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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경 (羅儆)의
文谷과의 화답시
지은이: 나 경 (羅儆)
(1620-1682 )
高秋霜露菊花時 고추상로국화시 하늘 높고 서리 내리며 국화향기 그윽한 가을에
赤寫東歸獻一詩 적사동귀헌일시 돌아와 붉게 써서 시 한 수 드리네
斜日拜辭無限恨 과일배사무한한 석양에 헤어지며 주신 말씀 끝없는 한 뿐이라
此生承誨更難期 차생승회갱난기 이 세상 이어져 다시 가르쳐 주실 기회 어렵네.
--- 戊午(무오1678년 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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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 경 (羅儆)
자 ( 字 )는 순부 ( 順夫 ) 호(號) 녹암 ( 鹿巖 )
1620 년( 광해12 년 경신) 4 월 21 일--1682 년( 숙종 8 년 임술 ) 4 월 15 일
향년 63 세
1648 년 ( 인조 26 년 무자. 9 월 초 ) 진사 (進士)
묘 : 영암군 군서면 마산리 오금곡 곤향원(靈巖郡群西面馬山里蜈金谷坤向原)
부인 : 長澤 高氏 進士 溥咸 女(장택 고씨 진사 부함 녀) 基厚孫(기후 손)
承議郞 敬倫 曾孫 靈光 金汝龍 外孫 (승의랑 경륜 증손 영광 김여룡 외손)
3 월 19 일 졸. 烏川鄭龜<氵+龜>撰墓碣(오천정구찬묘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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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송도공파 기록에는誨(가르칠 회)를悔(뉘우칠 회) 로 표기했고,
녹암공파보 기록에는 斜日을 科日로 표기함.
녹암공과 문곡의 나이 차이는 9 년을 녹암공이 앞서신다. 문곡은 1646 년( 인조24 년 병술. 18 세 )에 진사시에 장원하였고, 녹암공은1648 년 ( 인조 26 년 무자. 9 월 초 ) 진사 (進士)시에 합격한 것으로 보아 만일 科日이 맞는 표기라면 영암에서 두 분이 만나기 이전에 이미 과거 시험을 보았을 때 녹암공은 문곡과의 만남을 통해서 학문하는 선비로서의 조언을 들었을지도 모른다.<科日拜辭無限恨> 이라면 < 과장에서 주신 말씀 끝없는 한이라 >라고 해석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 다른 풀이
高秋霜露菊花時 높은 가을 서리 이슬 국화꽃 시절되니
赤寫東歸獻一詩 돌아가며 붉게 써서 시 한 수 올리노라.
斜日拜辭無限恨 석양에 떠나옴이 무한한 한일러니
此生承誨更難期 이승서야 그 가르침 다시 기약 어려우리.
( 한양대 정민 교수 님 풀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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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고추高秋: 실제로도 가을에 영암을 떠나 철원으로 옮기셨다.
적사赤寫 : 존경심과 깊은 정의의 표시가 아닐까.
차생此生 : 다시 만나기 어려움 암시. 실제로 녹암공은 1682 년에 돌아가셨고. 문곡은 1689 년에 돌아가셨다.
분석
(1. 2 연 ) 지은이의 현재 상황 ( 계절감 제시. 화답시를 받침 )
( 3.4 연 ) 지난 시간의 그리움 ( 주신 정의 그리움. 다시 만나기 어려움의 안타까움 )
주제 : 회고적인 그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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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있는 한 편의 화답시는 文谷과 鹿巖公 羅儆 님과 오고간 시이며, 나씨 문중과도
깊은 인연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시이다.
문곡은 숙종이 즉위한 을묘 년 (1675 년) 집권파인 남인의 미움을 받고 전라남도 영암 땅으로 유배를 가셨다.
이 화답시는 문곡 조상님께서 영암에 적거하고 계시던 1678 년 무오년의 작이다.
문곡집에는 전혀 실려 있지 않은 유배시로 나주 나씨이신 鹿巖公 羅 儆 ( 나경
( 1620 선조 --1682 인조 ) 님과 화답한 시이다. 나주 나씨 족보에만 실려 있는
문곡님의 유작이라고도 할 수가 있다. 영암에 계실 때 그 곳의 많은 향촌 인사들과 교류를 하셨다는 기록이 있으며 이 시를 통해서 나주 나씨와도 교류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요, 소중한 내용이라고 생각이 된다.
먼저 문곡 조상님이 녹암공( 鹿巖公 ) 나 경 (羅儆)님에게 다음과 같은 시를 읊으셨다.
위의 시는 그 화답으로 문곡에게 보낸 시이다.
相看脉脉去留時 (상간맥맥거류시) 서로 보며 깊은 정 가슴에 품으며 머물고
千里離情一首詩 (천리이정일수시) 천리라 이별의 정은 한 수의 시뿐이로다.
從此鹿車山下路 (종차녹거산하로) 녹거 타고 산 내려오는 길로부터
洞中溪月夢中期 (동중계월몽중기) 마을 앞 시냇물과 달빛이 꿈속에 어른거리네.
