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한담/수상

정민 교수님의 새 책 < 강진 백운동 별서 정원 >출간 < 글항아리 출판사> 정민 교수님의 서언

백촌거사 2015. 3. 21. 12:07

         정 민 교수 님의 새 책

                       <강진 백운동 별서 정원> 출간

강진에는 유서 깊은 정원이 숨어 있다. 동백림과 비자나무 숲을 이룬 소로를 따라 `백운동白雲洞`이라 새겨진 바위를 지나면 담장을 끼고 흘러내려오는, 작은 폭포를 이루는 계류를 만난다. 계류를 지나 걷다보면 대문에 다다르기 전 옆으로 길게 뻗은 절벽이 시야를 우뚝 막아선다. 이른바 `창하벽`이라 불리는 바위에 눈길을 주고 걸음을 옮기면 백운동 별서가 나타난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시간의 흐름을 붙잡아둔 듯, 조선시대 전통 원림의 원형이 세월의 흐름에도 녹슬지 않고 그대로 간직돼 제 속살을 드러낸다. 담양의 소쇄원과 명옥헌, 강진의 다산초당 및 해남의 일지암과 견줄 만한 이곳은 조선 문사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아 조선시대 시문학의 작은 축을 형성했다 할 만큼 숱한 작품들의 산실 공간이다.

 

특히 아홉 구비로 마당을 안아 흐르는 유상구곡은 민간 정원에서는 유일하게 이곳에만 남아 있으며, 그 규모도 가히 볼만하다. 하지만 이중의 차폐막으로 둘러싸여 있는 백운동 별서는 강진 사람들조차 드물게 아는, 그리고 그 외 지역 사람들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비밀의 정원`이다.

 

이 책은 백운동 별서 정원의 문화적 잠재 가치를 확인하고 역대 각종 문헌 자료와 시문을 통해 이 권역의 역사와 문화를 일반에 널리 알리고자 집필되었다. 백운동의 지나온 역사를 모두 담고자 했으며, 다섯 가지 핵심 주제를 중심으로 총 6장으로 구성했다.

 

<연합뉴스>

"강진 백운동 별서정원의 모든 것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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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 교수, 보존운동 `투쟁`의 산물 단행본으로 내놔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가경(嘉慶) 임신년(1812) 가을, 내가 다산(茶山)에서 백운동(白雲洞)으로 놀러 갔다가 하룻밤을 자고 돌아왔다. 남은 미련이 오래 지나도 가시지 않기에 승려 의순(意洵)에게 백운도(白雲圖)를 그리게 하고 이를 이어 12승사(勝事)의 시를 지어서 주었다. 끝에 다산도(茶山圖)를 붙여 우열을 보인다. 9월22일."

 

글이 작성된 연대, 그리고 다산이며 백운동이니 하는 지명 등으로 보아 다산 정약용(1762~1836)이 강진 유배 중에 지었을 것임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이에서 등장하는 승려 의순은 우리에게는 초의(艸衣.1786~1866)라는 이름으로 익숙한 사람이다. 보통 의순(意恂)이라 쓰지만, 다산이 시를 쓰고 초의가 그림을 그린 백운첩(白雲帖)에는 순(洵)이라고 표기했다.

 

다산 연구에 매진 중인 한문학도 정민 한양대 국문학과 교수가 이번에는 강진 백운동의 역사와 문화를 정리한 단행본 `강진 백운동 별서(別墅)정원`(글항아리)을 최근 냈다. 별서란 간단히 말해 별장이다.

 

그가 여타 관련 자료를 통해 밝혀낸 바에 따르면 이 백운첩은 다산이 그 발문을 작성한 때가 1812년 9월22일이지만 실제로 백운동에 들러 하룻밤을 유숙하기는 그보다 열흘 전인 9월12일이다. 이 백운첩은 아마도 당시 백운동 주인인 이덕휘의 요청에 따른 것으로 본다.

 

`12승사(勝事)`란 요컨대 지금의 전남 강진군 성전면 월하리 546번지 안운마을, 월출산 옥판봉 남쪽 기슭 계곡인 백운동 동쪽 산자락에 위치하는 백운동과 주변 일대 12개 명승지를 말한다. 정 교수에 의하면 조선후기 별서 문화를 대표하며 과거의 풍모를 잘 간직한 백운동의 역사에서 다산이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

 

그렇다면 다산이 꼽은 백운동의 12개 명승은 어딜까? 세 가지만 보면 첫째가 옥판상기(玉版爽氣)라 해서 옥판봉의 상쾌한 기운이며, 두 번째가 백운 별서로 접어드는 양편 동백나무 군락이 드리우는 그늘을 지칭하는 유차성음(油茶成陰), 세번째가 집 둘레에 심은 백 그루 매화나무가 품어내는 향기인 백매암향(百梅暗香)이다.

