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한담/수상

김진섭의 매화찬을 강의하던 시절을 그리며

백촌거사 2007. 3. 8. 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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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찬을 강의하던 시절을 그리며

 

잠시 오던 봄이 꽃샘 바람 앞에 멈춰 서 있는 듯하다.

겨울 잠 자던 개구리들이 튀어 나오기도 하고, 남쪽에서는 매화꽃이 피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 왔는데 별안간 손끝까지 저며 오는 찬 바람이 불어오고 있다. 그러나 나뭇가지엔 봉글봉글 돋아나는 망울들이 화사하게 피울 희망을 안고 있다.

 

20 여 년 전 강단에 서서 김진섭 씨의 매화찬 문장 하나를 강의하면서 국화는 오상고절이고, 매화는 아치고절이라고 가르쳐 주어도 학생들은 매화를 오상고절, 국화를 아치고절이라고 잘못 기억하는 학생들도 있었고, 사군자 속에 무궁화 꽃을 말하는 학생들도 있어 지금도 잔잔한 미소가 떠오른다. 서정주 시인의 국화 옆에서를 매화 옆에서라고 답을 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 傲霜孤節. ( 오상고절 ) :매서운 서리를 이겨내는 꿋꿋하고 높은 절개 . 국화의 속성

雅致孤節 ( 아치고절 ) : 우아한 풍치와 높은 절개. 매화의 속성을 표현

 

가령, 우리가 혹은 눈 가운데 완전히 동화된 매화를 보고, 혹은 찬달 아래 처연히 조응된 매화를 보게 될 때, 우리는 과연 매화가 사군자의 필두로 꼽히는 이유를 알 수 있겠지만, 적설과 한월을 대비적 배경으로 삼은 다음에라야만 고요히 피는 이 꽃의 한없이 장엄하고 숭고한 기세에는 친화한 동감이라기보다는 일종의 굴복감을 우리는 품지 않을 수없는 것이니, 매화는 확실히 춘풍이 태탕한 계절에 난만히 피는 농염한 백화와는 달라, 현세적인 향락적인 꽃이 아님은 물론이요, 이꽃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우리가 찾을 수 있는 가장 초고하고 견개한 꽃이 아니면 안 될 것이다.

 

너무도 긴 문장이라 학생들은 관념적인 어려운 한자어에 막히고, 호흡에 막혀 어려움을 겪었었다. 매화의 특성이 그대로 나타난 문장이었다. 국화와 매화 두 가지는 모두가 덕과 인격과 학식이 뛰어난 군자의 덕성에 비유되는데, 국화가 속세를 떠나 고고하게 살아가는 은자라면, 매화는 봄눈이 녹기 전에 추위를 무릎 쓰고 피어나는 지조와 절개, 그리고 아름다운 여인에 비유되는 꽃이다.

긴 문장을 먼저 단어 의미부터, 그리고 구조적으로 분석하여 이해를 시키고 뜻을 전달해 주는 것에 긴 시간을 애쓰던 기억이 아련히 떠오르고 있다. 20 여 년의 세월이 성큼 물러가 있는 시간에 그들이 매화 향기처럼 은은하게 내 마음에 새겨지고 있다. 그 때 배움에 열망을 하던 그들은 지금쯤 40 대 불혹의 나이가 되어 있을 것이다.

 

국화야 너는 어이 삼월동풍 다 지내고

나목한천에 네 홀로 피었느냐

아마도 오상고절 ( 傲霜孤節 )은 너뿐인가 하노라 ( 이정보의 고시조 )

 

빙자옥질 ( 氷資玉質 )이여 눈속에 네로구나

가만히 향기 노아 황혼월을 기약하니

아마도 아치고절 ( 雅致孤節 )은 너뿐인가 하노라 ( 안민영의 고시조 )

 

고시조의 작품도 아울러 학습을 시키면서 학생들의 지식을 넓혀 나가는데 함께 피 땀을 흘리던 그 시절이 매화 꽃 피고 있는 이 시간에 더 그립다. 그 당시에는 오직 교과서 공부에만 열중을 하게 하던 시절이라 좀더 많은 작품들을 소개 해주지 못한 아쉬움이 남아 있다.