<❀ 나주(羅州) 나 씨(羅氏) 송도공(松島公) 파보(派譜)와 鹿巖公 가보에 실림>
한자 脉 ( 훔쳐 볼 매. 서로 볼 매. 脈 과 같은 의미)
脉脉(맥맥 ) : 줄이 이어져 끊어지지 않는 모양. 서로 정을 품고 바라보는 모양.
맥맥의 정이란 그냥 단순히 말만 오고 가는 것이 아닌 깊은 정으로 맺어져 있음을 말하고 있다.
鹿車(녹거) : 작은 수레《법화경(法華經)》에 나온 말인데, 소승(小乘)은 양거(羊車)와 녹거(鹿車)이고, 대승권교(大乘權敎)는 우거(牛車)요, 일승(一乘)은 대백우거(大白牛車)라 하였다.
( 예시 ) 어찌하면 조그만 수레를 타고 가서 / 何當鹿車去(상촌의 시에서 )
분석
( 1.2 연 ) : 이별의 정서 제시 ( 서로 오고 간 정 -- 맥맥의 정 )
( 3.4 연 ) : 그리움의 정 ( 영암 적거지에서의 그리운 회포 )
주제 : 회고적인 그리움.-------------------------------
또 다른 풀이
相看脉脉去留時 떠날 때나 있을 때나 맥맥히 서로 보니
千里離情一首詩 천리라 이별 정이 한 수 시에 담겼구나.
從此鹿車山下路 이로조차 작은 수레 산 아래 길 가리니
洞中溪月夢中期 골짜기 시내 달을 꿈속에나 기약하리.
( 한양대 정민 교수 님 풀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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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과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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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곡 김수항 ( 1629-1689 )은 당시의 정치적인 상황으로 정적인 남인들의 미움을 받아 1675 년 ( 을묘. 47 세 ) 7 월에 전라남도 영암 ( 靈巖 )으로 유배의 길을 떠났고, 그 적거 ( 謫居 )지에서
거의 3 년을 넘는 세월을 보냈다. 처음에는 정신적인 불안정으로 유배지에서의 깊은 고독감과 우수감에 빠져 있는 갇혀 있는 듯한 답답한 부자유한 생활을 하다가 귀양지 영암 마을의
많은 향촌 사족들과 교류를 함으로써 차츰 마음의 안정을 찾았고, 월출산을 두 번이나 그 경치를 맛보게 되는 한가롭고 마음의 여유도 가지게 된 것이다.
이 시는 1678 년 영암 마을에서 적거지를 옮겨 강원도 철원으로 감형이 되어 영암을 떠나면서
어느 분보다도 더욱 각별한 정을 가졌던 나주 나씨 녹암공(鹿巖公) ( 나경羅儆 1620-1682 ) 어른에게 마음 속 깊은 존경과 영암 적거지의 산천 모습에 대한 그리움을 담아 이별할 때의 심정을 먼저 증정하신 시이다.
영암의 현지 향촌 사족들과 교유를 하시면서 많은 시문을 남기셨다. 비록 이 시는 문곡 집에는 실려 있지 않고 나씨 문중 송도공파( 松島公派 ) 문중 족보에만 실려 있지만. 영암 적거지에서 쓰신 어느 시보다도 더욱 깊은 이별의 정, 그리고 나 씨 가문과의 맺어진 오랜 인연의 정들이 담겨 있다.
좌의정까지 지낸 신분으로 한적한 영암 구림(鳩林) 마을의 선배이신 진사님을 만나 서로가 살아오신 삶의 발자취, 그리고 서로 가문 간에 맺어진 인연들의 정이 깊게 배여 있는 것만 같다.
더구나 문곡의 부인은 안정 나씨이기는 하나 모두가 같은 가문이라는 계통에서 오는 반가움.
그리고 두 가문의 선조님들이 인연이 되었던 지난 시절의 흔적들도 서로 주고 받았을 것이다.
문곡의 조부님이신 청음 김상헌이 나씨 문중의 나 덕헌(羅德憲)을 옹호해 주었다는 고마운 역사적인 사실들도 두 분 사이의 더욱 친밀한 정을 나누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좌의 정까지 지내신 신분적인 지위를 버리고 답답한 유배지에서 만난 진사라는 벼슬을 하셨던
녹암공과 허심탄회하게 마음을 주고 받음으로써 정신적인 위로를 받았을 것이다.
나주 나씨 족보에 의하면 녹암공인 나경이라는 분과 상여수창(相與酬唱)을 하셨다는 기록으로 보아 여러 편의 화답시가 있음직도 하지만 유일하게 이 한 편 만이 전해지고 있다. 진사 벼슬을 하신 분이었기에 서로 문리가 통하고 학문과 식견도 통했을 것이다. 영상과 진사와의 영암 유배지에서의 만남, 한 분은 중앙 정부의 영상을 만난 자리를 가졌다는 깊은 감격과 벅차 오르는 희열을 가졌을 것이며, 한 분은 시골 선비와의 문답을 통해 유배지에서 오는 답답한 마음을 위로 받는 계기도 되었을 것이다.
