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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주 조찬한의 남농 팔영(南農 八詠 )

백촌거사 2007. 4. 20.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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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의 한 마디 >

엄청난 물질문명으로 지금 농촌은 급격히 변하였다.

물씬 풍겨나는 옛 농촌의 정취를 찾을 길이 없다.

밭을 가는 것을 로타리를 친다고 한다. 옛 조상님들의

농사짓던 모습을 그리며 옛 농촌 풍경이 묻어 있는 시를 감상하며

 

그리움에 잠겨 보고 싶다.

 

여기 현주 조 찬한 님의 시에 농촌 정경이 그대로 비쳐져 있음을 본다.

 

 

 

 

 

南農 八詠 丙辰 (1616. 광해군 8 년 44세)

조 찬한(趙 纘韓 )

생년 1572년(선조 5)

몰년 1631년(인조 9)

자: 선술(善述)

호: 현주(玄洲)

본관: 한양(漢陽)

광해군 6 1614 갑인 42 榮川 郡守가 되다. 榮州錄을 짓다.

광해군 9 1617 정사 45 白馬賊 탈옥사건으로 榮川 郡守에서 파직되다. 三道討捕使가 되어 도적을 잡은 공으로 通政에 오르다.

 

1. 初春

氷雪乍解嚴。 눈얼음 잠시 녹으며 혹독함 풀어지고

條風黏土 나뭇가지 바람 불고 흙덩이 질펀거리네

老農負初暄。 농부들은 따뜻함을 등허리에 쐬며

揮縻緻耒 고삐 휘어잡고 촘촘이 쟁기질에 매달리네

 

2. 仲春

蒲芽杏始花。 살구나무와 부들 잎엔 비로소 꽃 피고

鬧野鶬鶊 흐드러진 들녘엔 꾀꼬리 울음 넘쳐 나네

種播更駕牛。 멍에 진 소는 다시 씨앗 뿌리며

縱橫理糞 밭에는 여기저기 거름 냄새 넘치네

 

<노트 > 민추 자료

울타리 틈새 똥더미 속에서 우쭐우쭐 뽐내더라 / 傲然自得乎藩墻之間糞壤之中

( 장유 )

 

3.暮春

花稀新綠繁。 꽃들은 점점 지며 초록잎들 넘치고

隴麥搖高 보리 심은 언덕엔 물결처럼 찰랑찰랑

雉雊日當中。 장끼의 울음소리 한낮에 넘치고

小犢隨饁 들밥 들고 가는 길에 어린 송아지 뒤따르네

 

4.盛夏

傭人方得傭。 머슴들 여기 저기 품삯 일 넘치고

群餉釃瓮 일꾼들 마실 술 항아리에 가득하네

鋤莨劇除姦。 호미로 잡풀들 다 뽑아내고

驩謳稼沒 곡식 심는 화락한 노래에 깊이 빠져 있네.

 

5.早秋

荷鎌刈早粳。연꽃은 무르녹고 낫잡아 올벼 베며

穗茁蛇蟠벼이삭 무럭무럭 들판의 뱀들은 잠을 자고

還嫌雪翻羹。 눈처럼 반짝이는 하얀 쌀밥에 국 한 그릇

間炊靑豆 불 지피는 사이에 밥밑콩 마련하네.

 

6.仲秋

四野半靑黃。 온 들판 모두 푸르락누르락

豆肥蕎花 콩밭은 무성하고 메밀꽃은 떨어지네

犬吠識催科。 개짓는 소리에 세금 독촉하는 이 왔음을 알겠고

斷匏翁嫗박 타는 늙은이에 할머니의 넘치는 잔소리

 

< 노트 > 민추 자료에서

세금 독촉이나 백성 돌보는 일 / 催科與撫字

그저 일따라 소탈하게 처리하고 / 隨事任疎迂( 장유 )

조세를 재촉해 급히 부르는 소리를 듣지 않으매 / 不見催科呼索急

집집이 닭과 기장으로 술잔을 드는구나 / 家家鷄黍擧壺觴( 성현 )

납세를 독촉하여 받아들이되 백성을 불안하게 하지 않는 것[催科不擾], ( 정도전 )

밭갈이 파종일랑 때맞춰 해야지 / 耕種須及時

관가에서 세금을 저리 독촉하는데 / 官門苦催科( 이산해 )

 

7.暮秋

 

新酒滿瓮香。 새술 술동이에 가득 향기 넘치며

新果盈盤 새 과일들 소반 위에 가득하네.

