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淸明 <청명>--------------------------------
< 청명 淸明 날
봄 비 내리고>
이 안눌(李安訥)
1571년(선조 4) -1637년(인조 15)
자 子敏 호 東岳, 東嶽, 東谷,
본관 德水 시호 文惠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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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불어 산골짝
날씨 으스스
삼월이나 아직도
봄 모를레라.
한밤중 청명 날에
봄비 내리고
시냇가엔 버들 빛
더욱 새롭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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峽中風日冷 협중풍일냉。
三月不知春 삼월부지춘。
一夜淸明雨 일야청명우。
溪頭柳色新 계두유색신。
<淸明. 東岳先生集卷之十 錦溪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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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錦溪錄은 1611년 9월 錦山 郡守에 제수되어 1613년 慶州 府尹으로 移授될 때까지의 작품이다. 경남 남해군 금산(錦山)이다.
<내용정리>-------------------
< 1-2행 >-- 썰렁한 바람 불어옴
처소적 배경. 山峽-- 서경
< 3-4 행>-- 청명날 봄비 내림
버들잎--- 마음의 밝음-- 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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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이해>--------------------------------
청명 절기는 글자 그대로 맑고 밝은 날씨다. 음력 3 월인데도 냉기 도는 바람이 산골짜기에 퍼져온다. 봄은 왔어도 아직은 봄답지 않다. 골짜기에 봄비가 부슬부슬 내린다. 청명 날에 내리는 봄비는 催花雨라고 한다.
봄꽃이 피어나도록 재촉하는 봄비이다. 시냇가에 늘어진 버들가지에서 비로소 생명적인 약동의 봄을 느낀다. 화자의 서정도 환하게 미소 짓고 있는 모습이다. 여유롭고 한가로움 속에서 청명 날을 맞고 있다. 서정 보다는 서경에 중심을 두었다. 그런 서경을 맞이하는 화자의 마음은 생명력이 한껏 넘쳤으리라. 중국 시성인 두보의 시적인 성격을 닮은 것 같은 느낌이다.
우울해지는 세상의 번잡스러움에 싱싱한 자연의 율동들이 조용히 퍼져오고 있다. 남쪽엔 매화꽃, 벚꽃이 한창이다. 도시 서울엔 이제 개나리 꽃 목련꽃이 피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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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 노트> ---------------------------
峽中협중 두메. 도회에서 멀리 떨어져 사람이 많이 살지 않는 변두리나 깊은 곳
산골짜기 峽은 골짜기 협이다.
⦁ 산골을 곧장 내려올 땐 꿈속인 듯하였는데 / 一下峽中如夢裏
⦁ 행장을 바삐 꾸려 두메 산골 들어서니 / 促裝策馬遊峽中
⦁ 오래오래 있고 싶은 빼어난 경치 / 峽中山水可淹留
⦁ 산골 마을 미처 못가서 / 未到峽中縣
⦁ 골짜기에 비 한바탕 쏟아지고 지나가니 / 峽中雲雨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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溪頭 계두: 시냇가. 계변 (溪邊)이라고도 한다.