시에 나오는 맥맥 脉脉의 정은 문곡의 깊은 정의 표현이다. 영암 구림 마을 전체에서 오는 고마움, 반가움이기도 하지만 특히 녹암공이 베풀어 준 고마운 인정에 감루하는 존경심이 담긴 표현이기도 하다. 영원히 영암 마을을 잊지 않겠다는 서정적 자아의 심정의 표현이다. 꿈속에서도 마을의 정경을 담을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런 맥맥의 정의 흐름에서 오는 인연이었을까.
문곡의 후손들은 12 세 창(昶) ( 녹암공의 고조부 ) 묘표(墓表)를 원행 (元行) ( 문곡의 증손 )과 윤동 潤東 ( 문곡의 11 세손 )이 墓碣명을 찬하였다고 한다. 세월은 흘러가도 나씨 가문과 안동 가문의 연면한 정은 지속이 되고 있다. 1989 년에는 鳩林(구림)의 마을 사람들이 < 文谷 先生 靈巖謫居 遺跡之碑 > 가 세워져 있다고 한다.
화답시를 쓰신 녹암공의 9 세손과 문곡의 12 세손은 지금도 동서지간이 되어 정의 교류를 나누고 있다. 필자에게 오직 하나뿐인 동서와의 만남도 이미 조상님들이 그 인연의 정을 맺게 해 주었는지도 모르겠다 .족보에 기록된 시 한 편은 앞으로도 맥맥의 정으로 이어가는 소중한 가보로 남을 것이다. 일 천 여수가 넘는 문곡의 시에서 이 한편의 시가 입에 새길수록 더욱 깊은 정감이 넘쳐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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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 경(羅 儆)(1620-1682 )의 일화 ( 羅州羅氏 松島公派譜. 鹿巖公 家譜 기록 )
족보 기록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기록이 되어 있다.
공께서는 인조 丙子胡亂(1636-1637 년 ) 당시 17 세의 어린 나이에 자제 군관으로 부친되시는 參奉公 羅海崙( 1583-1659 )을 모시고 함께 전쟁에 참가하셨다. 그 당시
幕裨 <비장(裨將)조선(朝鮮) 시대(時代) 때 감사(監司)ㆍ유수(留守)ㆍ병사(兵使)ㆍ수사(水使) 등 지방(地方) 장관(長官)과 견외 사신(遣外使臣)을 수행(遂行)하던 관원 중의 하나 >
崔彦觀이 군례를 위반함에 칼을 빼어들어 왼쪽 어깨를 내려치시니 모든 사람들이 숙연하였다고 하며. 그만큼 불의에 항거하는 강한 의지가 있으신 분이었다. 그 당시
靈巖 義士 이던 高溥咸이 그 勇猛을 보고 사위를 삼아 鹿門洞에 移居하게 하였다고 한다.
공께서는 1648 년 ( 인조 26 년 무자. 9 월 초 29 세 ) 진사 (進士)試에 합격하셨으며,
남다른 효성심이 극진하셨다고 한다. 공의 모친께서 병환 중에 계실 때는侍湯 嘗糞( 시탕상분 )으로 至誠을 다 하셨다고 한다.
공의 羅州 羅氏 始祖는 諱 富( 高麗正議 大夫監門衛上將軍 )이시고,
공은 16 世 이시다.
공의 고조는 12세 翰林 벼슬을 하신 창(昶)이요, 증조는 漢城左尹을 하신 仕愔이시며,
조는 參議이신 德謙이시고, 부는 松島公派이신 海崙의 둘째 아드님으로 태어나셨다.
海崙께서는 6 명의 아들을 두셨으며, 鹿巖公은 둘째 아드님으로 태어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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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昶)--(1477-1524)-------12 세
자:언명 彦明. 호:지재(止齋). 司憲府 持平. 司諫院 獻納. 議政府 檢詳
3 남 4 녀를 두심.( 士恒. 士恂. 士愔 )
사음(士愔)--(1511-1586)-----13세
자:자청(子靖). 嘉善大夫 漢城左尹. 五衛都 摠府副摠管. 2 남 ( 德謙. 德讓 )
덕겸 (德謙)--(1545-1616)-----14세
자: 익지(益之) 通政大夫 工曹參議. 1 남 3 녀.
해륜(海崙)--(1583-1659 )--------15세
자: 응숙(應淑), 호: 송도(松島).
孝陵 參奉. 6 남을 두시다.
(沙湖公 僖. 鹿巖公 儆, 省齋公 僶. 梅軒公 僐, 蓮隱公 保, 松山公 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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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도공파의 가훈 >
< 녹암공의 진사 입교 교지. 순치는 인조 26 년 1648 년이다 >
'다른 가문 한시 모음 > 한시풀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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