 

이번 책을 정 교수는 "백운동의 온갖 역사가 모두 담겨 있다. 손때 묻혀 가꿔온 역대 주인들의 이야기, 이곳을 거쳐 간 명류들의 100편을 훨씬 넘는 시문도 모두 실었다"면서 "이 책으로 백운동의 지나온 역사를 다 담았다고 자부한다"고 서언에서 말한다.

 

어쩌면 오만하게도 들릴 수 있는 자부심이다. 하지만 이런 말투에서 어딘지 투사 냄새가 난다. 케케묵은 고서에서 문화사의 이면들을 하나씩 발굴하던 고문서 고고학도 정민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책은 정 교수에게는 투쟁의 산물이다. 백운동을 관광지화하려는 행정 당국에 맞서 조선시대 별서의 풍모를 지키고자 한 노력의 성과가 바로 이번 책이다.

 

백운동을 "13대째 대를 이어 지켜온 유서 깊은 별서"라고 하는 그는 "없던 것도 새로 만드는 판에 있던 것을 못 지킨 데서야 말이 되겠는가"라고 반문한다.

 

우리가 아는 걸출한 이야기꾼 정민이 투사로 돌아왔다.

책 곳곳을 장식한 사진은 작가 김춘호 작품이다.

368쪽, 1만9천원.

 

 

<조선일보>

다산 정약용의 친필 편지를 보기 위해 월출산 자락을 물어물어 찾아갔다." 2006년 8월이 되기 전까지, 저자(한양대 국문과 교수)는 전남 강진에 그런 곳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누구신지…?" 반갑지 않게 그를 맞는 집 주인의 탁자에 펼쳐진 책 한 권이 눈에 띄었다. "저 책 저자입니다." 주인은 자료를 마음껏 보게 해 줬고, 다산의 저서 `동다기`의 존재가 밝혀지게 됐다.

 

그곳은 사람들에게 좀처럼 알려지지 않은 `비밀의 정원` 백운동이었다. "아홉 굽이로 마당을 안아 흐르는 유상구곡(流觴九曲)은 민간 정원에서는 이곳에만 남아 있다." 강진군 성전면 월하리 546번지, 조선시대 전통 원림의 원형이 간직된 곳이며 숱한 문사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곳이다. 백운동의 무분별한 관광 개발을 막기 위해 쓴 이 책은 풍부한 문헌과 자료를 바탕으로 조경학적 관점에서 이 정원의 시공간을 되살려낸다.

 

<한국일보>

전남 강진에는 유서 깊은 정원이 숨어 있다. 근 400년 전 이담로(1627~?)라는 선비가 월출산 남쪽 기슭의 백운동 계곡에 만든 별서 정원이다. 별서는 은거를 목적으로 살림집에서 조끔 떨어져 경치 좋은 곳에 지은 거처를 가리킨다.

 

한국 전통정원 하면 흔히 담양 소쇄원을 떠올리지만 그에 못지 않게 아름답다. 동백나무와 비자나무 숲 속 오솔길을 따라 깊숙이 들어간 곳에 터를 잡았는데, 시냇물을 끌어들여 아홉 구비 물길을 내고 정자를 짓고 대나무, 소나무, 매화, 모란 등 나무와 꽃을 심어 가꿨다. 특히 마당을 안아 흐르는 유상구곡은 민간 정원으로는 이 곳에만 남아 있다.

 

조선시대 차문화를 연구하면서 강진을 자주 오간 한문학자 정민 한양대 교수가 백운동 별서 정원의 모든 것을 정리했다. 공간 구성과 풍치, 유래와 역사, 이곳을 지켜온 역대 주인들, 백운동을 다녀간 문인들의 글과 자취, 차문화 산실로서 백운동의 위상을 차례 차례 소개한다. 조선시대 문집과 역사 자료 등 각종 문헌에서 관련 기록을 수집해 인문서 겸 자료집으로 책을 썼다. 백운동 12경을 노래한 다산의 연작시 등 100편이 훨씬 넘는 시문을 모두 싣고 주요 전적 자료와 문물을 빠짐없이 소개했다. 옛그림과 컬러사진도 많이 넣어서 보는 맛을 더했다.