⦁ 물가에 산책하노라면 한 중이 따를 걸세 / 散策溪頭一衲隨
⦁ 개울가 사립문은 한낮에도 닫혔구나 溪頭晝掩扉(계두주엄비)
⦁ 시내 머리에 번득이는 비단 잎들을 한번 보소 / 試看溪頭錦葉翻
⦁ 냇가 빨래터에 많은 여인들 / 洴澼溪頭多女伴
⦁ 큰 시내에 칼 씻고 말에게 물 먹이네 / 洗兵飮馬大溪頭
⦁ 시냇머리 두세 점 산봉우리 있어선가 / 爲有溪頭數點山
⦁ 일곡이라, 시냇가에 배를 매지 마라 / 一曲溪頭菓繁船
溪邊 계변
⦁ 석양에 시냇가를 따라 가누나 / 落日路繞溪邊
⦁ 바위 아래 시냇가 집에 / 石底溪邊宅
⦁ 시냇가를 따라가면 그대로 포구(浦口)까지 / 溪邊到浦邊
⦁ 푸른 나무 시냇가에 전각들이 그윽하고 / 綠樹溪邊各殿幽
⦁ 개울가 작은 정자 대나무로 엮었고녀 / 溪邊小築竹爲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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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溪邊 과 연결되는 3 편의 시--------------
1.人坐太古石。
水鳴今夕灘。
春風吹白鬢。
長日半邊閑。
溪邊 二樂亭集
신용개(申用漑) : 1463년(세조 9) - 1519년(중종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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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下馬碧溪邊。
坐茅以爲氈。
松聲鏗滿壑。
古瑟本無絃。
溪邊卽事 무릉잡고(武陵雜稿)
주세붕 (周世鵬) 1495년(연산군 1)- 1495년(연산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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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溪流鳴玉處。
夜雨泛花來。
芳草春風意。
薰然入酒杯
溪邊小酌 우계집(牛溪集)
성혼 (成渾) 1535년(중종 30)- 1598년(선조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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淸明-----------
24절기(節氣)의 하나, 춘분(春分)과 곡우(穀雨)의 사이로,
양력(陽曆) 4월 5ㆍ6 일쯤이다. 청명은 글자 그대로 < 날씨가 맑고 밝음 >
이 있는 절후이다. 청명절(淸明節) 이라고도 한다.
이 날은 한해 농사일이 시작되는 날이고, 나무를 심는 식목일이기도 하다.
어느 해에는 한식과 겹치기도 하였다.
이 청명과 한식날은 별 차이가 없어 옛말에
"청명에 죽으나 한식에 죽으나 매일반"이라는 말이 있다.
청명이 되면 비로소 농사일의 처음인 봄밭갈이를 한다. 겨울 속 농한기를 끝내고 비로소 농사철의 시작이 되는 날이다.
東國歲時記<홍석모(洪錫謨)>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取楡柳之火頒賜各司卽周官出火唐宋賜火之遺制也
農家始春耕>
<느릅나무 버드나무에서 불을 일으켜 각 관청에 나누어 준다 이는 곧 주관에서 불을 내고 당송에서 불을 나누어 주던 옛날부터 전해진 제도로다
농가에서는 이날부터 비로소 봄갈이가 시작된다.>
이날은 조상님들의 산소에 省墓(성묘)를 가기도 하는 날이다.
기록에 보면은 다음과 같이 윤휴<尹鑴>1617(광해군 9)~1680(숙종 6)가
청명날을 당해서 산소를 찾아간다고 휴가를 임금께 청하는 글이 보인다.
<<소분의 휴가를 청한 소[乞暇掃墳疏]에서
삼가 아뢰건대, 신은 늙고 병든 데다가 살림도 가난하여 사람의 도리를 갖추지 못했습니다. 부모의 산소가 강 건너 수십 리 되는 곳에 있으나 오랫동안 성묘를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천은(天恩)을 입어 관직의 명칭을 띠게 되었고 마침 이때가 청명(淸明) 절기이므로, 이에 신은 풍수(風樹)의 생각, 우로(雨露)의 감회를 견딜 수 없습니다. 바라건대 성상께서 신에게 며칠의 휴가를 주시어 은총을 지니고 가서 성묘하여 신의 출척(怵惕)의 정을 펼 수 있게 해주소서. 신은 은혜를 기원하는 마음에 황공함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 고전 번역원 자료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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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명날을 소재로 하여 쓴 시가 매우 많은데
그 중 청명 날의 모습이 잘 나타난 구절들을 일부 정리해 보았다.
1.길가의 행색을 보니 청명이 가까이 다가왔네 / 沿途行色逼淸明
다시 부모의 은혜를 되새기면서 성묘를 하고 제사를 올릴 청명, 즉 한식의 절기가 다가왔다는 말이다.
《예기(禮記)》 제의(祭義)에 “봄에 비와 이슬[雨露]이 내려 축축해진 땅을 군자가 밟노라면, 반드시 처창(悽愴)한 마음이 들면서 돌아가신 어버이를 만나뵙는 느낌을 일으키게 될 것이다.”라는 말이 나온다.
