尋花杖屢移일송집(一松集)심희수(沈喜壽) 원본도 틀림

8. 密邇先生杖屢之鄕。외재집(畏齋集)이현일(李玄逸)원본과 다름

9.惟杖屢之地俎豆之禮우복집(愚伏集)정경세(鄭經世)원본과 다름

10.杖屢來往 월사집(月沙集)이정귀(李廷龜) 원본과 다름

11追陪杖屢간송집(澗松集)조임도(趙任道)원본도 틀림

12杖屢迨遍백곡집(柏谷集)이현석(李玄錫)원본도 틀림

13恨不得陪杖屢執耒耜於田野之間也백호집(白湖集)(尹鑴)원본틀림

14暇日杖屢逍遙於其間。남계집(南溪集)박세채(朴世采)원본다름

15 當就杖屢之所止농은유고(農隱遺稿)윤추(尹推) 원본다름

16換面峰來杖屢停。 삼연집(三淵集) 김창흡(金昌翕)

원본도 틀림

17杖屢嘯咏於白雲小白之間지수재집(知守齋集)유척기(兪拓基)원본틀림

18偕君杖屢풍서집(豐墅集) 이민보(李敏輔)원본틀림

19杖屢來往。쌍계유고(雙溪遺稿)이복원(李福源) 원본틀림

20垂白休敎杖屢踈 해좌집(海左集)정범조(丁範祖) 원본과 다름

21爲是憑高杖屢移。 존재집(存齋集)박윤묵(朴允默)원본도 틀림

22 植杖屢興喟존재집(存齋集)박윤묵원본도 틀림

23 適際杖屢以道儒叫閽之擧면우집(俛宇集) 곽종석원본도 틀림

24 可一煩杖屢면우집(俛宇集) 곽종석(郭鍾錫)원본도 틀림

25 杖屢之所甞及면우집(俛宇集)곽종석(郭鍾錫) 원본도 틀림

26 杖屢扶携。면우집(俛宇集)곽종석(郭鍾錫)

27 雖於杖屢攸及송사집(松沙集)기우만(奇宇萬) 1931

28 幅巾杖屢소호당집(韶濩堂集김택영(金澤榮)

29 杖屢怳親독암유고(獨庵遺稿) 박필주(朴弼周)

 

30野寺尋花杖屢斑석문집(石門集) 정영방(鄭榮邦)

31 任爾杖屢之逍遙금천집(琴川集) 정시수(鄭時修) 1907

32時有山僧杖屢從폐추유고(敝帚遺稿)임홍량(任弘亮)

33棲息杖屢之地。명암집(明庵集)정식(鄭栻)

34隨杖屢移서재집(西齋集)임징하(任徵夏)

35 杖屢依俙傍薜蘿지암유고(止庵遺稿) 이철보(李喆輔)

36 亦安得以追陪杖屢지암유고(止庵遺稿) 이철보(李喆輔)

37 拄杖屢下。운계만고(雲溪漫稿) 김종정(金鍾正)

38 爲設別廳于先生杖屢之所도계유고(陶溪遺稿) 윤홍규(尹弘圭)

39 杖屢還頓本第否。강고집(江皐集) 유심춘(柳尋春)

40 以正廟致祭文有曰愚伏山中杖屢圖書是也十七字강고집(江皐集) 유심춘(柳尋春)

41 陪奉杖屢응와집(凝窩集) 이원조(李源祚)

42 惟恨一日不得侍杖屢于此성암집(誠菴集) 박문오(朴文五)

相距纔五里許。或杖屢相從慵齋叢話卷之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