 

잡초가 무성한 채 황량하던 백운동 별서 정원은 2008년부터 강진군이 복원 정비에 나서면서 제모습을 되찾아가고 있다. 별서 정원의 여러 공간을 유구와 옛기록에 근거해 복원했다. 한국전쟁 이후 다시 지어 살림집으로 쓰던 낡은 본채를 헐고 중건하는 일과 화단 조성, 주변 공간의 정리와 진입로 정비만 남았다.

 

<동아일보>

호남에 전통 원림(園林·정원)이 소쇄원, 다산 초당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전남 강진군 성전면 월하리 월출산 옥판봉 남쪽 자락에 백운동(白雲洞) 별서(別墅·별장)가 있다.

 

강진의 양반 원주 이씨 이담로(1627~?)가 말년에 둘째 손자 이언길(1684~1767)을 데리고 들어와 이곳에 살기 시작했다. 조손이 20년 동안 함께 정원을 가꿨다. 이담로는 세상을 뜨며 ‘평천(平泉)의 경계’를 남긴다. 이는 당나라 때 재상 이덕유가 그의 별서인 평천장을 두고 자손에게 “절대로 남에게 넘겨서는 안 된다”고 당부해 나온 말이다. 백운동 별서는 세기가 4번 바뀌는 동안 아들에서 손자로 12대째 이어졌다.

 

이곳은 이담로 당대부터 명원(名園)으로 손꼽혔다. 5대 동주(峒主) 이시헌은 강진에 귀양와 있던 다산 정약용의 막내 제자가 됐다. 정약용은 이곳을 방문한 뒤 ‘백운동 12경’을 명명하고 1경 옥판상기(玉版爽氣·옥판봉의 상쾌한 기운)부터 12경 운당천운(篔簹穿雲·운당원에 우뚝 솟은 왕대나무)까지 그 아름다움을 시로 읊었다. 다산은 자신을 스승처럼 섬긴 초의선사에게는 백운동 뿐 아니라 다산초당까지 그리게 한 뒤 합쳐 백운첩(白雲帖)을 남겼다. 백운동과 다산초당 중 어느 곳이 더 아름다운지 겨뤄보려 한 것.

 

별서 마당에는 유상곡수(流觴曲水·술잔을 띄울 수 있도록 만든 구부러진 물길)가 굽이친다. 민간 정원에 유상곡수가 남아있는 곳은 이곳 뿐이다.

 

 

“젊어서 과거시험을 포기하고 성리(性理)의 글만을 궁구했다. 가난한 생활을 편히 여겨 지팡이 짚고 소요했다. 갑 속에 거문고 하나, 서가에 만 권의 책을 쌓아두었다. 흥이 나면 왕희지의 난정첩(蘭亭帖)을 펴 놓고 물 흐르듯 붓을 휘둘렀다.”

 

친족이 이시헌의 백운동 생활을 회고한 글이다. 동백나무 그늘 아래서 지난겨울의 매화향을 맡는 선비의 마음이 전해진다. 저자 정민 한양대 교수는 “백운동은 조선 별서 정원의 원형이 그대로 남아있는 유서 깊은 공간”이라며 “정약용의 제다법(製茶法)에 따라 떡차가 만들어진 차 문화의 현장이기도 하다”라고 말한다.

 

<매일경제>

별서정원(別墅庭園)은 옛 선비들이 창작을 했던 시적 공간이다. 별서란 선비가 속세를 떠나 은거생활을 하기 위해 마련한 공간. 살림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지었다. 상주하는 주택이 아니어서 간소하다. 호남에는 소쇄원이 유명하고 다산 정약용이 18년간 귀양살이를 했던 전남 강진에는 그 유명한 다산초당이 있다. 다산초당에서 정약용은 `목민심서`와 `경세유표`를 저술했다. 강진에는 또 다른 별서가 있는데 월출산 옥판봉 남쪽 자락에 있는 백운동 별서다. 이 별서 역시 다산과 관련이 있다.