공연히 한산의 성묘를 가고플 뿐이로세 / 謾擬韓山拜掃回
2.청명(淸明)에 개화(改火)의 정사(政事)를 행한다
《주례(周禮)》 하관(夏官) 사관(司爟)에, “불에 관한 정사를 관장한다.[掌行火之政令]”는 대목이 나오는데, 그 주(註)에, “청명에 느릅나무와 버드나무로 불을 일으켜서 근신(近臣)과 척리(戚里) 등에게 상으로 나누어 주었으므로 청명화(淸明火)라고 일컫게 되었다.”라는 내용이 보인다.
3. 한식도 지나고 청명 절후 또 지나 / 寒食淸明看又過
청명 한식이 함께 있는 해도 있었다.
4. 청명이라 꽃의 계절 가까워 오고 / 花事淸明近
버드나무, 살구꽃, 배꽃,등이 보인다.
배꽃은 또 피어 청명절이 가까워지니 / 梨花又近淸明節
한 나무의 살구꽃은 피어 진정 아름다워라 / 一樹杏花開政姸
5.찬 음식 먹는 이날 연기 하나 안 보이네 / 煙光冷節微
봉긋한 새 무덤 청명 절기 다가오면 / 新阡暗想淸明近
저녁 비 내리는 황량한 언덕 한아가 우짖으리 / 暮雨寒鴉壠草荒
한아(寒鴉) : 반포(反哺)의 의리를 아는 까마귀로, 어미를 사모하는 효자를 비유한 말이다.
6.청명의 뒤라 푸른 봄날도 반쯤 지난 시절 / 靑春過半淸明後
청명과 한식은 1년의 봄이라 / 淸明寒食一年春
한식과 청명의 2월의 하늘 / 寒食淸明二月天
시절 물건이 골고루 눈에 들어 새로워라 / 節物斑斑入眼新
청명이 지난 뒤에 내리는 가랑비요 / 細雨淸明後
1년을 24절후(節候)로 나눌 때 매달 상순(上旬)에 드는 절후, 즉 입춘(立春)ㆍ경칩(驚蟄)ㆍ청명(淸明) 따위를 절기(節氣), 매달 중순(中旬) 이후에 드는 우수(雨水)ㆍ춘분(春分)ㆍ곡우(穀雨) 따위를 중기(中氣)라고 한다.
이십사절기 가운데 양력 매월 상순에 드는 것. 입춘, 경칩, 청명 따위이다.
7. 중국 두목(杜牧)의 시어를 암인(暗引)한 경우가 참 많았다.
행화촌(杏花村) : 술집을 가리킨다. 두목(杜牧)의 〈청명(淸明)〉 시에 “한번 물어보세 술집이 어디 있는지, 목동이 멀리 가리킨 곳 살구꽃 핀 마을.
〔借問酒家何處在 牧童遙指杏花村〕”이라는 표현이 나오는 데에서 유래하였다
행화풍 : 청명절(淸明節) 전후 살구꽃이 활짝 필 무렵에 부는 바람으로, 청명절 무렵에 부는 봄바람의 대명사이다.
강기슭의 어부 집 행화풍 불어오네 / 岸邊漁屋杏花風
8. 답청(踏靑)의 풍류가 있었다.
아무렴 취해서 서교를 두루 답청(踏靑)해 봐야지 / 要須醉踏西郊遍
늦은 봄에 봄옷 입고 관동과 어울리면 / 暮春成服携童冠
답청(踏靑) : 봄에 파랗게 난 풀을 밟고 거닌다는 뜻으로, 보통 청명절(淸明節)에 야외에 나가서 산책하며 노니는 것을 말한다
공자(孔子)가 제자들에게 각자의 소원을 묻는 말에 대하여, 증점(曾點)이 대답하기를 “늦은 봄에 봄옷이 이루어지거든, 관자(冠者) 대여섯 사람, 동자(童子) 예닐곱 사람과 함께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을 쐬고 시를 읊조리면서 돌아오겠습니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論語 先進》
9.淸明과 한식의 모습은 중국의 풍습에서 유래된 것 같다.
