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곡의 영정---- 안동김씨세보에서 >
< 문곡의 산소 ---와부읍 돌누께 마을 >
五月卽事 오월 즉사----------
5 월 속의 즉흥시
< 영암에서의 5 월 >
김 수항(金壽恒)
1629년(인조 7) -- 1689년(숙종 15)
江南五月野梅黃。강남오월야매황
남쪽 오월 들 매실 누렇게 익었고
小雨新晴午景長。소우신청오경장
가랑비 산뜻이 개며 한낮의 정경 길기도 해라
繞郭叢篁初逬筍。요곽총황초병순
성곽 둘레 대숲엔 처음으로 죽순 돋아나고
夾溪畦稻已分秧。협계휴도이분앙
내를 낀 두둑엔 모들 옮겨 심어 벼들이 자라네.
天時物色看頻換。천시물색간빈환
계절 따라 자연 경치 볼 때마다 자주 바뀌니
世味人情付兩忘。세미인정부양망
세상맛과 인정들 둘 모두 잊음에 붙였어라.
麥飯一盂瓜一辦。맥반일우과일판
보리밥 한 사발에 오이 반찬 갖췄으니
珍烹不羨太官羊 진팽불선태관양
희귀한 음식이나 궁중요리 안 부러워라.
<文谷集卷之四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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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자 ------------------------------
繞 두를 요.叢 모일 총 篁 대숲 황 逬 솟아날 병 筍 죽순 순 畦 밭두둑 휴 秧 모앙
盂 사발 우 辦 갖출 판 烹 삶을 팽 羨 부러워할 선
◀ 단어 이해 ---------------------------------------------
▹江南 : 여기서는 적거지였던 영암. ▹叢篁 : 대밭. 대숲▹稻已分秧 : 논에 모를 심는 것. ▹兩忘: “요(堯)를 칭찬하고 걸(桀)을 비난하는 것보다는 둘을 다 잊어버리고 도(道)에 동화(同化)하는 것이 낫다.” 한 데서 온 말이다.《莊子 大宗師》 지난 시간의 모든 것들을 잊어 버리고 현재의 생활에 만족스럽게 동화하는 모습의 생활
▹一盂 : 한 사발 ▹ 珍烹 : 맛있는 음식. ▹ 太官羊 : 궁중요리
少府의 소속으로 궁중의 膳羞를 맡아보는데서 요리한 양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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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상 이해 ----------------------
지은이는 47 세 7 월( 숙종 1 년1675 년 )부터 50 세 9 월( 숙종 4 년 1678 년)까지 영암(靈巖)땅 구림(鳩林)마을에서 적거 (謫居)생활을 하였다.
유배지에서 5 월을 맞으며 즉흥적으로 떠오르는 시상을 담은 작품이다.
유배지에서 맞이하는 작가의 처지가 비록 고달프고 슬픔이 배인 심정이나 오월 농촌의 분주한 모습들에 정신적인 위로를 받으며 簞瓢陋巷의 생활이지만 安貧樂道하는 여유 있는 심정이 표현되었다. 정치적인 불행한 현실에 빠져들어 유배를 온 것이지만 여러 가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순응해 나가는 생활 태도가 보이고 있다.
내용분석
< 1-2 연 >---- 오월의 자연 정경---- 매실 익고, 가랑비 그친 진한 녹색의 산뜻한
풍경.
< 3 -4 연 >--- 오월의 들판 -- 생명력이 넘치는 동적인 이미지. 분주한 농촌 들판의
모습-------------< 서경 >
< 5 -6 연 >--- 변화에 대한 서정 --- 자연도 변하고, 인간사도 변함. 정치적인 현실도
변해나간다는 주관적인 서정.
< 7 - 8연 >----- 현재 생활의 여유로움---- 지난 시간에 누리던 부귀영화 다 잊고
만족해 하는 심정.--------------< 서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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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실이 주렁주렁 달리고 --- 경기 여주 도롱리 마을 >
< 모를 심은 5 월의 농촌 --- 경기 여주 도롱리 앞골에서 >
▶ 김수항의 유배 과정---------------------------------
1. 제 일차 기해예송(己亥禮訟)
효종 10년(1659 기해 5월 4일에 효종이 승하하고, 효종의 모후인 자의대비(慈懿大妃) 조씨(趙氏)<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 >의 복상服喪) 문제로 서인과 남인 사이의 논쟁.
김수항은 좌부승지. 우승지로 있으면서 송시열(宋時烈) 등과 기년설(朞年說)을 주장하여 서인(西人)이 승리하게 했고, 윤선도(尹善道)의 상소문을 탄핵하여 귀양가게 했다.