꽃 중의 왕이라 하며 화괴라고 이름 지어지는 매화 꽃이 다시 생각이 나서 우리나라 최초의 매화시라고 일컬어지는 한 시 한 편을 이제는 혼자만의 음미하는 시간을 가지며 매화꽃 향기를 맡아 보려고 한다. 뜨거운 열정을 내뿜던 그 현장은 떠났지만 아직도

내 정신 속에는 그 때의 젊음들이 호응을 해 주던 격려들이 남아 있음을 자부하며 살고 있다.

 

나이를 더해 가는 것만으로 사람은 늙지 않는다

이상을 잃어버릴 때 비로소 늙는다.

세월은 피부에 주름살을 늘려 가지만

열정을 잃으면 마음이 시든다. (사무엘 울만의 청춘 시에서 )

그런 정신으로 오늘도 삶을 엮어 가고 있다.

 

최초의 매화시 庭梅 ( 정매 ) ---------- 최광유

練艶霜輝照四隣 ( 연염상휘조사린 )

庭隅獨占臘天春 ( 정우독점뇌천춘 )

繁枝半落殘粧淺 ( 번지반락잔장천 )

晴雪初銷宿淚新 ( 청설초소숙루신 )

寒影低遮金井日 ( 한영저차금정일 )

汵香輕鎖玉窓塵 ( 냉향경소옥창진 )

故園還有臨溪樹 ( 고원환유임계수 )

應待西行萬里人 ( 응대서행만리인 )

 

풀이 서리로 곱게 표백하고 밝게 세상을 비추며

봄도 오기 전 섣달에 뜰 한켠에 홀로 피어났네

성했던 나뭇잎은 반쯤 떨어져 앙상한데

해가 뜨니 처음 쌓였던 눈이 녹아 새롭구나

찬 그림자는 나직이 금정속 해를 가리우고

싸늘한 향기는 가벼이 옥창의 티끌에 갇히었네

고향 시냇가 매화를 돌아와 다시 볼 수 있도록

서쪽 먼 길을 떠난 사람을 응당 기다려 주겠지 ( 다음 카페 麟山이라는 분의 풀이 )

 

비단처럼 곱고 서리처럼 빛이 나서 이웃까지 비추니

뜰 한 구석에서 섣달의 봄을 독차지했구나

번화한 가지 반쯤 떨어져 단장이 거의 스러진 듯

갠 눈이 갓 녹아 눈물 새로 머금었네

찬 그림자는 나직이 금정의 해를 가리웠고

싸늘한 향내는 가벼이 옥창의 먼지를 잠갔구나

내 고향에도 시냇물 가에 몇 나무

서방에 땅 손질하는 만리 사람을 기다리고 있으리 ( 민족문화 추진회 자료에서 )

 

앞 분의 풀이는 한시를 스스로 창작하시는 분의 작품이라 단순히 한자 의미만을 쫓는 해석이 아닌 운을 따라 풀이를 하시는 멋을 느낄 수가 있었다. 뒷 부분의 작품은 어느 분의 풀이인가는 모르겠으나 너무나 직역을 따라 한 것 같아 읽는 맛이 조금은 생소한 느낌을 받았다. 두 풀이 모두가 금정의 의미가 무슨 뜻인지 어려움을 가졌다. 좀더 시간을 가지고 선인의 매화에 깃든 깊숙한 멋을 맛보려고 한다. 강의 현장에서 함께 했던 80 년 대 그 때 젊음과 매화찬에 푹 빠져 있던 일이 그립기만 하다. 설풍 속에서도 분명히 봄의 숨결이 들려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