오늘은 청명(淸明)이다. 도중에 가끔 오랑캐의 추장(酋長)들이 무덤 곁에 모여 앉아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니, 이것이 이른바 ‘관묘(觀墓)’인데, 더러는 제사를 지내는 자도 있다고 한다. 또한 분묘 중에 조화(造花) 한 가지를 그 위에 꽂되 방등(方燈) 모양과 같이 한 것이 많기에 물었더니, 여기 풍속이 으레 청명날에는 반드시 조상의 묘소에 가토(加土)하며 따라서 꽃을 꽂고 돌아간다고 한다. 청명날에 조상 분묘 찾는 거라네 / 淸明時節上墳上
<계산기정 갑자년(1804, 순조 4) 2월 기록에서>
이날은 청명(淸明)이라, 길가 분묘(墳墓)의 묘마다 위에 조화를 꽂았으되, 그 모양이 모난 등[方燈] 같고, 혹 제사 지내는 곳이 있으니, 남녀 다 이르렀으되, 남자가 음식을 늘어놓고, 여자는 곁에 앉았을 따름이요, 지전(紙錢)이 곳곳이 나부끼더라. <서유문의 무오연행록 (1799, 정조 23) 3월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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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은이 소개---------------------------
이 안눌(李安訥) 1571년(선조 4) -1637년(인조 15)
자 子敏 호 東岳, 東嶽, 東谷, 본관 德水 시호 文惠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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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와 인조시대에 활동한 조선 중기의 문신이고 문인이다.
당시 시단에서는 石洲 권필(權韠)<1569-1612>과 쌍벽을 이룬 인재로 당나라의 이백과 두보에 견주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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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실록 인조 1년(1623 계해 3년) 3월 25일 기록에 다음처럼 기록하고 있다
.以李安訥爲禮曹參判。 安訥爲人淸疎, 好施與, 居家孝友, 而粗率量狹, 行事頗詭, 儕流以是輕之。 攻文甚力, 詩尤淸健沈鬱, 深得工部之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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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눌(李安訥)을 예조 참판으로 삼았다. 안눌은 사람됨이 청렴하고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며 가정에서 효우하였으나, 거칠고 도량이 좁으며 소행이 괴이하였으므로 동류들이 경시하였다. 그러나 문장에 힘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시가 더욱 청건(淸健)하고 침울하여 두보(杜甫)의 법을 깊이 터득하였다 <조선왕조 실록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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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19년 <1586년> 騷賦로 泮試에서 수석을 하다.1588년 18세에
進士 初試에 수석을 하였고, 곧 漢城試에도 합격하였으나 時輩의 시기를 받아 停擧당하다. 이에 擧業을 그만두고 古文詞에 진력하였다.
이때 동년배인 권필(權韠)과 선배인 윤근수(尹根壽)<1537∼1616>
이호민(李好閔)<1553∼1634> 등과 동악시단(東岳詩壇)이란 모임을 갖기도
하였다.
月汀 尹根壽<1537~1616>玄洲 조찬한(趙纘韓) <1572-1631> 과도 교유하였다.
咸鏡北道 兵馬評事 예조 정랑이 되었고,
그 후에 端川 郡守,東萊 府使,潭陽 府使,錦山 郡守,江華 府使를 역임하였고,
호조 참의,동부 승지가 되었다.
書狀官으로 명 나라에 다녀오기도 했고,遠接使 從事官이 되어 義州에 가서, 명 나라 황태자의 책봉 조서를 가지고 나온 顧天埈과 崔廷健을 맞이하기도 하였다.
두 분의 어머님 상을 당했을 때는 각각 3 년 동안을 楊州와 沔川에서
여묘살이를 한 극진한 효성이 있었다 .仁祖反正 후에는
예조 참판, 형조 참판을 거쳐 호조 참판이 되었고, 승문원과 사역원의 제조를 겸하다. 李适의 난에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하옥되었다가 특명으로 함경도 鏡城府로 流配되기도 하였다. 그 후에 비국의 천거로 함경도 순찰사가 되고. 예조 판서가 되었다.
인조 13 년에<1635 65세> 파직되어 돌아와서는 벼슬에 뜻을 버리다.
1636 년 淸白吏로 뽑혀 崇政으로 加資되었고, ‘文惠’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좌찬성에 증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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