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안동 가문 시 모음/농암 김창협의 시 모음

농암 김 창협의 彈琴臺 탄금대

백촌거사 2007. 11. 30. 21:57

 

彈琴臺 탄금대 ----------------------

 

                                                                           김 창협(金昌協)

 

                                                                   1651년(효종 2)-1708년(숙종 34)

 

                                                                 자: 중화(仲和) 아호: 농암(農巖).시호:문간공(文簡公)

1 舟子望琴臺。( 주자망금대 ) 뱃사공이 탄금대 바라보며

2 投飯贈江魚。( 투반증강어 ) 먹이를 물고기에 던져주네

3 問此誰與食。( 문차수여식 ) 누구에게 주느냐고 물으니

4 哀哉國殤徒。( 애재국상도 ) 슬프도다 나라 위해 죽은 사람들이라고

5 喪亂安可詳。( 상란안가상 ) 난리의 참상 어찌 자세히 알까마는

6 氣結百載餘( 기결백재여) 오랜 세월 가슴에 원기 맺혀어라.

7 貴賤死同日。( 귀천사동일 ) 귀천 없이 모두 함께 죽음 택하고

8 智勇淪一塗。( 지용륜일도 ) 지력과 용기로 같은 길에 빠진 것이네.

9 跡掃鵝鸛陳。( 적소아관진 ) 싸움의 자취 물새 함께 사라졌으나

10 魂聚蛟龍墟。( 혼취교룡허 ) 혼령들은 강물 속에 모여 있구나

11 春雲晦洲島。( 춘운회주도 ) 봄 구름은 섬 물가에 어둡고

12 冤氛疑有無。( 원분의유무 ) 원한의 기운들이 보일 듯 말듯.

13 滔滔西逝水。( 도도서서수) 넘실넘실 서쪽으로 강물 흘러가고

14 遺憤不可除( 유분불가제) 남겨진 울분 진정 버릴 수 없어라

15 榜歌咽浦思。( 방가인포사) 배젓는 노랫소리 강물도 목메이며

16 古臺鳥悲呼。( 고대조비호 ) 옛 누각 새 한 마리 구슬피 우는구나

17 持觴寄一哀。( 지상기일애 ) 술잔 들어 슬픔을 조용히 달래니

18 擊汰且前徂。 ( 격태차전조 ) 배는 앞으로만 말없이 나아가네

                 是日。舟人有投飯江中事(시일주인유투반강중사 )

                    이 날은 뱃사공이 강물에 먹이를 던져주는 일이 있었다.(農巖集卷之三에서)

-------------------------------

⧔ 한자와 단어이해 --------------------------------------------

주자(舟子) : 뱃사공 ✲ 증강어(贈江魚): 贈 보낼 증. 강물고기에 먹이를 주다.

국상(國殤) : 나랏일에 순절한 사람들. 殤 일찍 죽을 상. 1592 년 임란 때 탄금대 전투 에서 순절한 신립장군 이하 수많은 병사들의 죽음

상란(喪亂) : 임진왜란의 참상 ✲기결(氣結): 원한의 기운이 가슴 속에 맺혀 있음

백재(百載) : 백년의 세월. 즉 오랜 세월.✲ 윤일도(淪一塗) :淪 잠길 륜.一塗 같은 길.

모두가 나라 위한 희생이었다는 말. 지략과 용맹으로 희생했음을 말함.

아관진(鵝鸛陳) :鵝 거위 아.鸛 황새 관. 강가를 날아가는 물새들.

혼취(魂聚): 聚모일 취 . 죽은 영혼들이 모여 있음. ✲교룡허(蛟龍墟):蛟 교룡 교

墟 언덕 허. 蛟龍은 용의 일종. 상상의 동물. 큰물을 일으키고, 뱀 같고 길이가 한 길을 넘는다고 함. ✲회주도(晦洲島): 晦그뭄 회. 어둡다는 이미지. 탄금대가 있는 물가.