▪▪▪기년설(朞年說):---송시열. 송준길
▪▪▪삼년설 ( 三年說 )---- 남인 허적 윤선도 소북계 윤휴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의하면 부모가 장자에 대해서는 3 년상이고 차자 이하의 아들에게는 기년상이었다. 서인인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 등은 효종이 자의대비에게는 둘째 아들이므로 차자로서 기년상이 당연하고 비록 왕위를 계승하였다고는 하여도 사종지설(四種之說;왕위를 계승하였어도 3년상을 할 수 없는 경우) 중 체이부정(體而不正;적자이면서 장자가 아닌 경우)에 해당되어 기년상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이에 대하여 남인인 허목(許穆)·윤휴 등은 효종이 왕위를 계승하였으므로 장자로 대우하여 3년상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2. 제 이차 갑인 예송 (甲寅禮訟)
1674년( 현종 15 년 ) 효종비 인선왕후(仁宣王后)장씨가 죽었을 때 자의 대비 복상 기간 문제로 다시 예송 논쟁이 일어났다.그의 형 김수흥(金壽興)과 함께 자의대비의 복상문제에 대하여 대공설(大功說)을 주장하다가 남인이 주장한 기년설이 채택되자 벼슬에서 물러 났다.숙종 1년(1675) 왕의 부름을 받아 다시 좌의정에 복귀했으나 남인의 윤휴, 허적(許積) 등을 배척하다가 그들의 미움을 사 관직이 삭탈되고, 원주(原州)에 부처(付剔)되었다. 이듬해 풀려났으나 다시 영암(靈岩)에 부처(付剔)되었다가 철원(鐵原)으로 이배되었다.
▪▪▪付剔 :형벌의 한 가지로서, 죄인을 일정한 장소에 보내어 거주지를 한정하여서 귀양살이 시키는 것. 부처(付處).
이 갑인예송에서는 송시열을 제거하고 서인정권의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김우명(金佑明)·김석주(金錫胄)가 남인과 연결, 남인의 기년설을 찬성하여 자의대비의 복제는 기년상으로 정해지고 정권은 남인에게 기울었다. 숙종이 즉위하여 남인에게 정권을 맡기자 서인들은 이를 반대하여 송시열 구명운동을 벌이는 가운데, 김석주가 남인세력에게 밀려 위태롭게 되자 다시 서인세력과 연결하여 허적(許積)·윤휴 등을 역모로 몰아 남인세력을 제거하는 1680년(숙종 6)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이 일어나면서 예송은 일단락되었다.
결국 두 차례의 예송은 성리학의 핵심문제였고, 율곡학파인 서인과 퇴계학파인 남인간의 정권주도권을 둘러싸고 일어난 이념논쟁이었다.
김수항이 영암에서 적거 생활을 한 것은 붕당정치의 결과로 타인의 힘에 의해서 물러난 것이다.
이후에도 치열한 정쟁(政爭)은 거듭되었고, 1689 년 ( 숙종 15 년 ) 왕자정호(王子定號)와 희빈 장씨의 택정(擇定) 문제로 서인이 몰락하고 남인이 재집권하는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남인의 극단적인 보복에 김수항도 사사(賜死)의 명이 내려졌고, 4 월 9 일 진도에서 사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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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배 길을 떠나며◀ --------------------------
세 조정에 붙이었으나 백가지로 무능했고
한 번의 위급한 말 뭇 사람의 미움을 샀구나
말 세우고 왕숙천 길 가에 우뚝 서서
하늬 바람 불 제 숭릉( 현종의 릉 ) 향해 눈물 흘리네.
三朝忝竊百無能。 삼조첨절백무능
一發危言衆所憎。 일발위언중소증
立馬王灘江上路。 입마왕탄강상로
西風吹淚入崇陵。 서풍취루입숭릉
▽ 乙卯七月。應旨進言。天怒大震。臺評隨發。初命付處原州。行到楊山。聞改命遠竄靈巖。轉 向南路。路上口占。< 文谷集卷之三에서 >
위와 같은 시 내력의 설명이 있다.
<<풀이 >> 숙종 1 년( 1675. 47 세 )7 월에 임금님의 명령으로 말씀을 드렸다가 하늘이 노여워하고 큰 벼락이 친 것이다. 사헌부의 탄핵 내용이 따라왔다. 처음의 명령은 원주로 부처되는 것이었는데 양산 ( 지금의 양주 )에 도달하여 들으니 고쳐진 명령은 멀리 영암으로 귀향을 보낸다는 내용이었다. 남쪽 길로 바꾸었다. 길에서 불러 받아 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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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곡 김수항에 대한 기록들◀
1.공이 가정의 학문을 받았는데 《소학(小學)》의 경신편(敬身篇)을 가장 중요시하였다. 노선생이 안동(安東)에 있으면서 구용장(九容章)과 사물장(四勿章)을 써서 부쳐 격려하였으니 그 기대한 바가 깊고도 멀다. 공은 어려서부터 온종일 걸터앉지 않고 꿇어앉았으며 어깨와 등이 똑바르고 조금도 몸을 기대거나 기울이지 않으면서 ‘외면에 조금이라도 틈이 있으면, 심지(心志)를 잃게 된다.’ 하였다. 문사(文辭)는 전아(典雅)하고, 화려함을 힘써 없애니 노선생이 일찍이 ‘쓸모 있는 글이다.’ 하고 인정하였다.