 

백운동 별서는 강진의 양반 원주 이씨 이담로(1627~?)가 중년에 조성해 말년에 둘째 손자 이언길을 데리고 들어와 살기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 12대에 걸쳐 이어져왔다. 백운동 5대 주인 이시헌이 엮어 정리한 `백운세수첩`에는 저명한 문사들이 초기 백운동의 모습을 읊은 연작시가 실려 있다. 다산은 백운동을 직접 방문해 백운동 12경시 연작을 짓기도 했다. 제5경은 집 옆 시냇물을 끌어 마당을 굽이굽이 돌아 나가는 `곡수유상`의 유상곡수. 유상이란 물길 위로 술잔을 띄운다는 말이며, 곡수는 물길을 꺾어 굽이굽이 돌아가게 만든 장치를 가리킨다. 다산은 상류에서부터 흘러서 내리는 술잔을 받아 마시며 "담장 뚫고 여섯 굽이 흐르는 물이 고개 돌려 담장 밖을 다시 나간다. 어쩌다 온 두세 분 손님이 있어 편히 앉아 술잔을 함께 띄우네"라고 시를 읊었다.

 

또한 제자 초의에게 `백운동도`와 `다산도`를 그리게 한 뒤 자신의 친필 시를 함께 실어 `백운첩`을 남겼다. 백운동과 다산초당 중 어느 곳이 더 아름다운지 겨뤄 보려 한 것이다. 그 뒤 다산과 제자 황상, 이시헌이 스승의 시에 화운하여 12경, 14경의 연작시를 짓기도 하는 등 백운동과 관련한 풍부한 역사 문헌이 꽤 남아 있다. 저자 정민 한양대 교수는 "백운동은 조선 별서정원의 원형이 그대로 남아 있는 유서 깊은 공간"이라며 "정약용의 제다법(製茶法)에 따라 떡차가 만들어진 차 문화의 현장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저자가 백운동을 처음 찾은 것은 다산의 친필 편지를 보려고 방문했던 2006년 8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만 해도 정원에는 잡초가 우거져 황폐하고 황량했다. 그 사이 강진군에서 복원 노력을 기울여 지금은 살림집으로 사용해온 본채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옛 모습을 회복했다.

                     윗글은< 각시붓꽃> 님의   소개  글로 아래에서 인용해옴

                    정 민 교수 님의 홈페이지 http://jungmin.hanyang.ac.kr/ 에서

 

 서언


백운동을 처음 찾은 것은 2006년 8월이었다. 그전까지 강진에 그런 곳이 있는 줄도 몰랐다. 다산 친필 편지를 보려고 월출산 자락으로 물어물어 찾아갔다. 처음 주인의 태도는 전혀 우호적이 아니었다. 그러다가 마침 그가 책상에 놓아두고 읽던 내 책 때문에 마음을 열고는 귀한 자료를 마음껏 볼 수 있게 해주었다. 이때 세상을 놀라게 한 『동다기』가 처음 빛을 보았다.

이 귀한 인연으로 강진 걸음을 할 때마다 백운동에 자주 들렀다. 12대째 백운동을 지켜온

 이효천 옹은 갈 때마다 걸어둔 곶감을 떼주거나 직접 덖은 구증구포의 덖음차를 짐에 넣어주곤 했다. 그 마음이 고마워서 “제가 꼭 백운동에 대해 자세한 소개 글을 한번 쓸게요.” 무심코 이렇게 말했고, 말이 씨가 되어 이 책을 썼다. 그 사이에 노인은 세상을 떴다. 이제 가면 빈 집 마루에 앉아 혼잣말로 몇 마디씩 대화를 나누다 오곤 한다.

2014년 봄 강진군에서 백운동 별서정원의 복원 사업과 관광 개발을 위한 자문회의를 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짚이는 것이 있어 혹시나 싶어 내려갔다. 우려했던 대로 인근에 야영장까지 만드는 난개발 수준의 관광지 개발 계획이 잡혀 있었다. 백운동의 역사와 가치를 제대로 아는 이가 없어 나온 생각이었다. 노인과의 해묵은 약속을 실행에 옮길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어떻게든 개발 계획을 막아보려고 강진군에 백운동 관련 역사 기록의 정리를 자청하고 나섰다.

백운동의 풍광을 다산이 쓰고 초의가 그린 『백운첩』을 비롯해 관련 기록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문집 총간을 검색하고 『백운세수첩』과 『견한록』 등 입산조인 이담로의 친필 자료와 역대 명류들의 제영시를 수집 정리했다. 생각지 못한 자료가 끝없이 쏟아져 나왔다. 하나의 별서 공간에 백운동만큼 많은 시문이 존재하는 예는 따로 보지 못했다. 담양 소쇄원의 기록이 많다고 해도 작가의 면면과 작품의 양은 백운동 쪽이 훨씬 다채롭고 풍부하다. 게다가 대부분 친필로 남아있다.