官吏把書來。 관리들 세금 문서 가지고 오니

迎門要相문 앞에서 맞으며 서로 술잔 나눈다.

 

8.秋耕

烹萁夜勸牛。 밤새도록 콩을 삶아 소에게 주고

未寒還墾 겨울 추위 오기 앞서 밭을 일구니

墢凍方是膏。 언 땅들은 바야흐로 기름지겠지

計爲明年다음 농사 위해 계획을 세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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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음과 현주님의 인연

玄洲公 行狀 에서

 

갑자(甲子,1624) 년 봄에 역도(逆徒)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임금께서 남쪽으로 피난한다는 연락이 왔다. 공(公)은 황달병이 매우 심하여 차사(差使)를 따라잡지 못하고 나중에야 임금이 피난한 행궁(行宮)에 도착하였다. 이 때문에 사간원(司諫院)의 탄핵을 받게 되었으나 사람들이 모두 실제 병 때문이었음을 알았으며 얼마 되지 않아 좌승지(左承旨)에 제수되었다. 대간(臺諫) 한 사람이 개인적 감정을 가지고 다시 늦게 도착한 것을 문제 삼아, 다른 사람으로 교체할 것을 주장하며 이조(吏曹)를 탄핵하였다. 이 때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이 이조참의(吏曹參議)로 재직하고 있었는데, 서면 진술서의 변론(辨論)이 매우 상세하다. 그 대강을 보면 이렇다.

 

“당초 임금님께서 서울을 버리고 피난하실 때, 조찬한(趙纘韓)은 병중에 강을 건너 빈사지경에도 달려와 공주(公州)에 도착하였습니다. 그 동안 조금 좋아졌다가 그 후 합병증이 앓고 있던 황달을 악화시켜 그 증세가 눈에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임금님을 수행(隨行)했던 모든 신하들이 보고 그 진상을 알았습니다. 실상은 참으로 용서받을 만 했습니다. 한 번 탄핵 받았다 하여 어찌 장기간 동안 무관(無官)으로 있게 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한 때의 대간(臺諫)인 자가 스스로 ‘공론(公論)은 반드시 자신으로부터 나온다.’고 하며 이조(吏曹) 병조(兵曹)로 하여금 매사에 어김이 없도록 하려한다면, 그 폐단을 어찌 말로 다 지적하겠습니까?”

 

 

그 때 사헌부(司憲府)의 대사헌(大司憲) 장황(張皇)은 이조(吏曹) 징계(徵戒)를 꺼리고 있었다. 그는 공(公)이 이미 배척 받은 허물이 있는데다 사간원(司諫院)의 탄핵을 받은 데 대하여‘아끼고 비호하고 싶지만 어떻게 사정(私情)을 용인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한다. 광해군(光海君)이 재위(在位)하고 있을 때 공(公)은 고위직(高位職)에 나가지 못했다. 항상 외직(外職)을 맡았고 반정(反正) 후에 조정으로 돌아와서는 잠시 승지(承旨)를 맡은 것이 고작이었다. 당시에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은둔(隱遁)한 사람들을 제외하면, 조정 내외에서 벼슬한 뒤 승지(承旨)가 되어 나중에 고위직에 오른 자가 한 둘이 아니었는데, 인사 고과(考課)에서 오직 공(公)에게만 과실이 있다고 말한 것은 소인배들의 거짓 비방만을 들은 때문이었다. 한 때 공론(公論)이 그에게 원한을 갖게 하였으나 곧 바로 형조참의(刑曹參議)에 제수되었고 다시 승문원(承文院) 제조(提調)를 겸직하게 되었다.

 

甲子春逆适反 報至上南幸. 公所患疸病尤極 追不及差 後到行在. 以此爲言路所劾 而人皆知實病 未幾除左承旨. 有一臺諫 挾其私憾 復以後至 論遞 幷推銓曹. 金淸陰時爲吏曹參議 緘答之辭 卞明甚詳. 其略曰 當初去邠之日 趙某駄疾渡江 濱死危苦之中 趕到公州. 其間稍 後實緣病重所患疸症 正在面目. 扈從諸臣 目見知狀. 情實可恕. 豈可以一彈 而長廢乎. 若一時爲臺諫者 自謂公論必出於己 而必欲 銓曹每事 不敢違越 則其弊何可勝言哉.

