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응인 ( 權應仁 )
자 : 사원( 士元 ). 아호 : 송계 ( 松溪 ) 벼슬 : 한리학관 ( 漢吏學官 )
문집 : 송계만록 ( 松溪漫錄 ). 생몰연대는 미상.(16c초에서 임진왜란까지로 추정됨 )
퇴계 이황의 제자였다고 함. 시문이 매우 뛰어나 그 시대에는 필적할 사람이 드물 정도였다고 하나 다만 서얼 ( 庶孼 ) 출신이었기에 변변한 벼슬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1. 촉석루 (矗石樓 )
漏雲微月照平波 구름 속 희미한 달이 물결을 비추어 주고
宿鷺低飛下岸沙 잠자던 해오라기 나직이 날며 물가 모래 밭에 앉는다.
江閣捲簾人依柱 물가 정자에 발 거두고 누각에 기대어 앉아 있으니
渡頭鳴櫓夜聞多 나룻가 노 젓는 소리 밤이라 더욱 크게 들리네.
2. 유 연경화정 절강 서생 ( 遊燕京和浙江書生 )
연경에서 절강 서생에게
霜風吹樹隕疏黃 서릿바람 나무에 불어 단풍잎 떨어지네
蕭瑟聲寒苦憶鄕 쓸쓸하고 찬 소리에 고향 생각 괴롭구나.
同作旅遊吾最遠 다 같은 나그네이지만 내가 가장 먼 곳이니
海天低襯亂山蒼 바다 하늘 나직하고 흩어진 산만이 푸르러라.
임임년(1542, 중종 37)에 중씨(仲氏) 참판공(參判公)을 따라 연경(燕京)에 갔다가 예부(禮部)를 관광(觀光)할 때, 절강(浙江)의 서생(書生) 대여섯 명과 어울려 화답하여 지은 시라고 한다.
天朝禮部風萍集 중국 조정 예부에 부평같처럼 모였으니
千里觀光各異鄕 천리의 관광객들은 제각기 다른 고향
最苦明朝又分手 가장 괴로운 건 내일 아침 또 이별하면
碧天秋樹正蒼蒼 푸른 하늘 가을 숲이 더욱 더 푸르리라.
중국의 서생들이 몰려와 칭찬을 아끼지 않으며 선생이라고 부르며 감탄하였다. 중국 서생들은 재주를 칭찬하는 것이지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 문집 송계 문집의 일화 )
또 하나의 일화가 전해온다.
퇴계선생(退溪先生)의 만사(挽詞)를 지었으나, 퇴계의 제자들이 서자라고 천대를 하고 그 만사를 쓰지 않음으로 그 만사를 깃대에 꽂아 두고는 3 일 동안을 혼자 울면서 밤을 보냈다고도 하였다. 깃대에 꽂아둔 만사에서 빛을 내는 것을 보고는 다시 허용했다고 한다.
寒竹堂涉筆[上]
權松溪
權松溪應仁。居星州。退溪先生弟子也。退溪沒。應仁作挽詞。群弟子以應仁庶孽也。故斥而不用。應仁以竿揭其詞。揷于門外。露哭三晝夜。夜必竿上放瑞光。群弟子異之。試許用其詞。應仁壯大魁梧。異於凡人。能文章。七入燕京。三使馬島。甞言于退溪曰。先生少止澹薄風月。濃黑草書則先生之道德益高。風月者。東俗所謂詩也。庇安金進士得厚云。
송계(松溪) 권응인(權應仁)은 성주(星州)에 살았는데 퇴계(退溪) 선생의 제자이다.
퇴계가 죽으매 응인이 만사(挽詞)를 지었는데 여러 제자들이 응인을 서얼(庶孼)이라 하여 고의로 배척하고 쓰지 않았다. 그러자 응인이 그 만사를 장대에 걸어 문 밖에 꽂아 놓고 길에 나앉아 3주야(晝夜) 동안을 곡했다. 그런데 밤이면 반드시 장대 위에서 서광(瑞光)이 내쏘였으므로 제자들이 그것을 기이하게 여겨 시험삼아 그 만사를 쓰도록 허락하였다.
응인(應仁)은 장대하고 괴위(魁偉)하여 범인(凡人)과 달랐으며 문장에 능하였다. 그래서 일곱 차례나 북경에 들어갔으며 세 차례나 대마도(對馬島)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그가 일찍이 퇴계에게,
“선생님은 조금 담박(澹薄)한 풍월(風月)과 농흑(濃黑)한 초서(草書)에도 유의하시면 도덕(道德)이 더욱 높아질 것입니다.”
하였는데, 풍월(風月)이란 우리나라 풍속에서 시(詩)를 이르는 말이다. 이것은 비안(庇安) 사람 진사(進士) 김득후(金得厚)가 한 말이다.
어느 불로그에 실린 질문에 해답을 하면서 잘 알려지지 않은 권응인의 한시를 소개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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