원분(冤氛): 원통할 원. 기운 분. 왜적들에 대한 원통한 기운.✲도도(滔滔): 물 넘칠 도

물이 창일하여 흐름. 거침없이 말을 함. 넓고 큰 모양으로 흘러감. 세상 풍조를 따라가는 말

여기서는 강물이 세차게 흘러가는 모양. ✲방가 (榜歌) :배 저을 방. 배 젓는 노래 소리. ✲인포사(咽浦思) : 咽 목멜 인. 浦 물가 포. 배 젓는 노래 소리에 목 메이고 강물도 슬 프게 흐르고 있다는 뜻. ✲ 지상(持觴) 술잔 상. 술잔을 들음.✲격태(擊汰): 부딪칠 격.

지나갈 태 . 배가 세차게 나아감. ✲전조(前徂) 갈 조 앞으로 나아감.

-------------------------------------------------------------------

분석과 감상이해 ------------------------------------

임진 왜란 당시 <탄금대 전투>에서 산화해 간 호국영령을 향한 추도하는 회고적인 서정이 담긴 시다.

<<분석 >> ------------------------------------------------------

1 행 - 4 행 : 뱃사공의 추모하는 의식 ------ 시정의 동기

탄금대를 찾았을 때 눈에 비친 뱃사공들의 추모하는 의식 행사를 보게 됨. 뱃사공들은

임란의 전투로 죽어간 영혼을 달래는 추모 의식을 하고 있음이라. 지은이도 함께 옛 역사를 되돌아 보면서 탄금대에서의 비극적인 아픔을 그리고 있다.

 

5행 --10 행 : 죽어간 혼령들의 회고 ------- 지은이의 애상감

왜적과 맞싸우다가 강물에 투신한 신립 장군, 김여물 장수들의 혼령들이 탄금대 강 아래에 깃들어 있을 것이라고. 임진왜란의 역사가 100 년의 세월이 흘러갔어도 그 혼령들은 강을 지키고 있을 것이라고. 악성 우륵이 가야금을 연주하던 곳, 비록 임란 전투에서 패배를 했지만 나라를 위해 몸을 버린 영혼들을 향하는 지은이의 서정은 깊은 애상감에 젖어 있었을 것이다.

 

11 행 --18 행 : 탄금대에서의 현실 정경 ----- 슬픔의 정서

가슴 속 울분에 통곡하고 있는 서정이 나타나 있다. 구름도 어둡고, 강물도 슬픔으로 지저귀는 새 울음소리도 모든 것이 흘러간 역사에 대한 비극적인 아픔으로 표현되었다.

 

<<遺憤不可除。( 유분불가제) 남겨진 울분 진정 버릴 수 없어라.>>하고 토로하는 필자의 서정은 옛 유적지를 돌아보면서 가슴 속에 남아 있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역사적인 비극에 대한 현실적인 인식이다.

--------------------------------------------------------------------

彈琴臺

충북 충주시에 있는 명승지로 가야국의 우륵이 신라로 와서 가야금을 타던 곳.

임진왜란( 1592년 ) 4 월 26 일 도순변사로 신림(申砬)<1546-1592>장군이 종사관 김여물 ( 金汝物 ) <1548-1592>과 비록 패하기는 했지만 싸우다가 강물에 투신 순절한 곳임.

지은이 소개

김 창협 ( 金昌協 )1651(효종 2)~1708(숙종 34).

 

 

자는 仲和. 호는 農巖. 당대 명문 출신으로 상헌(尙憲)의 증손자이며, 아버지 수항(壽恒)과 형 창집(昌

 

 

集)이 모두 영의정을 지냈다. 육창(六昌)으로 불리는 여섯 형제 중에서 특히 창협은 문(文)에 명망이 높

 

았다.