 

其時 憲長張皇 引避攻斥銓曹 至以公旣有當斥之愆 且被臺劾 雖欲愛護 豈容私情云. 公在昏朝時 未嘗爲名宦 常爲州郡 入朝則暫爲承旨而已. 當時除隱遁不出人外 仕宦內外 爲承旨等官 而後爲名宰者 非一二 計而獨於公謂之有愆 此出於偏聽 後輩誣妄之謗也. 一時公論 無不寃之 旋除刑曹參議 復兼槐院提調. (淸陰先生集卷之三十九) <미유당 님의 블로그에서>

 

 

推考緘辭 甲子吏曹參議時 ( 청음 문집 잡록에서 )

云云。糾劾愆違。雖臺諫之職。愛惜人才。實銓曹之任。世道日降。人物眇然。識者之憂。恒切于此。夫有意索瘢。則世間無完人。拂拭使過。則天下無棄材。臺官論趙纘韓晩赴行在。纘韓當初去邠之日。馱疾渡江。濱死危苦之中。趕到公州。其間稍後。實緣病重。所患疸症。正在面目。扈從諸臣。多有目見而知狀者。聖王之法。原心定罪。情實可惡。終身錮之可也。如其可恕。安可以一彈而長廢乎。況凡論事之際。鮮能得中。或出於聞見之過差。或失於擬議之輕重。一低一昂。固難爲準。惟當公聽於輿言。竝參於衆心。然後庶幾用舍不爽。衡鑑無忒。若一時爲臺諫者。自謂公論必出於己。而必欲使銓曹。每事不敢違越。則其弊又何可勝言哉。近來有才之士。非有大過。而因臺諫率易論啓。擯棄不用者。已非一二。其論議偏正。雖不敢知。而國之養人材。譬如養樹木。雨露之下。積年培植。斤斧所及。一朝翦伐。士林之間。孰不嗟惜。銓曹之意。務欲舍短取長。掩疵揚美。期使片善不遺。一藝俱錄。用臻王朝以寧之吉。斯乃一國之公論。不意反以此爲私也。昔蘇軾。遭彈於御史。而張方平。力爲伸救。李崇仁。見斥於臺官。而李穡,權近。皆加推奬。執政臺諫之論。不必苟合。從古已然。鼂錯峭直之資。或流於刻薄。丙吉寬大之論。常主於忠厚。其於禆益國家之道。未知孰優。惟在人君洞察而明辨之。( 淸陰 先生集 卷之三十九에서 )

 

 

 

<< 필자 노트 >>

윗글은 현주(玄洲) ) 조 찬한(趙 纘韓 ) 님의 손자 되시는

이우당 (二憂堂) 조유상(趙柳祥)님(1634-?)이 이유당 유고집(二憂堂 遺稿集 ) 에 남긴 글이다. 현주 공(公)의 12 대 손 이며 이우당의 10 대 손인 25세 미유당 영휘(微幽堂 英輝 ) 님의 블로그엔 조상님들 생각하시는 남다른 정이 철철 넘치고 있었다.

내 조상 청음 님이 남기신 흔적을 더듬어 가다가 현주님을 만났고, 현주 님의 자료를 찾다가 그분의 후손이신 미유당 님을 알게 된 것이다. 한 번도 뵌 적이 없는 그 분이지만 그 분의 블로그를 통해서 그분의 보석처럼 반짝이는 조상님을 기리는 열성과 그윽한 정성에 찬탄을 베풀어 드리고 싶다.

몇 가지의 좋은 자료를 내 블로그에 넣게 해 주신 그분의 고마움을 전한다.

 

그분의 주소는 다음과 같다.

微幽堂http://x-text/html;charset=ms949>

[블로그] Nostalgia ToRoots

二憂堂遺稿의 번역문과 필자의 역사 에세이를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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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유당 님 의 한시 한 편>

杏壇春風 梧桐霽月, 紫陽有人 其吾師也,

三旬九食 十年一冠, 乃我職分 樂在其中,

腰金頂玉 貫朽粟陳, 於我何哉 等彼浮雲,

長醉不願醒 百年長如此.

 

행단에 봄 바람 부니, 벽오동에 제월일세.

자양산에 사람 있어, 그가 바로 내 스승이라네.

삼순에 아홉 끼 먹고, 십년에 갓 한번 써도

그게 바로 내 직분이요, 즐거움이 거기 있네.

금옥으로 치장하고, 돈꿰미 썩고 곡식 널려 있어도

내게 무슨 상관이요, 저 뜬 구름 같다네.

오래 취해 깨나고 싶지 않구나, 백년 오래도록 이 같아라.

 

         ------ 이유당 유고 중 見棄契序에서-----

               (譯者 微幽堂 趙英輝 미유당 님의 블로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