17세에 반궁(泮宮 성균관)에 나아가 시험을 보았는데 태학사(太學士 대제학(大提學)) 택당(澤堂 이식(李植)) 이공(李公)이 상등(上等)에 뽑아 놓고 말하기를,
“근세(近世)의 문체를 변형시킬 것이다.”하였다.
公受家庭學。最主於小學敬身一篇。老先生在安東。書寄九容四勿以勉之。其所期待深且遠矣。公自少終日危坐。未嘗箕踞。肩背竦直。不少跛倚。以爲外面有些罅隙。則心志從而走失。文辭典雅。務去靡麗。老先生嘗識之曰。有用之文也。十七。出試泮宮。大學士澤堂李公取置上游曰。可以變近世文體也。
<송자대전(宋子大全) 제182권 묘지명(墓誌銘) 문곡(文谷) 김공(金公) 묘지명 병서(幷序)에서 >>-----------한국고전 번역원 자료 인용 -------
2.김수항은 현상(賢相)의 손자로서 젊은 나이에 태사(台司)에 올랐고 풍의(風儀)가 단아하고 정중하였으며 지조와 품행이 조용한 가운데 함축성이 있었다. 문사(文辭)에 능하였는데 유술(儒術)로 수식하였다.
壽恒以賢相之孫, 黑頭登台司, 風儀端重, 操履蘊藉, 長於文辭, 緣飾儒術,
3.김수항은 스스로 강방(剛方)함을 자임(自任)했지만 국량(局量)이 작았기 때문에 괴퍅한 데 가까웠고, 스스로 견확(堅確)함을 허여(許與)했지만 사심(私心)이 성했기 때문에 전횡(專橫)에 가까웠다. 스스로 세도(世道)를 담당한다고 했지만 도리어 훈척(勳戚)들에게 부림을 당했고, 스스로 사문(斯文)을 호위한다고 일컬었지만 부억(扶抑)에 중도(中道)를 잃음을 면치 못하는 등 실제로 사무(事務)에 통달하는 능력이 모자랐다. 그리하여 재처(裁處)하는 모든 것이 매양 피상적이었으므로 8 년 동안 국정(國政)을 담당하고 있었으면서 일컬을 만한 선정(善政)이 없었다.
然壽恒自任以剛方, 而量小, 故近於愎, 自許人堅確, 而私勝, 故近於專, 自謂擔當世道, 而反爲勳戚所使, 自稱衛護斯文, 而未免扶抑失中, 實不能通曉事務。 凡所裁處, 每在皮膜, 八年當國, 未有善政可言。<< 숙보 20권, 15년(1689 기사 윤3월 28일(을축)>> ---------2 와 3 은 --------<조선왕조 실록 인용>
◉ <필자의 노트> ------------------------------------
지금 초여름의 시작인 5 월이 날개를 접고 있다.
그 사이 개인적인 아픔 때문에 블로그에 글을 담지 못했다.
산뜻한 5 월 조상님 머물다 가신 지금의 5 월 농촌의 전원엔 어린 벼 솟아오르고 대추 알 만한 매실이 포근이 익고 있다.
필자는 문곡의 12 대 후손의 한 사람으로 조상님 말씀하신 다음과 같은 자세를 늘 지키며 살고 있다.
<온종일 걸터앉지 않고 꿇어앉았으며 어깨와 등이 똑바르고 조금도 몸을 기대거나 기울이지 않으면서 ‘외면에 조금이라도 틈이 있으면, 심지(心志)를 잃게 된다.’ 하였다. >
<< 호걸이 되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 >> 라는 서책을 보내주신 한양대 정민 교수님의 글에는
<옛사람은 독서하는 종자가 끊어지게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너희가 능히 부지런하게 여러 자식을 가르쳐 마침내 충효와 문헌의 전통을 실추시키지 않는다면 문호를 지키는 것이 꼭 과거시험이나 벼슬길에만 달려 있지는 않을 것이다.>라는 문곡 님의 간곡하신 말씀이 내 가슴을 찌르고 있다.
내 가문의 이야기를 실어주신 정민 교수님의 감루스러운 고마움을 전하려고 책을 들고 와부읍 삼패리 돌누께 마을을 찾아 뒤로는 천마산의 정기를 받고 앞 쪽 유유히 흘러가는 미호강, 평구 쪽을 바라보며 문곡 조상님을 흠모하였다.
전라도 영암 땅 월출산 아래 대숲 우거진 마을에 비록 적거하시는 몸이었지만 가장 편안하고 슬픈 운명에도 여유로운 지취로 산뜻한 오월을 바라보고 계신 조상님을 생각하며 풀이를 해본 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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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곡의 이야기가 담긴 책--- 한양대 정민 교수 님의 "호걸이 되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 >
< 독서하는 종자가 끊이지 않게 하라--145쪽-151쪽 >
'신안동 가문 시 모음 > 문곡 김수항 시 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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