처음 이곳을 찾았을 당시만 해도 정원에는 잡초가 우거져 황폐하고 황량했다. 그 사이에 강진군에서 복원 노력을 기울여 지금은 살림집으로 사용해온 본채를 제외하곤 대부분 옛 모습을 회복했다. 이곳은 강진의 숨은 보석일뿐 아니라 호남 원림의 원형을 온전히 보존한 소중한 문화 유산이다. 아홉 구비로 마당을 안아 흐르는 유상구곡은 민간 정원에서는 유일하게 이곳에만 남아 있다. 그 규모도 가히 볼만하다.

들어가는 초입의 하늘을 가린 동백나무 숲길과 원경으로 잡히는 월출산 옥판봉의 웅자. 강진 다원의 눈을 시원하게 해주는 차밭과 1만평이 넘는 대지에 펼쳐진 울창한 대숲, 오밀조밀 옹기종기 구색을 갖춘 정자와 화계의 짜임새 있는 배치. 기품 있는 매화와 소나무, 아름드리 비자나무 그늘, 그리고 정선대 아래 쪽의 차밭과 정자. 물길만 회복하면 사시사철 옥색 물이 폭포를 이뤄 흐를 계곡과 이 물을 끌어와 마당을 한 바퀴 돌아 나가도록 설계된 아홉 구비 유상곡수 등 백운동의 매력은 참으로 끝이 없다.

더욱이 이곳은 13대째 대를 이어 지켜온 유서 깊은 별서다. 없던 것도 새로 만드는 판에 있던 것을 못 지킨 데서야 말이 되겠는가? 이 책에는 백운동의 온갖 역사가 모두 담겨있다. 손때 묻혀 가꿔온 역대 주인들의 이야기, 이곳을 거쳐간 명류들의 1백편이 훨씬 넘는 시문도 모두 실었다. 이 책으로 백운동의 지나온 역사를 다 담았다고 자부한다. 미래의 백운동을 가꾸는 것은 이제 우리가 지킴이로 나서야 한다. 기쁘게도 출간 직전 강진군에서 큰 예산을 들여 이곳을 원형 그대로 복원해 호남 원림의 상징 공간으로 조성해 나가겠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강진원 강진 군수의 용단에 깊은 경의를 표한다. 지하의 노인께도 내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집필에 많은 분의 도움을 입었다. 우선 강진군에서 백운동 별서 정원의 기록 정리를 위한 용역을 내게 맡겨 정리의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문화관광과의 이재연 선생이 중간에서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실제 작업에는 작고한 이효천 옹과 13대 주인인 아들 이승현 선생의 전폭적인 지지와 성원이 든든한 뒷심이 되어 주었다. 후손인 이효우 이철주 선생은 본인이 소장한 다산과 이시헌 친필을 비롯해 『백운세수첩』 등 각종 실물 자료를 기꺼이 제공해주었다. 작업의 막바지에 이담로 친필 『견한록』의 존재를 알려주고 자료를 제공해준 박철상 선생의 도움도 컸다. 강진의 신영호 선생께도 자료 수집에 도움을 받았다. 사진작가 김춘호 씨와 작업을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을 특별히 기쁘게 생각한다. 그는 틈만 나면 강진까지 혼자 내려가 그 풍경 속에 오래 잠겨 있다 오곤 했다. 그의 솜씨로 네 계절을 고루 담지 못한 것은 조금 아쉽다. 뒤에 보완할 기회를 갖겠다.

다산에 붙들린 이래로 강진과 관련된 공부가 꼬리를 물고 있다. 실낱같은 인연이 새로운 인연으로 이어지는 과정은 늘 경이롭다 못해 신비하기까지 하다. 다산과의 만남이 아니었다면 내가 백운동을 알 까닭이 없었을 테고, 노인과의 인연이 없었다면 이 책을 쓸 일도 없었을 것이다. 우리 산하 곳곳에 아직도 이런 보석이 원석 상태로 남아있다는 것은 참으로 신나고 한편 부끄러운 일이다. 새봄에는 책을 노인의 산소 앞에 놓고 평생 그가 즐겼던 소주 한잔을 올려야겠다. 글항아리의 이은혜 선생이 책을 만드는 내내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유재형 군이 원문을 입력하느라 고생을 했다. 다 고마운 인연이다.


                                                                                   2015년 매화 시절
                                                                                  행당동산에서 정민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