 

1.창집(昌集) <<1648(인조 26)∼1722(경종 2) 자 : 여성(汝成), 아호 : 몽와(夢窩) 시호 :충헌(忠獻) 문집. 저서 : 몽와집(夢窩集). 국조자경편(國朝自警編)

오륜전비언해(五倫全備諺解). 노론 4 대신의 한 사람.>>

2.창협(昌協). <<1651(효종2)- 1708(숙종34 )자 : 중화(仲和). 아호 농암 (農巖).

이단상(李端相)의 사위. 시호: 문간 (文簡). 양주 석실서원. 양암 녹동서원에 제향 >>

3.창흡(昌翕)<< (1653년(효종 4) -- 1722년(경종 2)

자: 자익(子益) 호 : 삼연 (三淵) 시호 : 문강(文康) 문집 : 삼연집(三淵集)>>

4.창업( 昌業 )<<1658(효종 9)~1721(경종 1).

자: 대유(大有), 호: 가재(稼齋)·노가재(老稼齋). 문집 : 노가재집.

1712년(숙종 38) 형 창집이 사은사(謝恩寺)로 청나라에 갈 때 함께 다녀온 뒤 〈연행일기 燕行日記〉를 썼고, 그림으로는 〈추강만박도 秋江晩泊圖〉

(간송미술관소장)가 있다.>>

5. 창집( 昌緝 )<< 1662(현종3 ) - 1713(숙종39) 자 : 경명(敬明). 호 : 포음 (圃陰). 문집: 포음집( 圃陰集 )

6. 창립(昌立)<<1666(현종7) -1683(숙종9) 자 : 탁이 (卓爾).호 : 택재 (澤齋)

시문에 능했으나 요절하였음.>>

부자간의 문운이 번성하여 안동가문을 시문으로 빛나게 하였다. 농암은 17 세기 후반에서 18 세기 초기까지 주로 활동한 문인이었다. 그는 가문과 연루되었던 기해예송 ( 1659 ), 갑인예송( 1674 ) 경신대출척 ( 1680 년 ) 기사환국 ( 1689 ) 갑술환국 ( 1694 ) 등으로 가문의 고통을 몸소 체험하였고, 현실 모순의 문제들을 시문에 반영하였다.

 

농암은 1669년 ( 현종 10 년. 19 세 ) 에 진사시에 합격을 했고, 승정원 동부승지, 성균관 대사성, 병조참의, 사간원 대사간 등을 역임한 바 있으나 아버지가 기사환국으로 사약을 받자 현실참여를 거부하고 강호자연으로 돌아가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부친이 졸한 그 해에 영평으로 갔고, 1692년( 42세 )에는 영평 응암에 농암서실을 짓고 스스로 아호를 농암( 農巖 )이라 하였다. 야인으로 살아가겠다는 그의 의도였다. 이후 갑술옥사 이후 아버지가 신원됨에 따라 대제학, 예조판서, 이조참판 등 많은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직하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1705년(55세)에 석실서원에서 강학 하며 보냈다. 1725 년 문간( 文簡 )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24세 때 송시열을 찾아가 소학(小學)에 대해 토론했고 이이의 학통을 이었으나 호락논쟁(湖洛論爭)에서는 호론(湖論)의 입장을 취했다. 전아하고 순정한 문체를 추구한 고문가(古文家)로 전대의 누습한 문기(文氣)를 씻었다고 김택영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다. 농암의 학문은 율곡과 퇴계의 사상을 절충하였다. 정조는 농암의 시문은 〞단아하면서 깨끗하다.〝< 홍재전서 日得錄 >라고 평가하였다.

 

숙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양주의 석실서원(石室書院), 영암의 녹동서원(鹿洞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농암집〉·〈주자대전차의문목 朱子大全箚疑問目〉·〈오자수언 五子粹言〉·〈이가시선 二家詩選〉 등이 있고, 〈강도충렬록 江都忠烈錄〉·〈문곡연보 文谷年譜〉 등을 엮어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