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한( 小寒 ) 전날에 ------------------------------
눈바람 온종일
창문을 치고.
두메산골엔 찾는 이 없고
산새도 날지 않아.
백발이라 늙은 몸
외롭게 혼자 앉아
오로지 병과 더불어
쓸쓸함에 잠겼어라.
小寒前一日 雪後大風
소한전일일 설후대풍
신 익상(申翼相)
雪風終日打窓扉。 (설풍종일타창비)
窮巷無人鳥不飛。 (궁항무인조불비)
白髮老翁塊獨坐。 (백발노옹괴독좌)
寂寥唯與病相依。 (적료유여병상의)
( 醒齋遺稿冊三에서 )
▶ 한자 ---------------
扉 문짝 비 窮 다할 궁 巷 거리 항 塊 홀로 괴 寂 고요할 적 寥 쓸쓸할 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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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窓扉창비 : 시골 집 창문 ▷ 窮巷 궁항 : 두메산골 마을 ▷塊獨 괴독 : 외로운 모습
▷ 寂寥적료 :쓸쓸한 모습 ▷唯與 유여 : 오로지. 다만
▶ 분석과 감상 이해
< 1 행 > : 온종일 눈이 내린 모습
< 2 행 > : 산골의 모습 ----------------- 겨울 서경
< 3 행 > : 외로운 자아의 모습
< 4 행 > : 쓸쓸한 모습 ---------------- 지은이의 서정
24 절기의 하나인 소한 (小寒)은 동지(冬至)와 대한(大寒 )사이에 있는 가장 추운 때이다.
소한 날 하루 전에 이날은 온종일 눈도 내리고 바람까지 불던 날 깊은 산골 구석에 혼자 외롭게 앉아 보내는 쓸쓸한 정경이 그려져 있다. 머리도 하얗고 몸에 병까지 찾아든 지은이의 만년의 깊은 우수가 깃들어 있다. 실존자로서의 고독감이다. 모든 것이 자연의 섭리가 가져다주는 생의 아픔들이다.
옛 문헌에는 소한 기간엔 기러기가 돌아가고, 까치가 집을 짓고, 꿩이 운다고 하는 데
무자년 소한 날(2008 년 )은 눈도 내리지 않았고, 겨울 날씨 같지 않은 포근함을 보였다.
눈 온종일 내리고 바람까지 심하게 불었던 그 당시의 소한 날의 정경이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는 시이다. 그 당시에는 매우 많은 눈이 내렸다는 사실을 유추해 볼 수가 있다.
◀ 지은이 ---------------------------------------------
신 익상(申翼相)
1634년(인조 12) - 1697년(숙종 23)
자: 숙필(叔弼) 아호: 성재(醒齋) 본관 : 고령(高靈) 시호 : 정간공 (貞簡公)
1660 년에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662 년 (현종 1년) 문과정시 (文科庭試)에 합격하였으며,
1674 년에는 북도 병마평사(北道 兵馬評事)가 되다.
숙종이 즉위한 후 남인이 권력을 장악하자 충청도 아산에 은거하다가 1680 년 김수항(金壽恒)의 주청으로 평안도 병마수군절도사에 제수되었으나 체차하였다.
경신대출척으로 남인이 대거 숙청된 후 도승지가 되었고, 이어 이조참판·전라도관찰사·평안도관찰사·,대
사헌··대사간 등을 역임했다.1684년 평안도관찰사 재임 때 영변의 철옹외성(鐵甕外城)을 수축할 것을 주
장하였다 1687 년(숙종13 년)동지중추부사가 되다. 이후 대사간, 부제학이 되다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 때 인현왕후(仁顯王后) 폐위의 부당함을 극간하고 사직하였다. 1694년 갑술
옥사(甲戌獄事)로 소론(少論)이 득세하자 공조판서가 되고, 이듬해 우의정에 올랐다.
사관(史官)으로 있을 때 직필(直筆)로 유명했었고,
문장과 시율(詩律)에 뛰어났으며, 전서(篆書)에 능하여 양주(楊州)의 《지중추이형갈(知中樞
李絅碣)》 《제용정신양비(濟用正申湸碑)》 등의 글씨를 남겼고, 저서에 《성재집(醒齋集)》이 있다.
◀ 조선 왕조 실록에 쓰인 기록<1697년(숙종 23)>
신익상은 중종조의 상신(相臣) 신용개(申用漑)의 후손(後孫)이다. 젊어서는 자못 몸가짐이 단정하고 정
중한 것으로 친구들에게 칭송을 받았으며, 과거에 합격하고 옥당(玉堂)에 들어가서는 국구(國舅)임금의
장인 가 정사에 참여하는 것과 세력이 강한 종친(宗親)의 방자함을 논하여 배척하였는데, 말이 매우 절실
하고 솔직하였다.
상이 권흉(權凶)9400) 권세를 함부로 부리는 흉악한 사람.을 보고 그들이 비록 물러났다 하더라도 남은
세력이 아직도 염려할 만한 것이 있다 하여 이해(利害)에 대한 의논을 많이 주장하다가 외방으로 내려갔
으며, 또 대범하지 못하다는 책망이 있었으므로 선비들의 공론이 부족하게 여겼었다.
당시 조정의 형상이 오이를 가르듯 노론(老論)·소론(少論)의 색목(色目)이 있었는데, 신익상이 그의 조부
(祖父) 신응구(申應榘)가 송시열(宋時烈)에게 배척당하였다 하여 유감과 한을 깊이 품고 있다가, 마침내
송시열에게서 떠나 소론의 무리가 되었었다. << 조선 왕조 실록에서 발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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