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안동 가문 시 모음/문곡 김수항 시 모음

名人들의 文과 藝-- 김수항 시. 문학바탕

백촌거사 2011. 1. 24.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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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의 변>--------------------------

필자의 12 대 조상님 문곡 어르신의 소중한 작품입니다. 이 작품을 제 블로그에 옮길 수 있도록 허락해주신 김 선원 선생님, 그리고 이 작품을 실어도 좋다는 문학바탕 대표님께 진실로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원본의 내용을 메일로 보내주신 점에도 기쁜 고마움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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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名人들의 文과 藝

                       

 

   김수항     金壽恒(1629-1689)

     문학바탕 2010.6.vol 71

글쓴이 김 선원 서예가 시조시인

 

 

배소配所에서 쓴 김수항金壽恒(1629-1689)의 시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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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수항金壽恒1629-1689

조선중기의 문신. 효종. 현종 때 여러 관직을 지내고 제 2 차 예송이 일어나 남인이 주장한 기년설이 채택되자 벼슬을 내놓았다. 그 후 숙종 때 영의정이 되었으나,1689 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재집권하게 되자 진도에 유배되었다가 사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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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공相公의 자字는 구지久之이고 호號는 문곡문옹文谷文翁, 문곡거사文谷居士, 문곡산인文谷山人, 풍패風佩, 동천도인洞天道人으로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청음선생靑陰先生(상헌常憲 1570-1652, 관官은 左相字는 숙도叔度 별호는 석실石室 山人. 백악산인白岳山人 시호는 문정文正 저著 청음집淸陰集)의 손자요 문수거사 (광찬자光燦字는 사회思晦 또는 죽헌竹軒)의 아들로 십칠 세에 반궁시泮弓試에 장원하였고, 그 다음 해에는 사마시司馬試에 장원하더니 이십 삼세 알성시謁聖試에 장원하였다.

이십 팔세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하여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고, 삼십 일세에는 가선대부가嘉善大夫가 되어 도승지都承旨를 거쳐 예조禮曹와 이조吏曹의 참판參判에 오르더니 삼십 사세에는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승진, 정이품관正二品官이 되었다.

1671년 신해辛亥에 종일품從一品인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이르더니 명년明年에 우의정右議政을 거쳐 좌의정左議政이 되었다. 전례前例에 드문 승진을 하였으나 환로宦路가 그리 평탄平坦치는 못하였다. 사은사謝恩使로 청나라에 다녀온 다음 인선왕후仁宣王后의 복상服喪문제로 벼슬을 내놓게 되었고, 숙종肅宗이 등극하자 좌상左相에 기용되었으나 정적들의 공격으로 원주原州에 부처되고 다시 영암靈巖에 부처되었지만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방환되어 영의정領議政이 되었다. 그러나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진도珍島에 유배되었다가 사사賜死되었으니 정치란 참으로 허탈하고 매정한 것이다.

과거장에 나갈 적 마다 장원을 놓치지 않았고 도학道學과 시詩와 문장文章이 장壯하고 전서篆書와 행초行草에 이르기 까지 발군拔群하였음은 물론 절의충신節義忠臣인 청음선생의 손자孫子를 이처럼 무참히 죽게 하였으니 우암선생尤庵先生(송시열宋時烈 1607-1689 자영보字英甫 벼슬은 좌상左相 시호는 문정文正)이 쓴 묘비명에도

사유악시死有惡時 면

역유영시亦有榮時 나

차공지시嗟公之時 엔

오불감지지吾不敢知之라 하였다.

상공相公의 아들이 모두 여섯인데 창집昌集(1648-1722 자는 여성 여성汝成 호는 몽와夢窩 벼슬은 영의정領議政 시호는 충헌忠獻) 창협昌協(1651-1708 자는 중화仲和 호는 농암農巖, 시호는 문간文簡) 창흡昌翕(1653-1722 자는 자익子益 호는 삼연三淵, 시호는 문강文康) 창업昌業(1658-1721 자는 대유大有, 호는 노가재老稼齋) 창즙昌緝(1662-1713 자는 경명 景明 호는 포음圃陰) 창립昌立(1666-1683, 자는 탁이卓而, 호는 택재澤齋)이다.

본고本稿에 공개하는 상공의 시는 1678년 철원鐵原의 배소配所에서 50세에 쓴 작품으로 은유한 시격이 놀라울 만큼 멋이 있고 그 필법 또한 추경하다.

우측상단과 좌측하단에 있는 도서圖書의 각법刻法을 보더라도 그 안목의 고명함이 어떠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空州芳草綠年年인데                                                                              

不見荷依舊謫仙이라                                                                                                    

 

金骨只今應化鶴이니                            

月明飛影下江天을

 

荒池白露爲誰秋오

地底蓮根寂寞留라

 

封植不忘嘉樹傳가

喜君能繼舊風流라

 

崇禎戊午中秋에 文谷居士는

書于朗州之坎亨窩하노라

 

텅 빈 모래톱에는 해마다

방초(芳草)만 푸르른데.

옷을 어깨에 멘 이태백(李太白)은

보이지 않네.

신선은 지금쯤

학으로 변화하여.

달 밝은 밤이면 날아서

그림자 강천(江天)에 내리니.

 

거친 연못에 이슬 내리니

누구를 위한 가을인가.

땅 밑의 연뿌리도

고요히 머물렀네.

 

땅을 주고 심으면서

좋은 나무로 이어지길 잊지 않았으리니.

예전 풍류 잘 지키실

그대를 기뻐하노라.

 

숭정 무오년(1678 숙종4년) 팔월에 문곡거사는 낭주의 감형와에서 쓰다.

 

 

 

 

 

이 詩를 읊조리면서 封植不忘嘉樹傳에 이르면 측은한 생각이 들면서도 大人의 기상을 느끼게 한다. 끝부분의 감형와(坎亨窩)가 참으로 멋이 있다. 감(坎)은 (((그림)) ☵) 감상(坎上) 감하(坎下)로 경(経)에 이르기를 습감(習坎)은 유부(有莩)하여 유심형(維心亨)이니 行하면 유상(有尙)이리라.

“습감(習坎)은 정성이 있어 마음 때문에 형통(형통)하니 가면 가상(嘉尙)함이 있으리라”는 뜻이고 전(傳)에 이르기를 유심형(維心亨)은 유기심성일(維其心誠一이라 고로 능형통(能亨通)이라 지성(至誠)은 가이통금석(可以通金石) 도수화(蹈水火)니 하험난지불가형야(何險難之不可亨也)리오 하였다.

마음이 형통하다 함은 오직 그 마음이 정성스럽고 전일(專一)하기 때문에 능히 능통(能通)할 수 있는 것이라 정성이 지극하면 금석(金石)도 통할 수 있고 물과 불이라도 밟을 수 있으니 어찌 험난하더라도 형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원망하거나 서운해 함이 없는 그 모습에서 대인군자(大人君子)의 기상을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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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원 서예가. 시조시인

1945.6.28

아호 매산槑山

현. 한국서예협회 초대작가. 심사위원

현. 한국서예협회 제 1회 초대작가상 수상

현. 정부소장 미술품관리 자문 (조달청)

전. 동양대학교 (풍기) 초빙교수

현. KBS 진품명품 감정위원 현 한국 미술 국제교류협회장 (서울시)

전. 호치민 옥중 시 서예 준비위원장

현. 갑자서회회장

현. 경기대학교 전통예술대학원 출강

대동 서예학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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